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64 빌런은 선녀님을 만났습니다(1)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음.....?!”
전투의 여운과 옷을 홀라당 태워버린 슬픔에 방심했던 한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굵직한 쇠사슬이 튀어나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뭔가를 하기도, 피하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양쪽 손목을 붙잡혔다.
뱀처럼 손목을 타고 팔을 휘감던 사슬이, 단단하게 매인 것을 확인하자 이제는 박제하듯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오오오오...?”
순간적인 반응으로 팔에 도깨비불을 두르고, 강화된 팔힘으로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양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녀의 두 팔을 잡아당기고,
“읍?!”
바로 뒤에서.
그녀의 얼굴 양 옆으로.
불쑥 내밀어진 팔, 그 손에 들린 손수건으로 청의 입과 코를 그대로 꽉 틀어막았다.
“제발 부탁이니 가만히 있어라...!”
등 뒤에서 들려온 것은 처음들어보는 수상한 남자의목소리.
줄곧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기척은 이 남자의 것이 분명하다.
‘헌데 어떻게?’
아무리 방심했다곤 하나.
어떻게 들키지 않고 자신의 등 뒤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
청이 당장 떨어지라는 듯 난동을 부렸지만, 등 뒤에서 튀어나온 팔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몸을 꽉 붙들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다리로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보다 상대 또한 이 경우의 제압법을 잘 알고 있다는 양, 두 다리와 팔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녀를 꼼짝 못하게 찍어눌렀다.
“읍......!!”
입과 코를 가린 천 너머에서는달콤한 향기가 났다.
마취제, 혹은――
“....웁.......”
바둥거리며 난폭하게 몸부림치던 청의 몸이, 차츰차츰 반응을 잃고 가라앉아갔다.
조금 후, 알몸에 점퍼만 걸친 도깨비 여성의 몸이, 두 팔을 휘감은 사슬에 매달리듯 추욱 늘어졌다.
* * *
“......됐나?”
빌런 13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추욱 늘어진 히어로의 기색을 살폈다.
혹시 몰라 세뇌약을 적신 천은 여전히 입가를 틀어막은 상태다. 다만 질식할까 염려해 손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하아... 후우....
마지막에 청이 난폭하게 저항했다곤 해도, 지금 13호에게선필요 이상으로 땀이 잔뜩 흐르고,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스페이드가 전투하는 내내 잘못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어느 타이밍에 나서면 좋을까 초조해하며 지켜본 탓이다.
중간에도 몇 번이나 난입할까 고민했으며, 이렇게 튀어나오기 전에도 스페이드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나 청을 덮쳐야 하나 끝도 없이 갈팡질팡했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뛰쳐나왔지만.
달각....
청이 부순 인형의 잔재가, 13호의 발에 닿아 데굴 굴렀다.
청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온 비결이 이 인형에 있었다.
본래 참모의 능력인 【그림자 이동】은 지정해 놓은 그림자에 밖에는 적용이 안 된다.
평소에는 참모 자신의 그림자와 13호의 그림자를 연결해놓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굴러다니는 인형은 참모의마력과 그림자로 만들어 낸 것들이라, 이 인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동】시킬 수 있었다.
처음에 인형들의 무리로 습격시킨 건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기도 하다.
“흐음?”
축 늘어진 청을 품에 안고 꽉 붙들고 있는데, 차츰 긴장이 풀리며 손 안에 닿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정체를 깨달았다.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집. 그가운데 닿는 묘한돌기의 감촉.
크다고는 할 수없지만, 없는 것도 아닌 딱 좋은 크기의 가슴이다.
도깨비의 유방도 보통 인간과 다를바 없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그렇게 싸웠는데....’
먼지 냄새에 뒤섞여 흘러드는 달큼한 꽃향기, 혹은 고급스레 빚어만든 듯한 술향기.
힘없이 흘러내리는 고운 단발머리에서, 그런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촤르륵!
촤륵....
청을 붙잡기 위해 세뇌한 히어로들에게서 야금야금 모아왔던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만들어 낸 사슬이, 차츰 먼지가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력이 다 된 모양이다. 이 여자를 이만큼이나 붙잡았으면 할 일은 다한 거다. 수고했어, 사슬들아.
자.
그럼 이제 이대로 붙잡아 아지트로 데려가면――
“멍청하구나.”
“어?”
순간.
눈 앞의 풍경이 빙글 돌았다.
쿠우우우웅!!
“커흑......?!”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등이아픔을 호소한다. 머리가, 눈 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 잠깐, 그 한순간에 가녀린 팔에 목을 잡히고, 가녀린 다리에 다리가 얽히고, 그대로풍차처럼 제자리에서 두 번이나 돌려지고 힘차게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기절한, 게...?’
“이리도 멍청한 수컷이 다있다니,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는구나야.”
“윽...!?”
부드러운 맨발이, 쓰러진 내 얼굴을 가차없이 짓밟았다.
“뭐, 뭐야... 왜 기절 안한 거야?! 혹시 몰라서 마취약까지 적셨는데...!”
“마취약까지...? 그렇다면 다른 약도 있었단 말이냐?”
“.......”
“뭐든 상관 없지마는.”
도깨비 청은.
내 얼굴에 발을 올린 채 즐겁다는 듯 씨익 웃었다. 달빛 아래, 그리고 둥둥 떠다니는 푸른 도깨비불 아래 비쳐보이는 그 미소는 음탕한 요녀의 것과도 비슷해보였다.
“요즘 젊은 것들은 도깨비 얘기도 모르나. 도깨비는 독이 안 먹힌다, 빙신아.”
“......허.”
“『인간은 독을 무서워하고, 도깨비는 피를 무서워한다』... 뭐, 그런 말도 있고. 나는 그다지 피가 무섭지는 않지마는.”
“그렇다면 조금 전에축 늘어졌던 건....”
“당근 연기지. 도깨비는 거짓말과 장난과 농담을 좋아한다. 그 자그마한 뇌에 확실하게 기억해둬라, 빙신아.”
매도의 말을 입에 담으며, 청은 13호를 꾹꾹 발로 눌러밟았다.
* * *
‘자, 그러면 이 빙신을 어떻게 할까.’
최근 자신의 스승이자 주인인 백설선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저 감일 뿐이지만, 지금 자신의발 아래에 눌린 이 한심한 남자가 ‘그’ 빌런인 것 같았다.
이것 참 난감하다. 히어로를 습격한 빌런이니, 마땅히 그 자리에서 즉각 사살하더라도 문제가 될 건 없는데.
백설선녀가 굳이 언급한 인간을 손댔다가 뭔가 일이 꼬일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그 할망, 마음대로 안 되면 오지게 땡깡부리고.’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기지로 끌고 갈까? 저 여자랑 같이?
아, 혹시 저 여자는 그 때 언급했던 7번대의 히어로려나?
그럼 둘 다 끌고가면 되려나――
“거기까지하렴, 청아.”
잠시 고민하며 꾹꾹 짓밟아대던청은, 이내 들려온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왔다.
“――선녀님.”
“그래. 쭉 지켜보고 있었단다.충분히 즐긴 모양이구나.”
선녀다운 느낌이물씬 드는, 시대착오적인 링 모양머리스타일. 척 보기에도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외견에, 안 그래도 비칠 듯 투명하고 흰 피부를 가졌는데도 머리카락도 백발.
평소의 히어로제복조차 입지 않고, 전설 그대로의 모습처럼 팔랑거리는 한복과 날개옷을 두른 채, 공중에 둥실 떠서 지상을 내려보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달을 등진 채 지상을 굽이 내려보는 그 모습에서는 신성함마저 느껴져, 평범한 사람이면 그 광경에 저도 모르게 넙죽 엎드려 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주변에도 옛적에 결계를 펼쳐놨단다. 그러니 여기서 일어난 일은 세간의 이들은 아무도 모를게야.”
“역시, 이건할...선녀님이 하신 거군요.”
둥실둥실 떠있던 백설의 몸이, 천천히 내려와 이윽고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완전히 내려섰다.
마침 그녀가 착지한 위치가, 쓰러진 스페이드의 옆이었다.
“그래, 이 아이는....”
선녀 백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흰 손을 스페이드를 향해 내밀려 하고,
“손대지 마라!”
그런 그녀를 만류하듯.
13호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호오?”
“그 여자는 내 거다. 손대지 마...!”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는 백설. 그리고 눈썹을 꿈찔거리며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청.
“이게 어딜 감히!”
빠악!
13호의 얼굴을 꾹꾹 밟던 청은, 그대로 13호의 얼굴을 맨발로 가격했다. 13호의 얼굴이 휙 돌아간다. 뺨이 얼얼하다. 내일이면 분명 두 배로 부어오를게 분명하다.
“하등한 인간이 주제란 걸 모르는 것이냐! 감히 선녀님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더냐! 오늘 네 놈의 뼈를 아작내고 분수란 것을 그 몸의 새겨줘야 겠더냐!”
청의 근처를 떠다니던 푸른 불꽃이 크게 일렁였다. 그녀의 분노를 드러내듯, 푸르게 빛나는 두눈동자도 지금은 거칠게 빛을 흩뿌렸다.
“일어나라! 멍청한 것!”
뇌가 흔들려 정신이 몽롱해진 13호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끌어올린다.
그 가녀린 팔로,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들어올렸다.
당장에라도 쳐죽일 듯 분노로 씩씩거리던 청이었으나,
“청아. 내 분을 다스리라 누누히 말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나직이 울리는 백설의 말에, 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제가 분을 내는 건 오로지 선녀님에 관련된 일 뿐입니다.”
“그건 참 고맙구나. 네가 심성이 착하고 곱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느니.자아, 그보다 이 아이인데.”
백설이 손끝을 흔들자, 그대로 공중에 빛의 알갱이가 나타나더니 쓰러진 스페이드를 향해 스며들었다.
“...하지...마...!”
“괜찮느니. 치료를 해주는 것뿐이다. 청이가 조절해 준 덕분인지 별로 다치지는 않았다마는, 여자아이의 몸에 상처가 남는 건 좋지 않으니 말이다.”
이어서 백설은 자신의 근처를 둥둥 날아다니던 날개옷을 잡아당겨, 그대로 스페이드의 위에 던지듯 풀어주었다.
“여자아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도 보기 그렇지.”
그러자 스페이드의 몸이 둥실 떠오르고, 날개옷이 그녀를 지키는 항성처럼 근처를 떠다녔다.
무척이나 신비한 광경이었다.
상처가 난 피부를 치유하며 따스하게 감싸안는빛무리며, 주변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하늘하늘한 천이라니.
“딱히 이 아이를 고발하거나, 어딘가에 팔아넘기거나, 끌고 가 감금할 생각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단다, 젊은 아가.”
“.......”
13호는 조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여자애가 자기를 젊은 아가라고 부르고 있으니.
위화감 덩어리야...!
“청아, 그 아이를 놔주거라.”
“네.”
쿵!
“악?!”
난데없이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그래도 팔은 붙잡고 있거라.”
“예, 선녀님.”
“등 뒤로... 그렇지.”
백설이 소매로 입가를 가린채 지시하는 대로, 청은 거리낌 없이 13호의 두 팔을 뒤로 휙 꺾고, 못 움직이게 꽉 붙들었다.
“......당신이 히어로협회의 총대장이지? 사령관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만나고 싶었는데.”
“너――”
“청아, 괜찮다.그만하거라. 말투야 어찌되었든 나는 상관없다. 그보다 아가...자네는 빌런 13호가 맞겠지?”
화를 내려던 청이다시금 입을 다물고, 13호는 표표히 서있는 백설을 노려봤다.
“맞긴 한데....”
“좋아, 잘 됐구나.”
선녀 백설의 눈이 사람 좋게 호를 그렸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 눈웃음.
그리고 입가를 가리던 소매를 치웠다.
드러난 입매도 분명히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는데.
어쩐지 나이에 비해 요염해 보이는 그 미소는... 직시한 순간, 13호의 등골에 차가운 오한이 들게 만들었다.
‘......? 뭐지?’
뭔가,본능이 호소한다.
저 여자랑은 엮이면 안 된다고. 당장 이 자리를 떠야만 한다고.
저 순해보이고 어려보이기만 하는 선녀를, 어떻게든 피해야만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한다.
뭐지? 왜 이러지? 내 머리가 고장났나?
그렇게고민하는 사이, 선녀 백설은 이미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뺨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좋구나, 좋아. 이게 몇 년... 몇십... 아니, 몇 백 년 만인가.”
그녀는 그 자그마한 붉은 입술을, 복숭아빛 혀로 할짝 핥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젊은 남자의 맛 좀 보자꾸나.”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