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59 그건 그 순진한 화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2)
꼴꼴꼴꼴―
꿀꺽.
“크흐으....”
지금 막 비운 소주잔을 내려놓고, 메이벨이 기분 좋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어로 4번대 기지의 옥상. 그곳에 비치된 정자에서, 메이벨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늘 위에 휘영청하게 떠오른 달이 밝다. 더운 날씨지만 시원히 부는 바람은 기분 좋다. 벌레를 쫓기 위해 피어놓은 향도 운치가 있어 나쁘지 않았다.
술과 그림과 시는 메이벨의 삶의 낙이다. 웬만한 고민도 생각도 술을 들이켜고 그림을 그리면 금방 다 사라져버렸다. 옛날부터 그랬다. 물론 그 땐 술은 안 마셨지만.
“하후우우....”
그림을 그려볼까 해서 붓을 들었지만, 씁쓸하게 내려놓았다. 지금 그림을 그리려 하면 여지없이 어느 한 장면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메이벨은 취한것과는 별개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숙인채, 죽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일이 저저번 주에 있었다.
한껏 연애에 동경을 품고 있던 메이벨이며, 지금까지 철벽을 치고 13호를 경계하던 그녀였는데.
저저번 주, 그러니까 약 2주 전, 드디어 13호와 일선을 넘어버리고 만 것이다.
체액을 전해준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13호에게, 처녀를 내주고 만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
메이벨은 새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 발을 버둥거렸다.
그때도 술이 문제였다.
때마침 엄청 비싼 술을 선물 받는 바람에 홀라당 마셔버리고 그대로 취해버렸던 때에, 타이밍 안 좋게 13호가 나타났던 것이다.
심지어 꽤 오래 13호를 만나지 못해 발작처럼 발정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자제심이고 뭐고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아니... 13호가 없었으믄 다른 남자를 물었을지도 모르고... 무슨 추태를 부렸을지 모르니 차라리 다행이라믄 다행이긴 헌데....’
다행은 무슨! 빌런한테 처녀를 바치다니!
히어로의 수치랑께!
“......그랴두... 기분은.... 좋았지... 좋았당께....”
메이벨은 쓸쓸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때야 기세에 밀려서 해버렸던 거지만, 한 번 경험해보고 나니 그 때의 황홀한 경험이 뇌리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제... 어쩌면 좋을랑가....’
일 할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시끌벅적한 자리에서도, 잠에 들려 할 때도 자위할 때도 어김없이 떠올리고 만다. 갈망하고 만다.
첫 경험은 아플 뿐이지 기분 좋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이것도 약의 부작용 때문일까.
‘뭔가... 크기도 딱 맞았다고 할까... 13호 손만 닿아도 되게 기분이 좋구... 워째... 그 약이 주입된 뒤로 몸이 좀 바뀌는 기분이라고 헐까....’
기분탓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걸 경험해보고 나니 이제는 단순한 키스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자신은 히어로인데다, 4번대의 대장 대리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빌런 따위와 밀회를 가진단 말인가. 거기다 상대는 그 13호인데!
무엇보다 부끄럽다!
부끄럽다고!
호랑방탕 비범관대한 자신이지만 지금까지 처녀를 지켜왔고! 그런 화제는 앵간해선 늘 피했다! 성에 관해 특출나게 고지식한 사람이란 말야 정말!
“으우우... 대장... 난 어떻게 해야하나....”
메이벨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중얼거릴 때였다.
“나 불렀어?”
“?!”
마치 노린듯이 정자 건너편에 나타난 사람의 인영.
컬이 들어간 긴 흑발.
노출도를 높여 개조한 한복을 제복 대신 입는 메이벨처럼, 제복 대신 입은 고풍스러운 고딕풍의 드레스.
눈 밑에는 눈길을 끄는 눈물점.
별빛을 뿌리는 듯한 반짝이는 눈에는, 희미하게 시계 같은 문양이 떠올라있다.
언뜻 보기에 『마녀』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
“대장...! 실 대장!”
“응 돌아왔어, 벨.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지?”
지금 막 옥상에 올라온 4번대의 대장, 실이 생긋 웃고 있었다.
“뭔가 고민이 있다면 말해주렴. 뭐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 * *
“무슨 일이야? 네 쪽에서 날 부르고.”
다음날 밤.
실에게 조언을 받은 메이벨은 곧바로 13호를 숙소로 불렀다. 13호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수락해주었다.
좀 더 위기감이라던가 없는 걸까, 이 빌런.
이쪽으로서는 좋긴 하지만.
“마... 뭐든 서로 알아가는 게 중요하니께. 술이나 한 잔 할까 해서.”
“그런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왔을 텐데.”
“준비는 다 해놨다, 상관없으야.”
여느 때와 같이 개조한복을 입은 메이벨은 다른 멤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13호를 방 안으로 들였다.
방에 남자를 들이는 건 가족을 빼면 처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에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숫기가 없지는 않다.
메이벨은 작은 탁상을 놓고, 그 위에 준비해 둔 술과 안주를 올렸다.
“와, 이거 비싼 술 아니야? 소주나 마실 줄 알았더니.”
“마침 좋은 술이 생깄다. 그러니까 초대도 허구 그러지.”
“와, 이 병부터 때깔이 그냥....”
메이벨은 눈을 가늘게 뜨며 13호의 안색을 살폈다. 13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비싸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이 술은... 무려 약을 탄 술이다.
――‘그렇구나. 벨의 고민은 잘 알았어. 이 대장님이 아~주 잘 알았어. 진짜야.’
――‘그런 벨의 고민을 없애주기 위한 약이, 짠!’
――‘이걸 이용해서 13호를 맘대로 다루면, 부끄러울 것도 뭣도 없지 않을까?’
어젯밤 메이벨에게 찾아온 실은, 어느 무미무취의 약을 건네주었다. 【어비스】에서 훔쳐 온 세뇌약이라는 모양이다.
언제 그런 걸 훔쳐 왔냐, 싶었지만 그녀의 능력을 고려해보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세뇌약의 효과를 생각해보자면 하룻밤을 반짝 즐길 수 있을 정도일 거야.’
――‘7번대 애들만큼 세뇌를 깊게 걸기는 어려울걸? 그러니까 이걸로 뭔가 계략을 꾸미기는 어렵겠지만.’
――‘하룻밤의 불장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불장난!
실 대장도 파렴치해!
그보다 이걸 가지고 나한테 뭘 어쩌라고! 뭘 바라는 거야!
여러 가지 생각은 들었지만, 결국 지금 자신은 술에 받아 온 약을 탄 채 내놓고 있었다.
딱히 야한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아니라구.
시, 실 대장이 모처럼 구해다 준 건데, 쓰지 않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13호, 잔 들랑께. 나가 따라줄텐게.”
“오. 그럼 잘 받을게.”
13호가 함께 내온 자그마한 도기잔을 들어 올리자, 메이벨은 술병을 기울어 내용물을 따라주었다.
“병 이리 줘.”
이어서 13호가 술병을 건네 받아, 메이벨의 잔에 따라주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입으로 잔을 옮겼다.
“13호, 취했나?”
“...응...아니...응....”
“한 잔 더 받으랑께.”
“......그래....”
13호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잔을 내밀자, 메이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술을 따라주었다.
술 자체가 도수가 높은 것도 있었지만, 13호의 상태는 단순히 취한기만 한 건 아니었다.
술 안에 담겨져 있던 세뇌약이 돌기 시작한 것이리라.
‘...나는 약 종류가 잘 듣지 않는당께.’
우연히 안 사실이지만, 세뇌약을 포함해 어떤 독도 그녀에겐 거의 영향이 없었다.
이것도 아마 13호가 주입한 포션인지 뭔지의 영향 같은데, 이 포션을 맞고 나서는 감기 같은 자잘한 질병조차 걸리지 않았다.
부작용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약이다. 부작용만 빼면.
‘이제 슬슬.’
“저, 13호. 취한 것 같은데?”
“아니... 안... 취했어... 이 정도......로는....”
“아냐아냐. 취한게 분명해. 요 손 한 번 보랑께.”
“손.......”
13호가 고분고분 고개를 들었다. 순순히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 모습이 왠지 우스웠다.
“자, 지금 손가락 몇 개?”
“......둘.”
“지금은?”
“셋....”
“그래, 그럼 니는 누구제?”
“나?”
13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나는... 빌런조직 【어비스】의... 빌런 13호....”
그렇게 뭔가를 웅얼거리며 말하는 것을, 메이벨은 대강 흘려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좋다, 세뇌완료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세뇌가 완료된 게 아니라 세뇌를 심을 수 있는 트랜스 상태일 뿐이지만, 메이벨은 그런 상세한 것까지는 몰랐다.
* * *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볼까.
13호가 오기 전에도 한참을 고민했던 내용이다.
실의 설명대로라면, 이 세뇌약을 가지고는 일회용 정도의 성능밖에 없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효력도 전부 사라질 거라는 뜻이다. 세뇌도 아니고 단순한 최면 정도다.
그렇다면 뭔가 거창한 일을 할 수는 없다.
하룻밤동안 할 수 있을만한 일.
하룻밤의 불장난....
메이벨은 몽롱한 눈의 13호를 앞에 두고, 숙고한 끝에 입을 열었다.
“13호, 13호. 이제부터 나가 하는 말을 다 들을 거제...? 아니, 듣는 거랑께. 들어야 된당께. 알갔으야?”
“.......”
13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메이벨은 꿀꺽, 침을 삼키더니.
“그, 그럼 한 번 내 몸을... 안아보랑께.”
그렇게 대담하게 명령했다.
13호는 그 명령에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팔을 들어 올려 메이벨의 가녀린 어깨와 허리를 감싸 품 안에 폭 안았다.
‘~~~~~~~~~~~~?!’
그 대담한 행동에, 심장이 덜컹 뛰어오르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으으, 키스도 그렇게 쪽쪽 해댔는데, 이 정도로...!’
메이벨은 13호의 품에 안긴 채,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숨을 골랐다.
좋았어. 오케이. 괜찮아. 동요하지 않아. 이 녀석은 지금 내 장난감 상태다. 그뿐이야.
‘뭔가, 이렇게 되니까 부끄러움보다는....’
전혀 다른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니 단순히 안겨 있는 것만으론 아쉬웠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법한 명령을 내려보고 싶다.
어떻게 할까. 엄청 부끄러운 일을 시켜볼까? 지금껏 막 대해서 죄송했습니다, 다신 그런 짓 안하겠습니다, 라는 각서라도 받아낼까?
메이벨은 고민하다가, 13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스스로도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13호. 그럼 내를... 수컷답게, 유혹해보그라. 나를 너무너무 갖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수컷이 되는기라.”
말하고 나서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자신은 왜 이런 명령을 내린 걸까. 조금 전 안긴 게 기분이 좋았어서 그런 걸까?
13호는 명령의 의미를 파악하듯, 미동도 없이 조용히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건 아닐까 싶어 메이벨이 불안해 하는데, 13호의 눈에 순간 빛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어......?”
“메이벨.”
그것은 차가운 칼날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아래쪽에 기이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등 뒤로 둘러져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닿아있던 손이, 천천히 밀고 올라와 메이벨의 목덜미에 닿았다. 긴 손가락이 메이벨의 목을 조이며 압박했다.
“......!”
메이벨은 목이 압박당하는 괴로움을 느끼며, 억지로 고개를 끌어올려 졌다.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13호의 다른 한쪽 팔은 자신의 허리 뒤로 둘러져, 그녀의 왼손을 붙들었다.
13호의 몸을 뿌리치려 해도, 건장한 성인 남성의 근력을 그녀의 가녀린 팔로는 밀어낼 수 없었다.
“괴, 괴로... 워... 13호...!”
“괴롭다고?”
메이벨은 공기를 들이키고자 어떻게든 고개를 위로 올리고 물고기처럼 뻐끔 숨을 들이쉬려 했다. 그 한심한 얼굴을 13호는 무심히 내려보았다.
지금껏 봐온 13호와는, 전혀 다른 얼굴, 전혀 다른 표정.
메이벨은 그 얼굴에 오싹함을 느꼈다.
‘이 얼굴... 이 구도....’
“아...!”
13호의 얼굴이 수심가라 앉듯, 자신에게 가까이 내려왔다.
가쁘게 숨을 들이키는 목구멍으로, 13호의 체취가 흘러들어왔다. 코 끝에 어렴풋한 술 향기가 났다. 지금껏 자신이 함께 마시던 술의 향기가, 자신에게서도 날 법한 그 향기가 지금 13호에게서 나고 있으니, 기묘한 기분이었다.
목을 붙잡던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자신의 팔을 붙잡았던 손이, 지금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허리를 꽉 두르고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13호의 품에 꼼짝도 못하게 구속된 채, 들어올린 입술에 13호의 입술이 닿았다.
“웁....”
13호의 입술은 살짝 건조했다.
맞닿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비집고 들어오는 혀가, 흘러들어오는 타액이 이렇게 뜨겁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 * *
두근, 두근, 하고.
메이벨은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은 틀림없이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아아, 맞아. 이거야. 이거였어.’
이 장면, 이 표정, 잘 알고 있다.
그도 그럴게, 그녀가 13호를 보면서 상상하던 그것이었으니까.
13호를 상상하며 그렸던, 『뒷계정용 일러스트』.
어젯밤에 그린 내용과 똑같은 표정,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13호가, 그렸던 것 그대로 자신을 덮치고 있다.
이 운명과도 같은 상황에, 메이벨은 충격과 전율로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