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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화 〉#63 그 빌런은 도깨비를 만났습니다(1) (258/271)



〈 258화 〉#63 그 빌런은 도깨비를 만났습니다(1)

“.......흠?”


“응? 뭐예요, 할멈. 일해.”

“할멈이라고 하지 말거라... 육체는 젊디 젊은 몸이건만....”

“완전 웃겨. 정신은 몇천살이면서.”


“네 녀석도 할 말은 없을 터인데?”


“할멈에 비하면 어린애지. 아니면 청년?”

“...됐다.”

히어로협회의 본부. 그 최상층의 방에서, 선녀 백설은 입을 다물고 눈 앞의 서류에 끄적끄적 뭔가를 적어나갔다.


이미 시간은 한밤중, 밖은 여기저기 불이 꺼지고 가로등이 켜지며 일부의 대학생들은 ‘파리나잇!’을 시작하는 시간대였다.


“야근이라니....”

웬만한 일들은 세상물정을 잘 아는 측근 청이나 대장들이 끝내는 편이라, 사령관인 그녀에게까지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며 룰루랄라 놀던 백설은 지금 그 응보를 받는다는 듯 서류의 산을 쌓아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총대장이자 사령관.


웬만한 일들은 부하 선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녀에게까지 오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까지 도달했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고, 복잡한 안건이라는 뜻이다.


그런 서류가, 산처럼.


머리가 아파 땡땡이를 치고 싶어질 정도다.


“청아.”

“응?”

“이 몸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구나.”

“그러시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지?”

“모르겠는데요.”

백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너를 그렇게 눈치없게 키우지 않았다.”


“저는 선녀님을 그렇게 버릇없이 키우지 않았습니다.”

“예끼?! 연장자한테 말하는 버릇 보소?!”

“나이야 100년 넘어갔을 즈음이면 더 할 말 없잖아! 그보다 근 몇백 년, 당신  없었으면 밥 쫄쫄 굶고 미이라 됐을걸?! 이번에 가챠한다고 용돈 다 쓴 것도 불쌍해서 식비만큼은 챙겨드렸잖아요!”


“......하, 할 말이 없다만....”

“일 좀 하세요, 식충이.”


백설이 눈에 띄게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다시 서류작업을 재개했다.


탄식과 한숨을 푹푹 내뱉으며, 절망 어린 표정으로 쌓여있는 서류를 쳐다보는 백설.

그 모습을 쳐다보자니 따끔, 하고 청의 가슴이 아파왔다.


‘...원래라면 속세를 벗어나서 한가롭게 지낼 분이시긴 한데.’


인간들과 연을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신과는 다르게, 백설은 그저 순수한 선의로 인간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있다.

『대재해』. 혹은 『아웃브레이크』라고도 불리는 각성자들의 갑작스런 대량발생 사건.


갑작스레 발발한 이능자들의 격류에 시대가 이리저리 휩쓸려갔을 때, 만약 백설선녀가 없었다면 혼란이 그렇게 빠르게 수습 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측근인 자신이 없었다면 제대로 돈 관리도 못 하고 쫄쫄 굶었을 거라고 말은 하지만, 반은 틀렸다.

실제로 선녀는 이슬만 먹고도 사는 존재니까, 굳이 돈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다른 이들처럼 돈을 위한 것도,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로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선의에서 사령관이라는 직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한테 너무 모질게 대하나.’


저렇게 풀이 죽어 쭈그러든 채 서류의 산에 파묻힌 모습을 보자면 마음이 콕콕 아파온다.

청은 근처에서 작업하고 있던 자신의 서류를 체크하고, 마찬가지로 작업에 힘없이 매진하는 백설을 돌아보고, 잠깐 고민하듯 신음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

“......무슨 아이스크림이요.”


“?! 사주는 게냐?!”


“제가 나갔다오는 동안 계속 일하고 계신다고 약속하시면요.”


쯧, 너무 오냐오냐해주나.

이러면  되는데.


“요번에 역 앞에 새로운 아이스크림집이 생기지 않았더냐. 거기게 먹고 싶구나.”

“시간도 늦었는데 굳이  멀리 있는 데를.”

“거기게 아니면 싫으니라! 거기게 먹고 싶노라!  다리면 한걸음이지 않느냐! 거기는 그리고 새벽 2시까지 한다더구나!”


“......하아, 알겠습니다.”


청은 한숨과 함께 벗어뒀던 점퍼를 몸에 걸쳤다.

“절대로, 절대로 땡땡이치면  됩니다! 그랬다간 다음부턴 절대로  사드릴 거니까요!”


방을 나서기 전에 척, 하고 손가락을 가리키며, 몇 번이나 당부하고서야 떠나게 되었다.

“잘 다녀와~!”


백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청이 떠나가는 기척을 느끼며, 펜과 서류를 픽, 내던졌다.


후후, 감시의 눈도 사라졌으니 이제 농땡이를 피우자――가 아니다.


“......뭔가 일이 터지려나 보구나.”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녀라 함은.


선녀이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기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늘이, 공기가, 보이지 않는 바람이 그녀에게 점지해주는 것 같았다.


* * *


“아니, 사람 정말 많네....”


백설의 측근, 청은 기분 나쁜 듯이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벌써 시간은 새벽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정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시점에 출발했으므로, 두시간 가까이 자리를 비웠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식으로 폐점시간이 새벽 2시라는 걸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필이면 이런  기계트러블이냐.’


정말이지,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

자가용보다도 빠르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다리로 헐레벌떡 뛰어왔더니, 어림도 없다는 듯 트러블에 트러블이 겹치면서 이 시간까지 기다리게  것이다.


아이스크림 머신 쪽은 문제가 없지만, 계산대의 캐셔 쪽에 기기트러블이 났던 모양이라 본래 이상으로 시간이 들어갔다.


사람이 많았던 것도 분명히 있지만.


“마음에 안 든다니까... 그 할망,  내팽개치고 놀고 있는 거 아니겠지?”

아니, 분명 그럴 여자다.

2시간이나 자릴 비웠으니, 틀림없다.


진득하게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30분이라도 되면 용한 거다. 어쩌면 15분도 안 돼서 자신이 안 오는 것을 보고 띵까띵까 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일은 꽁꽁 묶어놓고 아르바이트생한테 시키는 반복작업이라도 시켜야지.


하루종일.

24시간 내내.


크하하하.


“.......”


청은 비니 아래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를 내려다보고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

“나와.”


어느샌가 자신은 으슥한 골목에 와있었다.


시야 한구석에 시에서 설치한 CCTV 카메라가 보였다. 가능한 스스로의 모습을 카메라 각도로 밀어넣으며 재차 말했다.


“나와.”

여전히 주변의 분위기는 미동도 없다.

바람은 차다.

그냥 착각인가, 하고 넘어가려 했더니 훅-하고 근처에 있던 가로등이 꺼졌다.


하나, 둘, 셋, 넷....


하나하나 가로등이 꺼져가고, 순식간에 그녀가 있던 골목이 어둠에 휩싸였다.


평일 새벽이다. 새벽 2시면 번화가라 해도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

거기에 지금 그녀가 지나다니는 곳은  그래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허름한 주택가 한복판이다. 마침 바로 옆에 사람이 없는 공원도 있다.

‘습격하기엔 절호의 위치려나.’


청은 다시금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나와.”

지극히 담담하며,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살기가 듬뿍 담긴 오만한 목소리.

그리고 지금껏 조용했던 어둠 속에서, 뭔가가 스르륵, 미끄러져 나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팔다리가 달리긴 했는데, 기괴한 느낌이 드는걸.


‘뭐지...? 마네킹?’

인간과 비슷한데 인간이 아니다 싶으니, 뒤틀린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불쾌한 골짜기라던가.


[...다.]

“응?”


[히어로협회, 백설선녀의 측근, 청이렸다.]


달각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탁한 목소리.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얌전히 우리를 따라--]

쾅!


다음 순간.

청의 몸이 씹힌 테이프마냥 잔상을 남기며 주욱 늘어나나 싶더니, 어둠 속에 떠오른 그림자의 코 앞에 단숨에 뛰어들어 발로 차 날려버리고 있었다.


카강! 카강! 캉...!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그림자가 바닥을 몇 번이나 튀어오르며 날아갔다.

‘인형이네.’


차보니 알았다. 인간이 아니라 딱딱한 인형이다.


[공격했다.]

순간  몸을 덮치는 오한.

그리고 어둠 속 여기저기서 무언가가 하나 둘 튀어나왔다.

[공격했다.]


[공격했다.]

[공격했어.]

[어쩌지?] [붙잡아.] [얌전히 우릴 따라오면] [다치지는 않을 텐데] [나쁘지 않은 기분] [일텐데 따라와.] [달이 아름다운 밤이에요.] [무서운 얼굴.] [어디로 데려가지?] [어비스의 아지트로.] [데려갈 필요 있나?] [일단 습격] [해보라고 하셨어] [저거 죽었나?] [멍청이.] [죽을 리가 있냐.] [우리들은 인형] [이니까 괜찮아.] [청.] [히어로 청.] [동포의 원수를... 응? 죽지 않았으면] [원수 같은 거 필요 없잖아] [그럼 그냥] [예쁜 여자] [덮치자!] [덮쳐!] [와아!] [덮쳐라] [아아아아아!] [옷은 벗기자!] [크림 범벅으로!] [ 가랑이를 벌려!] [나는 유두를 빙글빙글 돌려볼래!] [입 안도 예쁠까?] [주인님은 수치심 어린 표정을 좋아해!] [능욕하자!] [수치를 줘!] [꺄하하!]


바퀴벌레마냥 어둠 속에서, 골목길 사이에서, 건물 사이에서, 건물 위에서, 담벼락을 타고, 바닥을 기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

골동품에서 날듯한 인형의 구체관절 소리가 시끄러웠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사납다.


[[[덮쳐라아아아아앗!!!!]]]


어둠 속에서.


벌떼처럼 일제히 덮쳐오는 구체관절 인형의 무리.

무미건조하게 그들을 올려다보던 청은, 순식간에 따각거리는 인형들의 무리에 삼켜져갔다.



* * *



그리고 다음 순간.

와드드드드드드득!

인형들의 몸체가 일제히 날아가버렸다.


폭발하듯, 혹은 비산하듯.

부서지고 깨어지고 터져나가고 산산히 분해되며 여기저기 날아간다.



* * *



쿠웅! 하고 바닥이 울렸다.

“어디 건방지게....”

비산하는 인형들 사이,  중심부에서.

청은 여전히 오만하고 거만하고 당당하게 서있었다. 그 많은 인형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다각다각다각다각....


[저게 뭐지...?]

[주인님의 말씀대로면, 무기는 없다고 들었는데....]

아스팔트 바닥에 쩌적쩌적 금을 내며 떨어진 것은, 묵직한 곤봉의 끝이었다. 곤봉의 다른 쪽 끝은 청의 손에 닿아있다.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점퍼에 비니를  청의 다른 손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묵직해 보이는 쇠방망이가 들려있었다.


“직접 나타나지 않고, 인형을 보내? 젊은 주제에 건방지네?”


화릇, 그녀의 분노에 호응하듯, 비니의 일부가 불타올랐다.

점퍼 아래의 옷에도, 희미하게 불꽃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X발, 제발,  좀 화나게 하지 말라고.  아까우니까.”


어둠 속에서, 인형들이 일제히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인형이야 자아가 없겠지만, 인형들을 조종하는 자라면 분명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으리라.


그래야만 했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존재니까.

인간의 공포와 경외가 뭉쳐 만들어진 게 그녀니까.

“당장 튀어나와 개X끼야!!”


타오르는 비니의 앞에, 우드득거리며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이마  측면에 솟아난 건, 아름다우리만치 정교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뿔’이었다.

이마에   개의 뿔.

타오르는 붉고 푸른 불꽃.


한 손에는 묵직한 무게의 검은 곤봉, 혹은 방망이.


 모습은 마치――

“1000년 살아온 도깨비 청님께서, 친히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줄테니, 당장 튀어나와라 빌런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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