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막간 그것이 빌런과 히어로의 관계임을 자각하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스륵.
익숙한 방. 7번대의 기지.
몸을 일으키자 흘러떨어지는 이불을 내버려 둔채, 스페이드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기이하게도, 방까지 돌아온 기억이 없었다.
“으음...?”
‘어제는 13호가 뭔가를 시켜서.’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본다.
어제, 13호의 명령을 받아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히어로를 습격하라고 했었지. 막상 싸워보니 엄청 강한 도깨비였고.’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분투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기절했다.
도대체 기절한 자신이 어떻게 돌아온 걸까. 그 도깨비 여자도 히어로일텐데, 히어로인 자신이 빌런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아닐까.
“에휴.”
한숨과 함께 스페이드는 붉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몸은 문제가 없다. 다친 곳도 없고 팔팔하다. 몸 상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스페이드는 침대 아래로 내려와 쭈~~~욱 스트레칭을 했다.
등골을 펴자, 그녀의 딱 적당한 흉부만큼 돌출된 티셔츠의 굴곡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응, 좋다. 몸엔 이상이 없다.
그나저나, 13호 그 놈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아니, 걱정하는 건 아니고.
...아닌가, 걱정인가.
'그 놈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도, 뭔가 더럽게 찜찜하네.'
애초에 이번 일은 실패한 게 다행인 일이다. 히어로를 시켜서 히어로를 습격시키다니, 13호는 정말 나쁜 악당이다.
그러니, 실패가 낫다.
'그런데도....'
자신은 히어로, 그 인간은 빌런.
그 놈은 자신을 세뇌해 장기말이나 성노리개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그런 녀석이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뭔가 찜찜하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
찜찜한 기분에 눈을 내리깔고 있자니, 어쩐지 목 뒤에 위화감이 있음을 눈치챘다.
응? 으음? 뭐지?
손을 들어 매만져봐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근처에 있던 거울로 살펴보니,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 뒷목 부근에 가시 같은 문양이 나 있었다.
“이게 뭐지...?”
* * *
“13호님, 하나도 남김없이 드셔야 합니다.”
“13호, 먹어라, 먹어. 다 먹어. 혼자서 싹쓸이해도 되니까 전부 먹어. 일부러 무한리필집으로 왔으니까.”
“그래, 먹어야지. 안 먹으면 어쩌겠어. 잔뜩 상처받은 우리 선봉장님의 마음을 치유시키려면 일단 먹는 것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렇지?”
각각 참모, 보스, 도로시가 한 말이다.
눈 앞에는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워지는 소고기.
주변에는 온통 연기와 자욱한 고기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퀭한 눈으로 구워지는 고기를 내려보고 있다.
“.......”
“왜 그래, 13호?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 아, 역시 몸이 아직 안 좋았나? 도로시 말로는 몸은 이제 괜찮다고....”
“아녜요, 보스. 저건 몸 문제가 아니라 정신 문제예요.”
“아하. 꼬맹이한테 착정당해서 패배한 게 그렇게나 마음 쓰이는 걸까? 괜찮아! 괜찮다고! 힘내, 13호!”
“.......”
“야, 13호. 보스가 말씀하시잖아. 뭐라고 말이라도 해. ...죽었나?”
“13호님? 13호님? 여기 당신의 사랑스러운 부하 참모입니다! 부디 뭐라고 말씀해주세요!”
“13호? 야, 13호! 괜찮아? 뭐라고 말 좀 해보라니까?”
“.......”
“앗...! 보스, 몸 상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저 검사하는 거 깜빡한 게 있어요.”
“도로시? 뭔데? 무슨 병이라도 있어?”
“병이라면 병이랄까... 혈액검사나 MRI 같은 신체 측정은 다 했는데, 그거, 거기가 서는지는 확인 못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니 거기가 서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맙소사, 도로시 양? 그게 정말이에요? 13호님이 발기부전이라니,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 음... 시, 13호? 그게... 그렇지. 남자로서 기능이 좀 부족할 수도 있는 거지 뭐! 네가 허접에 X밥 같은 남자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보스니까!”
“으흑... 맞습니다, 13호님! 거기가 서지 않더라도 저는 영원히 당신의 부하니까요! 우리 같이 치료할 방법을 찾아봐요! 제 빈약한 몸이라도 얼마든지 써주세요 13호님!”
......아니라고!
그딴 것 때문에 풀 죽은 거 아니라고!
잠깐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불능이 되어버린 게 기정사실이라도 되어버린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이를 갈며 도로시를 노려보았다.
헷, 하고 혀를 쏙 내미는 도로시.
저 자식, 지가 개발한 측정 도구로 몸에 이상이 있나 없나 전부 살펴봤으니까, 진짜 아무런 문제 없는 건 다 알텐데.
“어라, 13호님은 이제 거기가 안 서는 건가요?”
“거기가 안 서는 남자한테 남자로서의 가치가 있나...?”
거기다 테이블 끝 쪽에 앉은 전 【시궁쥐】의 멤버인 에이에이와 씨씨도 지들끼리 그렇게 속닥이고 있다. 다 들린다 이것들아.
‘아니라고 진짜.’
지금 풀 죽은 건, 오로지 그 놈의 히어로들한테 속수무책으로 져버려서 침울해진 것 뿐이다.
덧붙여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일어난 오늘 아침부터 보스라던가 참모라던가 애플이라던가 자꾸 달라붙어서 귀찮게 한 것도 있었고.
지나치게 신경 써주면 오히려 피곤한 법이다.
거기다.
――‘괜찮아, 13호! 질 수도 있는 거지! 보스로서 네 실패를 친히 용서할게! 그러니까 힘내!’
――‘상대는 무슨 히어로? 사진이라도 있어? 보여줘!’
――‘...이, 이런 어린 여자애한테... 응! 그럴 수도 있지! 13호도 인간이니까... 질 수도... 우와아....’
――‘이게 수천년은 살았을 선녀...? 아하하, 바보 같은 소리도 작작해라 미친놈아.’
――‘......13호. 알겠어, 알겠다고. 믿어줄게... 하아... 어린 여자애한테 졌다는 사실을 그렇게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 저기, 13호. 도로시가 그러는데, 13호는 조루토끼인지 뭔지라는데 무슨 뜻이야?’
“........!!!!”
“13호? 야, 괜찮아? 왜 갑자기 혼자 어깨를 떨고 그래? 아직 뭔가 후유증이 남아있는 거야?”
“아녜요, 보스. 13호는 조루토끼라 그런 거예요.”
“그, 그렇구나... 13호는 조루토끼라서... 거기다 발기부전까지... 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13호! 이 보스는 다 이해한다!”
아, 제발.
눈물날 것 같아.
살려줘 진짜...!
* * *
“......정말, 두 분 다 13호님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핀으로 고전해 이마를 깐 애플이 한숨과 함께 다가왔다. 두 손에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가 들려있었다.
옆에는 마찬가지로 접시를 든 채 고기를 침을 흘리며 내려다보는 닥터도 서 있다.
이렇게 총 여덞명이, 현재 【어비스】의 전원이다.
결국 전원 범죄자인 셈이지만, 딱히 누군가 우릴 신경 쓰거나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플은 우아하게 다가와, 두 개를 붙인 테이블 양쪽에 고기 접시를 내려놓았다.
“13호님의 몸에 이상은 전혀 없어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보스.”
“응? 애플 네가 어떻게 알아?”
“13호님의 소중한 물건이 팔팔한 건 아침에 제가 이미 확인했으니까요.”
“아침에?”
“네. 자고 있는 13호님을 덮치면서 확인했는데, 이상 없는 건강한 아들님이었습니다.”
보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애플을 바라보고, 나는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숙였다.
남이 잠들어 있던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여자는.
해명할 생각은 없는지, 애플은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집게를 들어, 구워지고 있는 고기를 적당히 정리했다.
“다 익었습니다. 드시면 될 것 같아요.”
“으, 응. 그래, 13호. 일단 먹어. 다 먹어. 남김없이 먹어. 힘내야지.”
“불초 이 애플, 조언드리자면 일단 고깃집에 왔으니 첫째도 둘째도 셋째와 넷째를 넘어 다섯째까지도 일단 고기입니다. 고기를 드셔주세요. 야채는 드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채소가 먹고 싶으면 채소가게에 가면 되니까. 기껏 고깃집에 왔으니 고기를 드셔요.”
고기에 대한 정신이 정말 투철한 여자다.
“고기는 최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기를 먹으면 일단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없던 힘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 고기입니다. 고기고기고기고기. 자, 드셔요. 아~ 해보세요.”
예쁜 젓가락질로 집어든 고기를, 나는 힘없이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우물....
맛있어.
“......뭐지, 방금 13호가 귀여워보였는데.”
고기 맛의 여운에 잠긴 내 얼굴을, 보스가 눈을 흘겨뜨며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여자는.
“자, 13호. 나도 해줄테니까. 아~ 해봐.”
부끄럽지만, 보스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다. 거기다 보스한테서 받는 ‘아앙~’이라니.
나는 입을 벌려 넙죽 받아먹었다.
“......진짜 토끼 같네.”
그 별명은 그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진짜 제발요.
* * *
“스페이드는?”
고기를 먹으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를 해나가기로 했다.
일단 스페이드의 목숨을 인질로 앞으로도 계속 불려나갈 것 같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해 준 건 참모였다.
“그 아가씨라면 벌써 팔팔해져서, 오늘도 임무라고 하더랍니다.”
“......그 여자는 진짜 미친 거야? 바로 어제 일이었다고? 그렇게 기절할 정도로 쳐맞고서?”
그게 젊음인가.
20대 초반과 후반의 벽은 마리아나 해구보다도 깊다. 나는 도저히 엄두도 나질 않았다. 지금도 한 사흘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고 싶은데.
“오늘은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아서, 세뇌 암시로 임무에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뒀습니다. 앞으로 사흘 정도는 푹 쉬겠죠. 라헤에게도 말해뒀습니다.”
“그런데 13호, 보고는 들었는데 그런 게 진짜 있는 거야? 천년 산 도깨비라느니, 선녀라느니. 그냥 옛날이야기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보스도 고기를 냠냠 집어먹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저도 믿고 싶진 않습니다만... 실제로 있으니까 옛날이야기 같은 데도 나온 거 아닐까요?”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랴, 모델이 되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옛날이야기 같은 구전으로도 내려온 게 아닐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참모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옛 도깨비는 아마도 유럽권이나 중동의 이방인들을 그렇게 본 게 아니냐, 하는 속설도 있습니다만. 결국 뭐가 진짜인지는 알 수가 없죠.”
하지만 도깨비도 선녀도 실제로 있었다.
이 두 눈으로 보고, 그 인간답지 않은 특징들도 똑똑히 다 봤다.
“하지만 보스, 13호님. 문제는 상대가 진짜 도깨비인가, 선녀인가 하는게 아닙니다. 단순한 사기꾼이고, 평범히 좀 강한 각성자일지도 몰라요.”
“흐음.”
“문제는 지금 13호님이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정면에 앉은 도로시가 언짢은 듯 내 발을 꾸욱 밟았다.
“한심한 녀석.”
이 망할 과학자.
...할 말은 없지만.
“스페이드의 목숨이 담보란 말이지?”
보스가 중얼거렸다.
지금 스페이드의 목에는 백설이 남겨 둔 표식이 있다.
가시 문양의 표식은, 백설이 바랄 때면 언제든 스페이드의 목을 물어 뜯을 것이라 한다.
아무래도 백설은 앞으로도 스페이드를 인질로 내게 뭔가를 요구할 셈인 모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다....
“13호.”
내가 잠깐 고민에 빠져있자니, 보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스페이드 그 여자는 히어로잖아.”
“예, 보스.”
“그리고 너는 빌런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아무 상관 없는 거 아냐?”
보스가 담백하게 말했다. 지금 막 딱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으면서.
“너는 빌런, 그 여자는 히어로. 히어로도 빌런도 전부 목숨을 걸고 이 짓을 하고 있어. 그게 네 지론이잖아.”
“.......”
“오히려 빌런에게 당해서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히어로가 이상한 거지. 지금 와서 죽은들 원망할 수도 없을 걸? 원래 그런 세상이잖아.”
“.......”
“알겠어, 13호?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보스는 히어로를 싫어한다. 그건 그녀가 【어비스】를 최초에 설립했을 때부터 내게 몇 번이나 했던 말이다.
“13호. 굳이 네가 위험을 무릅 쓸 필요는 없어. 너는 빌런이고, 나는 네 보스니까. 그러니까....”
보스는 눈을 내리깐 채, 그러나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분노도 아니고 회한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비탄도 아니고.
근심도 아니고 우울도 아니고 걱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뻐하는 것도 아닌 얼굴로.
한 점 흐림 없이, 내게 말했다.
매정하게 말했다.
“――스페이드를 버려, 13호.”
“.......”
그 말은.
동경하고 존경하고 충성을 다 바친 보스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어쩐지 혀끝에서 쓴맛이 나고, 심장에 무언가가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