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56 빌런조차 한 수 접어 줄, 최악의 히어로(3)
“【그는 영웅의 힘을 빌어, 일견 최강으로도 보이던 최악의 남자였습니다】.”
소피아의 은신처, 그 옥상.
넓은 테라스에서, 소피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가지고 온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소피아는 달빛과 테라스에 있는 작은 조명을 의지하며 글자를 적어내려갔다.
“【그러나 만부부당의 장사로 보이던 그라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나가는 것은 13호에 관한 이야기.
13호의 별자리는 【아르고자리】. 그 능력은 ‘영웅의 특성을 그 자신에게 투영하는 것’.
영웅의 힘. 영웅의 무기. 영웅의 능력. 영웅의 특성.
그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게 13호의 능력이다.
그리고 지금, 소피아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를 약체화시키는 동시에, 그를 이기는 그림을 ‘상상’한다.
단순한 히어로로는 안 된다. 히어로로는 영웅을 이기는 그림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건 안 된다며 글자만 뭉개질 뿐이다.
“【어떤 영웅이라 할지라도 죽음에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한 이들도 결국엔 독에 걸려 죽고, 나이를 이기지 못해 죽고, 혹은 운명과도 같은 사고에 휘말려 죽었습니다】.”
소피아는 상상한다.
어떤 괴물이 되어야 13호를 이길 수 있을지.
어떤 괴물이 있어야 13호를 무력화 시킬지.
상상하고, 살을 붙이고, 세세하게 설정을 정하고, 이야기를 덧붙인다.
내용이 세세하면 세세할수록 그녀의 능력은 더 강하게 발휘된다.
뚜걱,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도망쳤을 줄 알았더니.”
뚜걱, 뚜걱, 뚜걱.
직감을 따라, 소피아가 있는 옥상 테라스에 13호가 발을 들였다.
“그냥 도망칠 생각은 없었나 봐?”
소피아를 쫓아 올라온 13호는, 뺨에 깊은 자상이 남아있었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어 얼굴이 한쪽이 새빨개졌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어머나. 스페이드는 어떻게 했죠? 막으라고 명령해뒀는데.”
“기절시켜서 눕혀놨어.”
“어머나... 태도를 보니까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다루려는 것처럼 보여서 맡긴 거였는데... 스페이드, 그 아이도 참, 발을 묶는 것도 제대로 못하다니 한심하네.”
“곧바로 도망친 어느 여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전 도망친 게 아니에요. 전략적 후퇴. 택티컬 런. 알겠나요? 괜한 오기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당신을 확실하게 굴복시킬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 준비는 다 됐어?”
13호와 소피아 사이에는 약 7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소피아는 무심코 뒷걸음질칠 것 같았다. 펜을 쥔 손이 멋대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
아득!
소피아는 스스로 손목을 깨물어 떨림을 진정시켰다. 눈을 피하지 않고, 13호를 표독스런 눈으로 노려봤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지만, 13호는 그 모습을 보고 경계하는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뭐야, 겁이라도 먹은 거야? 그냥 항복하면 심한 짓은 안 할게.”
“겁은요. 당신이야말로 금방 후회하게 될 걸요.”
소피아는 ‘시나리오’를 이어서 노트에 적어나갔다.
“【그의 힘은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온 힘은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낭랑하게 읊는 소피아의 말.
그리고 13호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몸 안에 채워졌던 마력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꼼수로 얻은 힘은 금세 덧없이 흩어져 갑니다. 그는 급속도로 약해져 갔습니다】.”
기껏 실의 마법으로 되돌아왔던 마력이 차츰차츰 흩어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히어로에게 맞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히어로의 능력은 그의 예상 외로 강력했습니다】.”
13호의 마력은 약해졌지만, 반대로 소피아의 마력이 부풀어올랐다.
“【제가 적는 이야기는 전부 진실이 됩니다. 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실체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적습니다. 제가 상상하고 제가 그려낸 ‘영웅을 죽이는 귀인(鬼人)’을, ‘장사를 죽이는 사신(死神)’을】.”
이미 13호가 올라오기 전에, 세세한 설정은 따로 적어두었다.
이제는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
“【나타났습니다. 등장합니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영웅이라 착각하고 정의에 반하려는 악한 빌런을 처단하기 위해! 분수를 모르는 그에게 현실을 깨닫기 위해】!!”
노트에 빠르게 적어나가던 펜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나타나라!”
소피아가 손에 든 노트가, 정확히는 그 위에 쓰여진 글자가 금빛 인광을 발했다.
빛은 허공에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네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내고――다음 순간, 네 기의 사신을 만들어냈다.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안쪽에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해골이 보였다.
네 사신의 해골은 전부 다른 형태였으며, 하나는 인간처럼 보였지만 남은 셋은 짐승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팔도 어떤 건 한쌍이라면 어떤 건 세쌍이나 있기도 했다.
로브 아래로 비죽 나온 팔은 기묘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으며, 그 손에는 사신의 키만 한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밤이라 잘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테라스 전체가 검은 안개 같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신에게서 흘러나온 독기였다.
“쿨럭....”
13호가 기침을 했다. 입을 가린 손을 보니, 검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이 안개 자체가 독인지, 들이마실 때마다 목도, 내장도 따끔따끔 아파왔다. 눈 앞이 뿌얘지고, 기침과 함께 피가 울컥울컥 올라왔다.
“어떤 영웅도, 어떤 장사도 죽음은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사신은 죽음을 구현해 낸 것...! 당신이 날고 뛰어도 이길 수 없다는 인과(因果)는 충분해요!”
소피아는 즐겁다는 듯이 외쳤다.
조금 전까지 두려워 보이던 13호라는 남자도, 지금은 왜소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13호는 약해졌고, 소피아는 ‘시나리오’의 보조로 힘이 불어났다.
전세역전.
허접한 빌런 따위, 더 이상 두려워 할 것 없다.
“【만능】의 열쇠가 될 당신을 죽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지 정도는 잘라도 되겠지. 가라, 사신들. 저 시건방진 빌런의 팔다리를 잘라버려!”
““““――――――――!!!””””
13호를 향해, 공중에 떠있던 사신들이 포효하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낫은 단순히 물리적인 예기만이 아니라, 명확한 ‘죽음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닿은 것을 썩게 만들고, 반드시 죽음으로 이끈다.
소피아가 적은 설정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낫을 휘두를 뿐인 괴인이 아니라 각종 ‘죽음’ 그 자체를 구현화 한 사신이다.
13호가 아무리 장사여도, 어떤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휘두르는 사신의 낫은 막지 못한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살아있는 인간인 이상 죽음은 이기지 못하니까.
‘죽음’을 이길 수 없다면, 사신의 낫을 막지 못한다. 그런 ‘설정’이다.
그러니 13호는――저 낫을 막지 못한다!
쉬익-!
소피아가 진한 미소와 함께 쇄도하는 낫에 둘러싸인 13호를 지켜보고.
카앙...!
그리고 13호는, 아무렇지 않게 날아드는 낫을 두 팔로 막아냈다.
“.......어?”
그그그극-!
어떤 낫은 13호의 손에 붙잡히고, 어떤 낫은 13호의 팔에 가로막힌 채 상처하나 내지 못하고 힘겨루기를 했다.
어쨌든 13호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광경에 소피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무식한 여자를 봤나... 영웅이 죽음을 이길 수 없다고 누가 그래?”
어떤 전설의 영웅은 죽어도 반신이 되어 살아났다.
어떤 영웅은 누구나 죽을 거라고 비웃던 사투에서 살아남았다.
어떤 영웅은 위업을 이루기 위한 숙명의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까지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영웅도 죽음은 이기지 못하는 경우는 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흐읍.”
와지직-!
13호의 손에 잡힌 낫의 날이, 그대로 으스러져 깨어졌다.
“――――――――!?”
날을 잃어 단순히 자루만 남은 낫에 당황하던 해골바가지 하나를, 13호는 그대로 붙잡아, 바닥에 냅다 내팽개쳤다.
콰악-! 콰드드드드드득! 와지지지지지지지직!!!!!
단순히 내팽개쳤을 뿐이지만, 사신은 무시무시한 파쇄음과 함께 단숨에 으스러져 버렸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유린극이었다.
손을 뻗고, 내던지고 으스러뜨리고, 부수고, 분쇄한다.
무기조차 들지 않았다. 마법은 쓰지 않았다. 분명 소피아의 ‘시나리오’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이 고갈되고 있을 텐데, 13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로지 그 육체만으로 소피아가 불러낸 최강의 사신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아......”
소피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는 와중에, 마지막 하나 남은, 양머리 같은 사신 하나의 머리뼈가 13호의 손 안에서 으스러졌다.
13호의 눈이 소피아를 향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피아는 필사적으로 상상하려 했다.
13호를 이길 수 있는 무언가를. 저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무언가를!
“......?!”
그러나 손은 떨림이 도저히 멈추지 않아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펜을 놓쳐버렸다.
쓸 것이 없으면 그녀는 무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애초에 상상할 수가 없다.
죽음을 구체화한 사신마저 이겨버리면.
대관절 무엇이 저 수컷을, 저 남자를 막을 수 있는 거지?
“소피아.”
“히익!”
어느샌가 13호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던 소피아의 등에, 턱, 벽이 닿았다.
“으으...! 13호...! 윽...!!!”
소피아는 어깨를 떨면서도,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 고통 때문인지, 떨림이 조금은 멎었다.
“인정할 수 없어요...! 이건 말도 안 돼! 수컷이! 수컷 따위한테! 빌런 따위한테! 이 제가... 아이우스의 소피아가 질 리가 없잖아요!! 말도 안 돼! 이런 시나리오 말이 될 리가 없어...! 이딴 개 같은 시나리오를 인정할 리가 없잖아요!!!!!”
그나마 한 손에 남아있던 노트도 풀썩 떨어져, 안 쪽의 내용이 팔락팔락 펼쳐졌다.
그곳에 적혀있던 내용은, 소피아가 이 땅을 밟기 전부터 상상했던 ‘그녀가 모든 것을 얻는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
그러나 지금 팔락팔락 펼쳐진 내용물은, 적혀져 있던 시나리오는 글자가 전부 뭉개져있었다.
‘시나리오’는 파탄 났다.
13호의 개입에, 그녀의 계획도, 그녀의 바람도, 그녀의 희망도, 모든 것이 박살 났다!
“용서 못해...! 용서 할 수 없어...! 13호...! 빌런 13호...! 이딴 결말,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아아아아아!!!!!!”
발악하듯 외치는 소피아를 지긋이 노려보던 13호는,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있잖아, 난 여자를 무시 안 하거든?”
“뭐...?”
“7번대도 그렇고, 우리 보스나 도로시도 그렇고, 참모...는 원래 남자였으니 그렇다치고.”
다들 멋진 여자들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잔뜩 가지고 있고, 세상에 유익이 되기도 하고.
라헤만 해도 ‘정의’를 향한 결벽함은 동경스러울 정도고, 스페이드는 그 곧은 심지에 감탄했다. 체크는 알고 보면 엄청난 노력파였다는 게 놀라웠고, 클럽은 이따금 보여주는 침착, 냉철한 분석력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다들 대단한 사람인 거 알고 있거든. 아니, 그런게 없더라도 나 같은 게 깔봐도 좋은 녀석은 없었어.”
애플의 지식욕은 대단하고, 아리아의 신비로움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 외에도 엔데나 메이벨, 실이나 메르도 각자 대단해 보이는 매력들이 있다.
세뇌를 이용해 주종관계와 비슷한 걸 맺고 있는 인원들이 태반이지만, 13호는 누구 하나 업신여기거나 자신보다 낮게 본 적은 없다.
“사람 무시하지마.”
13호는 표독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던 소피아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 무시하지마.”
어깨를 흠칫 떠는 소피아의 이마에, 손을 가져간 13호는.
그대로 손가락을 접어――따악! 꿀밤을 때렸다.
“아......!”
소피아는 이마가 아픈지 잠시 울먹거리더니, 그대로 눈을 핑글 돌리며 힘없이 털썩 쓰러졌다.
기절한 소피아를 앞에 두고, 13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자, 그러면 어떻게 한다....’
13호는 소피아를 짊어지고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는 소피아의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이 들려있었다.
“이거 찢으면 효력이 사라지려나...?”
수첩을 팔랑팔랑 넘겨, 스페이드에 관해 적혀진 페이지를 주욱 찢어냈다.
잠깐 희미한 인광이 새어나오나 싶더니, 금방 훅 꺼져버렸다.
‘이거면 된 건가?’
스페이드를 저렇게 만든 건 결국 타마라의 【기억조작】이다. 소피아의 능력이 사라졌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올지는 모른다. 그보다 종이를 찢는다고 소피아의 능력이 사라지긴 하는 걸까?
반신반의 하며 소피아를 짊어진 채 계단을 걸어내려가는데.
“......13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페이드가 지친 얼굴로 통로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스페이드, 일찍 일어났네? 좀 더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윽... 명치가 욱신욱신 쑤셔... 아프잖아.”
“봐줬다가 내 목이 날아갈 참이었어.”
13호는 자기 뺨의 상처를 톡톡 두드렸다. 안쪽이 보일만큼 깊고 긴 상처였다.
“그래서, 기억은 돌아왔어?”
“응... 아직 머리가 어질어질 하지만.”
“잠깐!”
“......?”
스페이드는 비척비척 13호를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13호가 제지했다.
“안 속아. 아지트에서도 그런 식으로 날 속이고 접근해서, 전기충격기로 지지려 했던 거 다 기억하고 있어!”
“...아니, 기억 돌아왔다니까?!”
“증명해 봐!”
“증명이라니, 어떻게 하라고....”
스페이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저것도 연기일지도 모른다. 13호는 신중해지기로 했다.
“간단해. 제대로 기억이 있는 네가 아니라면 듣지 않을 요구를 하겠어.”
“뭔데 그게.”
13호는 훗, 하고 웃었다.
“상의를 까서 브라를 보여줘! 이걸 할 수 있다면 원래의 스페이드가 맞겠지!”
“.......”
짖이겨진 나방 유충을 보는 듯한 시선과 함께, 스페이드의 모양 좋은 가슴을 감싼 다홍색 브래지어를 즐길 수 있었다.
팬티와 마찬가지로 색기가 느껴지는 속옷이라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