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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8화 (8/1,497)

〈 8화 〉1부 1장 (7)

젠장.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인 거지.

나는 눈앞에 놓인 금단의 물건을 두고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혹시 사이즈가 안 맞는 겐가? 저런. 하긴 우리 손녀가 좀 잘 낫긴 하지."

은근슬쩍 야한 농을 섞으며 성희롱하는 박 노인에게 벽 너머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려다 간신히 참고, 눈앞의 그것을 들어 올렸다.

입는 방법은 자세히 몰랐다. 하지만 이리저리 살펴본 끝에, 어떻게 입는지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

남은 것은 이제 착용하는 것뿐.

"꿀꺽."

나는 샤오린과 대치하던 순간보다 더 긴장된 마음으로 그것을 착용했다.

'조금 꽉 끼는데.'

역시 피닉스. 박 노인의 손녀도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피닉스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으으음...."

방구석에 놓인 전신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푸른 물빛의 머리카락과 색깔을 맞춘듯한 연하늘 색은 중요한 부위를 명백히 가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미연시인 게 원망스럽네요. 진짜."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지만 그 육체의 주인은 나다. 게임에서 피닉스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나체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빨리 위에 뭔가를 입어야겠어.'

계속 이대로 있다가는 거울을 보다가 코피를 쏟을지도 모른다.

나는 박 노인이 놓아둔 상자를 열어젖혔다. 손녀딸이 떠나기 전에 남겨둔 옷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은 한 벌의 옷.

"...신이시여."

나는 상자 안에 고이 모셔진 한 세트의 의복을 들어 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어르신."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박 노인에게 인사했다.

"뭘. 덕분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는 기분 들고 좋았네그려. 껄껄. 다음에는 일행들한테 떨어지지 말고 꼭 같이 다니거라. 괜히 또 서해무기 같은 것한테 잡아먹히지 말고. 알간?"

"조심할게요."

서해무기가 용으로 승천해도 소녀의 발 끝자락에도 닿지 못함을 노인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소녀를 볼 때마다 꼭 아비를 잃은 손녀의 모습이 떠올라 노인은 소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닌 척 하면서도 노인을 챙기려는 사소한 행동들까지도.

"그. 괜찮으시면 제가 터미널까지 호위를-"

"괜찮다니까."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태어난 곳을 두고 어디로 떠나겠느냐?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지. 그리고 말이다...."

노인은 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나 아들내미가 돌아왔을 때 그놈을 맞이할 사람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니?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빈집이면 그 녀석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냐. 효도도 안 하는 아들내미한테 효도 좀 받으려면 이 노인네가 여기서 기다려야지. 언젠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다 괴수가 습격하면요?"

"그럼 그때는 내가 바다로 돌아가는 날이지. 아. 괴수한테는 말이 안 통하겠지? 죽으면 바다에 뿌려달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어르신께서 괴수에게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위로를 하는 소녀의 모습이 어딘가 우스웠다.

"그랴. 옷 때문인가? 딱 그 나이대처럼 보이는 구만."

"끄으응."

소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박 노인을 노려봤다.

"저 스물다섯인데...."

"얘끼. 됐고 어여 가거라. 예서 헛짓하지 말고 바로 싸게싸게 신서울로 가서 히어로 등록하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소녀는 머리를 푹 숙이며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몸 건강하시고 오래 사세요. 아드님 돌아올 때까지."

"이게 그래도.... 알았다. 내 벽에 똥칠은 못 해도 아들놈 돌아오면 그대로 대갈통 후릴 때까지 살아있으마. 되었느냐?"

노인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 피닉스는 웃음을 거두고 살포시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

쿠웅.

마력으로 강화한 다리 힘으로 뛰어넘은 건물이 열 채는 넘어 보였다.

이제는 흉가나 다름없어진 건물 안에 숨어든 피닉스는 탁자 위의 먼지를 대충 털고 중앙에 괴수의 코어를 올렸다.

'어디 보자. 설정에 따르면....'

마력이 실처럼 코어를 감싸 안았다.

파직. 파지직.

작은 구슬과 같던 코어를 불꽃의 마력과 반응해 허공에 떠올랐다. 불꽃은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해야겠지.'

피닉스, 나는 원작의 장면에서 간부들이 하던 '괴인 작성'의 장면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태양이 명한다. 그대, 날짐승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지성을 겸비한 존재로 거듭날 지으니. 나는 그대의 탄생을 축복하는 자. 나는 그대의 죽음을 거두어갈 자. 창염의 피닉스."

코어 위에 손을 살포시 올려 약간의 마력을 더 불어넣었다. 타오르던 불꽃은 마치 외피처럼 비늘이 되어 온몸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거기에 베일 한 조각 추가.'

나는 목도리처럼 감싼 베일을 한 조각 뜯어 코어에 집어넣었다.

괴수의 몸이 빛나며 청록색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애써 쫙 펴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아무 멘트를 생각해 영창의 몇 소절을 더 집어넣었다.

"그대는 두 세상에 발을 디딘 자. 세상을 빛내고 지킬 화염의 창이 되리니."

핵을 통해 먹어치우는 마력도 마력이지만 심력의 소모가 장난 아니다. 원작에서 간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의식을 전 세계 생중계로 했는지 모르겠다. 쪽팔림이라는 게 없나?

나는 코어에서 손을 떼고 손가락을 튕겼다.

"현현하라. 나의 하인이여."

영창의 끝. 거센 마력 폭풍이 집안에 휘몰아쳤다.

[......창염에서 태어난 종복이 인사 올립니다. 주인님.]

전자음의 나열과 같은 소리로 말하며 괴수, 아니 괴인 서해무기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 그래요. 그런데 사람 말로 해도 돼요."

"주인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스크와 같은 입마개가 열리며 육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괴인.

아직은 이 세계에 등장하기에 이르지만, 원작 시점에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악당들. 히어로가 타락해 범죄를 일삼는 빌런과는 달리, 인류의 살해와 지구의 파괴라는 사명을 생의 이유로 삼고 있는 존재들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악의 조직 간부로 생각하고 있는 정령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

나는 괴인 서해무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대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죠?"

"주인님의 종복으로서, 주인님의 명에 따라 세상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래서 괴인 작성을 할 때 영창의 문구가 중요하다. 나는 어깨를 두드렸다가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나요?"

"...어, 음. 바다를 지킵니까? 쓰레기를 버리는 인간들에게서?"

근본이 물고기라서 그런지 세상에 대한 인식이 아직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서해무기에게서 물러났다.

'일일이 가르쳐줄 시간 없는데. 괜히 만들었나.'

S급 괴수라면 인간 이상의 지능을 보일 텐데 조금 아쉽다. 하지만 모처럼 처음으로 만든 괴인이니 폐기하기에는 아깝기도 했다. 해야 할 역할도 있고.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말아야지. 나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언젠가 다가올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대는 이곳 영종도에서 힘을 기르세요. 이 섬의 주인이 되는 것도 좋겠죠."

"그 말씀은?"

"영종도 남쪽에 실미도, 그곳에 A급 괴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죽이고 이 영종도 일대도 점령하세요.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수가 이곳을 지나갈 수 없도록 막으세요. 혹시나 히어로들이 그대를 퇴치하러 오거든 몸을 숨기고 절대로 들키지 마세요. 그리고 이 일대에 사는 인간은..."

"먹어도 됩니까?"

이 새끼가 말을 끊네. 나는 손을 들어 서해무기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인간은 그대로 둡니다. 앞으로 우리가 지킬 세상에는 '인류'도 들어있습니다. 이해했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서해무기는 움푹 팬 비늘을 만지작거리며 폈다.

"그런데 혹시나 인간에게 들키면 어찌합니까? 주인님께서는 제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시는 듯합니다만."

"어차피 있지도 않겠지만 그냥 민간인들 상대로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그냥 몸을 숨기세요. 절대로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고. 알겠습니까?."

나는 바람에 흩날린 옷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몸을 돌렸다.

"앞서 말한 건 당신의 행동지침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상의의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둔 사진을 펼쳤다. 그곳에는 노인과 손녀, 그리고 환하게 웃는 청년이 있었다.

" "

서해무기는 아무 말 없이 사진을 노려보고 있다. 나는 냉정함을 가장하며 사진 속 노인을 가리켰다.

"이 노인을 지켜보는 겁니다. 알겠나요? 영종도 점령도 실미도의 괴수 퇴치도 이 노인이 잠든 사이에 움직이세요."

"예. 그런데 이 인간과 주인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서해무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인간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섬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대에게 대신 이 은혜를 갚게 하고자 합니다. 그는 오래전 잃어버린 '아들'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의 집 방향을 가리키고는 폐허를 나섰다. 서해무기는 나를 배웅할 생각조차 못 하며 창밖 너머 노인의 집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막 마당을 쓸러 나온 노인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슬쩍 폐허에 시선을 뒀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건강하세요."

내가 해 줄 말은 그저 그뿐이었다. 노인은 듣지 못하겠지만.

" "

서해무기가 창문에 손을 올리며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세계는 참 비극적인 세상이야."

세상에는 오로지 동식물만이 괴수로 변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간혹 사람이 괴수로 변하기도 한다. 모종의 이유로 괴수의 코어를 집어삼킨 경우처럼.

"...알았으면 이렇게는 안 했지."

나는 마력으로 서해무기를 터뜨렸던 두 손을 꽉 부여잡으며 도로를 따라 걸었다.

* * *

괴인은 생각했다.

자신을 만들어낸 주인으로부터의 명령.

인간을 죽이라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파괴하라는 본능마저 잠재우는 기이한 명령.

온갖 이상한 조항을 지시했지만, 그 근본은 저 보잘것없는 노인을 지켜보라는 명령이다.

괴인은 생각했다.

창조주로부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이미 괴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은 '서해무기'라는 이름만을 이어 받았을 뿐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

하지만 근본인 괴수로서 가진 살육본능과 파괴본능을 억누르며 사람을 지켜보라는 그 명령이,

"아이구, 허리야."

나쁘지 않았다.

괴인은 백사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언덕 위의 나무 위에 걸터앉아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주룩.

안구에서 바닷물이 흘러나왔다. 아직 바다 괴수였을 때의 잔재가 남아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코어로부터 태어난 존재일 텐데.

괴인은 계속 흘러나오는 물을 닦아내며 노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뒤로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

산속에 숨어있던 늑대형 괴수가 민가를 향해 어슬렁거리며 내려가고 있다. 괴인은 나무에서 번쩍 뛰어올라 늑대의 뒤를 덮쳤다.

콰득!

괴인의 날카로운 주먹이 늑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동시에 괴인의 손에서 약간의 불꽃이 튀었다.

괴수는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고, 괴인은 움켜진 심장을 바깥으로 빼내어 다시 나무 위로 점프했다.

"......으잉?"

박 노인은 비릿한 피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이제 여기까지 괴수가 내려오는 걸까 싶어 잔뜩 긴장한 노인은 길에 굴러다니던 쇠꼬챙이를 들고 조심스레 앞으로 걸었다.

"......육시럴."

박 노인의 눈에는 죽은 늑대 괴수의 시체가 있었다. 괴수는 심장이 뜯겨나간 채, 꿰뚫린 구멍에서부터 서서히 익어가고 있었다.

"그 꼬맹이 짓인가?"

박 노인은 이가 벌벌 떨렸다. 만약 그 푸른 소녀가 자신을 돕기 위해 주변의 괴수를 전부 쳐죽이고 떠났다고 한다면, 이는 박 노인에게 상당히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괴물을 구했구만."

박 노인은 팔짱을 낀 채 몸을 떨며 집으로 들어갔다. 괴인은 여전히 나무에서 노인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캬아악...!

늑대 괴수의 타들어가는 냄새에 다른 괴수들도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괴인은 주인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챙이'들이 남아있음을 깨닫고, 조용히 몸을 날렸다.

영종도.

괴수의 군락지가 되고 만 땅.

그 작은 섬에 새로운 지배자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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