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56 빌런조차 한 수 접어 줄, 최악의 히어로(1)
바닥에 떨어진 전기충격기, 그리고 혀를 차며 차갑게 나를 노려보는 스페이드.
“......이게 무슨 짓이야, 스페이드?”
가기 전에 스커트를 까게 시킨 것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건 아니겠지. 분위기상.
그렇다면 짐작가는 건....
“소피아한테 뭔가――”
“닥쳐.”
스페이드의 손이 흔들렸다 싶더니, 별안간 턱에 묘한 충격이 올라왔다.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닫아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요즘 체크한테 점혈인지 뭔지를 배우고 있다더니.
아차....
이대로면 키워드를 말할 수가...!
“빌런 자식. 용서 못해. 용서 안 해. 너는, 너만큼은...!”
스페이드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당당하고, 투닥거리고, 병문안도 가고, 몇 시간 전만 해도 답례라며 케이크를 가져와줬던 그녀가.
지금은 본 적 없는 낯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바람 빠진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그런 나를 조용히 노려보더니, 다시 손을 움직여 내 몸의 몇 군데를 찔렀다.
털썩.
몸에서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조금 후에 머리가 핑글 도나 싶어니, 시야가 새카매졌다.
‘스페이......드....’
점혈은 아프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절하면서도... 욱신욱신 가슴이 쑤신 기분이 들었다.
* * *
또각, 또각,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장난감에 전원 스위치를 넣은 것처럼, 13호는 어느 순간 확 깨어났다.
평범하게 잠들거나 기절하는 것과는 달리 점혈로 인해 기절했기 때문인지, 의외로 상쾌하게 깨어날 수 있었다. 약이나 전기충격기로 잠들거나 하면 후유증이 크다. 도로시한테 이따금 여러 약품이나 발명품의 실험체가 되었던 13호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일단 아지트는 아니다. 그렇다고 정상적인 호텔룸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지하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카펫이 깔린 깔끔한 타일, 창문은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블라인드로 막혀있었고, 세련된 가구가 눈에 보였다.
아마도 어딘가의 오피스텔... 같은 걸까. 의외로 단독주택 같은 가정집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자신이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앉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꼼꼼하게도 묶어놨네.’
속으로 불평하는 사이, 연신 또각또각 울리던 발걸음이 가까워져 왔다.
“어머나, 일어났네요.”
끼익-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서구적인 외모의 금발 여성. 흰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모델 같은 체형에 무엇보다 보석 같은 반짝이는 심록색의 눈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이우스의 소피아....”
“빌런 따위한테 제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요.”
오만한 태도로 소피아는 담담히 말했다.
13호를 앞에 둔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담백했다. 빌런 따위 붙잡는 게 당연하다는 양, 놓칠 리가 없다는 양.
“......보스는 어떻게 했지?”
“대답해 줄 이유는 없지만... 좋아요. 이 정도는 서비스 해드릴까요. 【어비스】는 전원 구속해 두었습니다. 이곳 지하에는 감옥용 지하시설이 있거든요. 참모와 당신네 보스는 능력으로 탈출할 위험이 있으니, 주기적으로 마취제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데.”
“혹시 몰라 준비해둔 은신처입니다. 타마라와 클로에도 모르는 곳이에요. 오로지 저만 알고 있죠. 도움을 바라더라도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어요.”
“타마라와 클로에는....”
“물론 당신에게 당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죠. 정말이지 무능한 아이들이네요. 아니면, 당신이 생각보다 유능했던 걸까?”
타마라는 이미 배신했다는 것을 눈치챘고, 설마 싶었지만 클로에도 결국 당했다는 것은 그녀가 써놨던 ‘시나리오’의 글자가 뭉개지는 것을 보고 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애초에 클로에가 실패하든 실패하지 않든, 그녀가 13호의 시선을 끄는 사이 소피아는 스페이드를 이용해 【어비스】를 제압했다.
중요한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하면 직속 부하들까지 믿지 않는 소피아가 항상 마음에 새겨두는 지론이었다.
“......보기 좋게 당했구만. 부하라는 아가씨들만 어떻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정할게요. 아무리 당신이 날고 뛰어도 고작해야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참모라는 남자도 그래요. 귀신 같은 지모를 지녔다면서, 동료라고 생각한 스페이드에게 기습을 당하니 속수무책으로 당하죠.”
“말이 나와서 그런데, 스페이드는 어쨌지?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시점에서, 소피아는 담담하던 태도를 버리고 쿡쿡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입술 끝이 스윽 솟아올랐다.
“그렇네요. 이렇게 된 거, 보여드릴까요.”
소피아가 짝짝! 손뼉을 치자, 아마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스페이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피아님... 13호.”
스페이드는 여전히 냉정한 눈으로, 13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참모였다면 ‘아름다운 여성의 차가운 매도의 시선... 오싹오싹해...!’라면서 기뻐했겠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그런 취향은 없었다.
소피아는 그런 스페이드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자, 스페이드. 말해보세요. 저 빌런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러자 스페이드는 울 것처럼 부들부들 떨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봤다.
떨리는 입이 열렸다.
“저는... 저희 7번대의 히어로들은... 저 쓰레기 같은 빌런에게... 잔뜩 더럽혀졌습니다...!”
울분과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부르쥔다.
“라헤 대장은 13호와 내통하는 가증스런 배신자였습니다... 그녀는 저희를 한 명 한 명 13호에게 넘겼고... 13호는 비열한 수법으로 저흴 세뇌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고 짐승처럼 마구 범했습니다... 온갖 욕정을 저희에게 풀고... 약점을 잡고... 동료를 팔아넘기게 강요하고...! 저는... 저는...!!!”
스페이드의 눈이 촉촉해졌다. 칼이 손에 쥐여져 있었으면 당장 찌르지 않았을까 싶은 살기와 슬픔이 담긴 눈빛에, 13호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피아는 그런 두 사람을 웃으며 바라보더니, 어깨를 떠는 스페이드를 자애로운 성녀처럼 꼭 껴안아 주었다.
“저런, 스페이드. 고생이 많았어요... 한창 때의 여자아이가 그런 끔찍한 짓을 당하다니...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선 당신을 칭찬해요.”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위로해주고는, 그대로 스페이드를 껴안은 채 방 밖으로 내보냈다.
“자, 좋은 증언이 되었죠?”
“......하, 참.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어이가 없네.”
“어머나. 어디가 말이죠?”
“뭐, 다른 걸 떠나서. 설마 라헤 그 결벽한 여자가 빌런이랑 내통한다던가, 부하를 팔아넘긴다던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조작을 해도 좀 말이 되게 하지 그래?”
“글쎄요. 아무리 청렴한 사람도 정사(情事)가 관련되면 무슨 질척질척한 일이 생길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사랑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으니까.”
“......진짜 이 여자, 얘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답이 없네... 그보다 그 입으로 사랑 타령이 나오니까 진짜 열 받아.”
13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노골적이다. 이것으로 빌런 조직 【어비스】를 체포하는 동시에, 라헤와 7번대, 더 나아가 한국의 히어로협회까지 뒤흔들 생각이 분명했다.
그 과정에 스페이드는 더더욱 비극의 히어로로 만들 생각이겠지. 매스컴을 타고 기사로 나간 후 스페이드의 사생활 따윈, 이 여자에겐 사소한 일인 것이다.
“타마라한테 스페이드의 【편집】한 기억을 다시 돌려놓으라고 했는데... 그 여자, 제대로 일은 안 한 거야, 그것도 아니면 네 능력이야?”
“후후, 어떠려나. 단순히 당신이 쓰레기인 거 아니고?”
“...농담할 기분 아닌데.”
“유머도 없는 남자 같으니. 【트루 스토리】를 이용했을 뿐이에요. 【타마라는 스페이드의 기억을 돌려놓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조작된 트라우마를 심화시켰다】... 같은 느낌으로.”
“......그렇구만.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클로에의 그 비정상적인 충성심도 그 능력으로 만든 거야?”
소피아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저 태도를 보면 긍정하는 거겠지.
――‘어째서... 충성을... 나는...?’
클로에의 당황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여러모로 찝찝하다.
“완전 반칙 능력이잖아. 현실을 맘대로 주무르다니.”
“쓸만한 능력이긴 하지만, 반칙까지는 아니에요. 제 능력은 인과(因果)를 맞추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거든요.”
무슨 뜻이야 그게.
“그냥 뜬금없이 ‘황금을 얻는다’라고 적어서야 제 능력은 발동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소매치기를 잡았고,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줬더니 답례를 한다고 했을 때, ‘답례로 황금을 얻는다’라는 말을 쓰면 이루어지죠... 이렇게,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원인과 결과를 맞추지 않으면 제 능력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아아, 어쩐지 이해가 갔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그냥 ‘스페이드는 소피아의 수족이 된다’라고 적어봐야 의미가 없지만, ‘납치되어 기억이 조작된 스페이드는 소피아의 수족이 된다’라는 건 된다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원인만 명확하다면 가능한 것 이상의 결과도 끌어낼 수 있다. 스페이드와 비등비등한 실력의 클로에지만, 단 한 방에 스페이드를 무력화시킨 것도 소피아의 ‘시나리오’에 의한 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까지 13호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완벽한 능력은 아니에요. 그래서 【만능】을 바라고 있는 거예요.”
“만능이라면....”
닥터가 했었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아니 그녀는 【만능】을 바랬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제 능력의 한계는 제가 알아요. 그러니 그 한계를 넘어서는 【만능】을 바라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잖아요? 그 만능의 열쇠는 바로 당신이고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이해할 필요는 없답니다. 오로지 제 말에 따르는 종이 되어서, 당신의 능력을 제게 제공하기만 하면 돼요. 생각할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어요.”
소피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질문은 이제 끝? 슬슬 지루해지는데요.”
“...한가지만 더.”
13호는 줄곧 궁금했지만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던 하나를 묻기로 했다.
“클로에랑 타마라... 성인 맞지? 성인이라고 해줘. 성인 맞아? 진짜 중요해. 빨리 말해줘. 현기증 나.”
“......하.”
소피아도 이 질문은 어이없었나 보다.
13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핫! 걱정마세요, 13호. 그 아이들, 어려보여도 둘 다 성인이야.”
“휴....”
진짜 너무 긴장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타마라는 여유롭지만, 클로에가 한 달 전에 생일이 지났으니까, 딱 성인이 되었네. 축하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
“한 달... 한 달?”
13호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들, 섹스가 되게 능숙하던데...?”
“요즘 시대에 성인이 되어서야 섹스한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하는 거 아니죠?”
“......명백히 접대용 섹스였어. 그건.”
굉장히 의아했다.
타마라도 클로에도, 언동에서 보자면 남자를 싫어하는데.
그런데도 두 사람 다 막상 까보면, 남자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어떻게 남자를 보내버릴지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3호는 혹시나 싶은 기분으로 물었다.
“너, 걔네들한테 뭔 짓 시켰냐?”
“무슨 착한 어른 행세야? 그걸 당신이 왜 신경 쓰나요? 빌런 주제에.”
소피아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쳤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제 부하들을 필요한 데다 썼을 뿐인데, 문제 있나요?”
“필요한 데....”
“세상 어딜 가나 멍청한 수컷들을 이용하는 데는 여자가 좋죠. 젊고 순종적인 여자라면 특히나.”
“.......”
“아, 그리고.”
소피아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어린아이라는 건 참 좋아요. 별 다른 이유가 없어도, 그때 가르쳐 준 게 세상의 법칙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어릴 때 꼬드겼다. 어릴 때 말을 걸었다. 어릴 때 그런 교육을 했다... 그것만으로 훌륭한 인과가 되어줘요.”
소피아가 클로에와 타마라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던 것이 각각 10살, 11살 때.
그 시기는 이제 막 자신의 인격을 확립해나갈 시기이며, 동시에 어른들이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때다.
그렇다.
그녀에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치는 수족이 되는 데에, 별다른 이유조차 필요 없는 때다.
능력자들을 따로 모으는 시설에서, 두 사람의 외모와 능력이 탐났던 소피아는, 덥석 자신의 능력으로 두 사람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버렸다.
소피아의 능력은 제대로 발동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인과가 필요하다. 사람을 수족으로 만드려면, 그만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던가, 깊은 인연을 맺는다던가 그런 것이 필요하지만, 어린아이인 두 사람에게는 돈을 몇 번 기부해줬더니 충분한 인과가 되어줬다.
그 뒤는 흔들림 없이 선망과 충성을 자신에게 바치는 두 사람을, 마음 가는대로 굴릴 뿐.
“정말 좋았답니다. 높으신 곳에 계신 분들일수록, 특이한 성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요.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분이 계셨을 때는 일이 너무 잘 풀렸어요. 12살의 두 사람을 일주일간 바쳤더니, 그 사이에 아이우스에서의 제 지위가 한 단계 껑충 뛰어오르지 뭐예요.”
이 때 13호의 눈에는, 소피아가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