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60 히어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1)
“허억... 허억... 하아...!”
밤. 서해 바다 근처 어느 부지.
컨테이너가 잔뜩 늘어선 넓은 광장에, 최근에 떠오르기 시작한 중견 빌런 조직 【블랙팬츠】의 말단 조직원 황비헌은 몸을 숨긴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것은 해외의 조직으로부터 직접 유통 받는 『불법 개조 파츠』대량 거래.
부당하게도 초인적인 힘을 맘껏 휘두르는 각성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평범한 일개 조폭 똘마니가 그들에게 대항하려면 인도(人道)를 벗어나는 수 밖에 없다.
즉, 강화개조. 혹은 튜닝이라 불리는 행위.
특히나 품질이 좋은 외국의 비싼 『부품』을 가져다가 끼우는 것만으로 웬만한 C~D급 히어로에 맞먹는 초인이 될 수 있다.
‘이번 거래만 무사히 마치면... 나도 튜닝 받을 수 있는데...!’
그래서 그는 이번 거래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고, 그를 포함한 말단 조직원들까지 전부 특별사양으로 개조된다면, 약소한 지방 히어로 지부 정도는 충분히 습격할 만한 전력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히어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빌런 조직.
그런 타이틀만 따면, 그의 조직이 가진 가치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겠지.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거래 현장을 히어로에게 들킨 거냐...!
‘분명 이번 거래는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어... 조직 내부의 사람이 아니라면 알 방도가 없었을 텐데,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고민해봐야 알 길이 없다.
그보다 각성자들의 부당한 능력, 예를 들어 【예지】나 【독심술】 같은 거라면 아무리 꼭꼭 숨겨 놓은 정보라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겠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지금 상황이다.
대기 중이었던 거래현장이 습격을 받아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지금, 살아서 돌아가려면 긴장해야 한다.
‘아마도 투명인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발소리가 들린다거나, 아무도 없었을 텐데 갑자기 베테랑 빌런 형님들이 목에 주사기가 꽂힌 채 쓰러진다거나.
히어로인건 분명했다. 중간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자신들을 체포할 거라 선언했으니까.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지만.
‘저격수도 있는 것 같아....’
백발백중, 일발필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히어로를 신경 쓰는 도중 허를 찌르며 쏘아진 총알에 동료 중 절반 이상이 쓰러졌다.
“......!?”
뚜벅, 하는 발소리가 들려와, 황비헌은 심장을 졸이며 숨을 죽였다.
총을 든 손에 힘을 준다.
가볍게 심호흡하고, 총을 들이대며 엄폐물로 쓰던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멈춰!”
“히익?!”
총구 앞에 있는 건 어딘지 못 미더운 인상의, 가늘고 작은 체형의 남자.
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귀여운 인상이며, 황비헌과 같은 검은 정장 차림이다. 앳된 외모 때문인지 묘하게 안 어울리지만.
황비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같은 말단 동료였다.
“뭐야... 오소리 너였냐.”
“네. 황비헌 형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습니다... 저만 어떻게 살아남아서... 다 죽어버린 게 아닌지....”
“바보 같은 소리 마라.”
황비헌이 비난하듯 말했다.
“형님들은 히어로들이랑 비빌 수 있는 베테랑 빌런들이라고...? 기습당해서 당황하긴 했지만, 아직 절반은 남았을 거야... 어쩌면 그 히어로도 붙잡았을 지도. 그래, 네모 형님은 의안으로 적외선 감지도 할 수 있으니까 투명인간 따위는....”
“아뇨, 지금 남은 건 황비헌 형님 뿐입니다.”
“응?”
따앙! 빠득! 우득!
“커......흑?”
옆구리를 꿰뚫어버릴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비스듬히 서있던 황비헌의 몸이 ㄱ자로 꺾였다.
쿠웅!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꼴사납게 내동댕이쳐졌다.
“콜록, 콜록... 헉, 헉... 뭐야... 뭐지...?”
당황하는 그의 눈 앞에, 딸그랑, 딸그랑, 하고 뭔가가 떨어져내렸다.
합계 셋은 되는 동전들이었다.
“아직 개조를 받지 않은 당신은 숙청 대상까지는 아니니까요. 운이 좋았네요, 형님... 아니, 개쓰레기 씨.”
그런 황비헌의 머리를 콱 짓밟은 것은, 그의 후배인 말단 조직원 오소리.
늘 어딘지 겁을 먹고 쭈뼛쭈뼛하지만, 사소한 지식이 많고 유려한 몸놀림을 높이 사 이번 거래 현장에도 나오게 된, 들어온 지 3주밖에 되지 않는 신입.
그렇군.
스파이는.
“너 새끼였나...!”
“Fuck. 의심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걸까요. 멍청해서 그런가요. 덕분에 저는 편했지만요.”
구두 밑창으로 황비헌의 깍두기 머리를 짓밟으며, 오소리가 가발을 벗었다.
머리카락을 압박하는 망까지 전부 벗자, 땀에 젖은, 하지만 윤기 있는 단발이 드러났다. 체형을 속이기 위한 패드 같은 것도 하나 둘 꺼내어 내던진다.
그러자 드러난, 목 언저리에서 가지런히 자른 매끈한 흑발.
주머니에서 꺼낸 클로버 문양의 리본 밴드를 매자, 말단 조직원 오소리에서 한순간에 어느 히어로로 변모했다.
“7번대의... 클럽...!”
“Yes. 7번대의 영원한 귀요미 클럽입니다~☆”
“교활한 놈들... 히어로...!”
황비헌이 분한 듯 이를 빠드득 갈자, 클럽은 키득키득 비웃었다.
“아니, 솔직히 너무 쉬워서 걱정될 정도였다니까요. 조금 『불행한 과거』를 연기했더니 그냥 덥썩 믿어버리다니.”
“조직은 신뢰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비웃지 마라, 히어로!”
“악당 노릇을 할 거면 철저히 노련하게 굴어야죠, 애초에 튜닝 좀 했다고 히어로에게 덤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짤그랑, 짤랑. 클럽이 공중에 동전을 흩뿌리자, 동전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힌 듯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튜닝하지 않은 일반인은 죽이지 않습니다. 잠깐 잠들어주시고, 이제부터 갱생해서 똑바로 살아가세요.”
“안 돼! 싫어어! 144시간 연속 EBS강의라던가! 반성문 700장이라던가 그런 건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아, 감미로워...!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빌런의 목소리 너무 짜릿해...!”
“미친년!!”
“그럼, 이만.”
클럽이 손을 흔들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동전들이 일제히 날아들어, 황비헌의 급소를 때리며 의식을 단숨에 앗아갔다.
“끝났어~?”
“코코 씨.”
【블랙팬츠】의 마지막 조직원을 짐짝마냥 질질 끌고 가는데, 아무 것도 없던 자리에 코코의 모습이 사아악 나타났다.
환각 능력인 【미라쥬】로 줄곧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3주간의 잠입임무, 수고했어~.”
“에휴... 정말이지, 남자들 사이에서 3주나 지내는 거 힘들었다고요... 언제 여자인걸 들킬까 싶어 가슴 조마조마하고....”
“글쎄에~ 들킬 거 같진 않은 것 같던데.”
코코의 시선이 클럽의 흉부를 향했다.
훌륭할 정도의 대절벽.
“부, 붕대로 조인 거거든요?!”
“조일 게 있었어?”
“실례에요! 있어요! 조금이지만 봉긋, 그러니까, 레몬 정도로는 있어요!”
“레몬 껍질이겠지....”
실례다. 정말 꼿봉오리 정도는 있는데.
코코는 클럽의 반응이 재밌는지 쿡쿡 웃었다. 클럽은 코코에게서 이것저것 배우는 사이다. 이런 시답잖은 농담따먹기도 익숙하다.
즐겁게 웃던 코코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그치만 요즘 연기 실력이 꽤 늘었어. 아주 칭찬해.”
“...『나쁜 놈들을 상대할 때는 더 나쁜 놈이 될 필요가 있다. 거짓말에 능숙해져야 한다』... 코코 씨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그래. 7번대의 다른 멤버들은 우직할 정도로 솔직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나쁜 년들이 되지 않으면 밸런스가 안 맞아.”
확실히, 스페이드나 체크가 거짓말에 능숙해지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
덧붙여 말하자면, 클럽은 이러한 코코의 스타일이 아주 잘 맞기도 했다.
S 기질이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상대방을 속이고 기만하고 마지막엔 한껏 비웃어주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우니까.
――허접하긴~ 허접하긴~.
그 옛날, 13호를 꾹꾹 짓밟아줬던 것도 이제는 감미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보다 클럽, ‘상태’는 어때?”
코코가 많은 것을 생략한 채로 물었다.
그럼에도 의도를 알아차린 클럽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좋아졌어요. 그 놈들이 쳐놓은 ‘세뇌’가 많이 풀린 게 느껴져요.”
“그래. 그걸 위한 3주간의 잠입임무 였으니까. ...조심하도록 해. 네가 당해버리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 7번대는 평생 노리개 상태야.”
암울한 코코의 말에, 클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7번대 히어로 중, 가장 먼저 완전하게 【어비스】의 수중에 떨어졌던 건 클럽이었다.
기고만장하게 탈출계획을 짜고, 스페이드마저 끌어들인 결과 실패했다...는 좌절의 감정이, 그녀의 자존심을 부수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굴복시켰다.
결과, 13호와 참모의 완전한 꼭두각시가 되었던 그녀였지만.
‘닥터 덕분이죠.’
도토리라는 이름의, 도로시의 동생 닥터.
그... 지금은 그녀가 되어버린 닥터를 돕기 위해, 도로시는 클럽을 포함한 인원들의 세뇌를 해제했다. 그녀의 입맛대로 다시 세뇌하기 위해서.
그러나 세뇌가 깊게 되기 전에, 도로시는 13호에게 패배. 클럽은 다시 13호의 수중에 떨어졌다.
반복해서 세뇌의 주체가 바뀌니, 당연히 세뇌 자체가 열화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참모의 여체화.
그녀의 세뇌에 깊게 쐐기를 박았던 참모가 여자가 된 것을 계기로, 클럽은 자신에게 씌였던 세뇌의 주박이 차츰차츰 풀려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비스】의 아지트.
“응? 클럽이네? 되게 오랜만에 본다?”
“바이올렛님. 안녕하신가요. 임무를 마치고 왔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잠입임무인가 뭔가 한댔지. 잘 다녀왔어. 오늘도 잘 부탁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클럽은 손을 훼훼 휘저으며 떠나가는, 추리닝 차림의 바이올렛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고 도로시가 만든 전자동 청소도구를 들었다.
‘후후후후, 내 세뇌가 풀리고 있다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죠.’
저렇게 무방비하게 휘적휘적 떠나가는 바이올렛의 등 뒤에, 동전을 날려 단번에 기절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아직 세뇌의 잔재가 남아있어... 거역하려하면 손이 떨려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녀를 옭아맨 세뇌가 완전히 풀릴 거라 확신하고 있다.
참모는 클럽을 완전한 마조로 세뇌시킴으로써, 그녀를 지배했다.
하지만 클럽의 본질은 사디스트.
한번 졌던 꽃이 다시 피어나듯,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충돌하는 본성이 시시각각 그녀를 세뇌의 주박에서 풀어가고 있었다.
“Hooh. 적어도 제 인식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어비스】는 적. 빌런은 적. 저는 고결한 히어로. 가슴은 1년만 지나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테고. 좋았어. 완벽한 클럽이에요....”
쥐고만 있으면 알아서 진동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청소기로 바닥의 먼지를 빨아들이며, 클럽은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렸다.
다만 주의할 것은, 13호... 무엇보다 참모다.
13호는 자신이 보이는 대로 세뇌를 걸려하기에 주의해야하며, 참모는 그 귀신 같은 지모로 자신의 상태를 꿰뚫어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가능한 들키지 않게 돌아가야해요. 일하느라 바빴다는 핑계를 대면 충분....’
복도는 금방 청소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방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청소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데 있던 문을 열었다. 듣기로는 창고로 쓰이는 곳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그곳에.
“아앗... 핫... 읏... 13호님... 남폭해요...!”
“누가 네게 인간의 말을 해도 좋다고 했지, 참모?”
“죄, 죄송... 꾸, 꾸울... 꿀꾸울...!”
어깨까지 내려오는 반짝이는 은발. 고상하고 청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인형 같은 외모. 너무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유방을 포함해, 적당한 황금비를 연상케 하는 몸매.
여자가 되어버린 참모는, 이 창고 같은 방에서 13호에게 절찬리 범해지고 있었다.
딸그랑, 클럽의 손에 들린 청소도구가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