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55 히어로 클로에, 충성심을 시험 받다(1)
“지하에 남아있는 빌런들은 제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클로에를 쓰러뜨린 라헤는, 지하에 여전히 남아 빌빌거리던 빌런들을 확인하고 운송반을 불렀다.
불법인체개조를 받은 그들에게는 ‘살해허가’가 떨어져 있다. 아마 끌고간 뒤 상태를 보고 그 뒤의 처우가 결정될 것이다.
나머지는 히어로의 일. 빌런인 나로서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보스 녀석은 죽이면 안 된다? 나도 좀 혼내주게.”
“......뭐, 알겠습니다. 스페이드를 그렇게 지독하게 괴롭혔으니... 절대 편하게 죽이지는 않습니다.”
“아니아니, 죽이면 안 된다고. 내 것도 남겨줘!”
“.......”
“대답!”
“글쎄요....”
여하튼 불안한 대답이긴 했지만, 라헤는 대충 얼버무리고 호출한 운송반 인원들과 함께 빌런들을 후송해갔다.
“그럼 이제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되는데....”
라헤와 운송반의 인원들이 빌런들을 연행해가는 것을 나는 몰래 훔쳐보다가,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사이코】의 건물 윗층으로 올라갔다.
라헤와 싸운 뒤 정신을 잃은 클로에는 3층 끄트머리에 있는 방에 옮겨 두었다. 마력의 과사용으로 몸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도로시 특제 치료용 포션도 먹여놨으니 슬슬 일어났을 것이다.
“......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 팔을 뒤로 한 채 수갑이 채워진 클로에가 몽롱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익숙한 트랜스 상태. 특제 포션과 함께 먹여둔 세뇌약이 문제 없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클로에, 내 목소리가 들리냐?”
“........”
“대답해라, 클로에. 내 목소리가 들려?”
“...네.......”
눈 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휘저어봤다. 아무래도 제대로 최면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나는 클로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그리고 지금껏 보이던 늠름한 태도와는 달리, 타마라와 같이 앳된 인상의 소녀였다.
뭐라고 해야하나, 정말 말 그대로 소녀로 보였다. 그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클로에를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정말 성인이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얼굴이라고 할까.
이게 조금 전의 그 여자가 맞나 싶다.
서양인은 동양인에 비해 성장이 빠른 편이고, 몸의 굴곡도 뚜렷하다. 그래서 먼 발치에서 바라봤을 때는 별 생각을 안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니... 어린아이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스페이드보다는 어릴 수도 있겠다.
‘나이를 물어보기 무서워졌어.’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야겠다.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있는 법. 나는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윈윈.
...성인 맞겠지? 성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페이드랑 보스한테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그래, 분명 성인이다. 이런 굴곡을 가지고 있는데, 나름 봉긋하니 괜찮은 가슴을 가지고 있는데 나이가 차지 않은 여자라고 하면 진짜로 큰일이다. 내가 큰일이야. 지금 만지고 있거든.
잠깐만.
애초에 히어로 활동을 하려면 성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클로에는 히어로다. 그러므로 클로에는 성인이다. 좋았어, 완벽한 삼단논법. 마음이 편해졌다.
참지 못하고 가슴을 주무르고 만 나는 크게 한숨을 돌렸다. ......죄책감이 들어서 안 되겠네. 돌아가서 스페이드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떨어지는 응징의 펀치를 몇 대 맞으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지. 어쩐지 최근에는 스페이드한테 얻어맞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오싹오싹한게.
자. 그럼 나이 관련해서는 일단락 됐고.
이제 세뇌를 해야 될텐데.
소피아인가 하는 여자를 공략하는 데도, 또 앞으로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 여자, 클로에를 세뇌하는 건 꼭 필요한 수순이다.
‘그런데 아는 게 없단 말이지.’
세뇌의 첫걸음은 일단 상대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어디보자, 이 여자를 찔러볼만한 화제라면....
‘역시 소피아에 대한 것 밖에 없으려나.’
조금 전 싸움에서도 계속 “소피아님, 소피아님”을 연호하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광기와도 같은 충성심이, 당시의 클로에에게서 절절 넘쳐흐르고 있었다.
“클로에, 지금부터 내가 질문을 할게. 괜찮아. 어떤 사실이어도 말해도 상관 없어. 그러니까 편안하게 대답해 줘.”
“네....”
“그래그래. 그럼 질문할게. 클로에, 너는 왜 그렇게 소피아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지?”
“소피아님은... 충성을 다 바치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니까....”
“어느 점이?”
“그 분은... 오물 덩어리... 수컷들과는 다르게... 우아하고... 고귀하고....”
“그것 뿐이야? 어떻게 우아하고 고귀한 거지?”
“우아... 고귀... 소피아님....”
클로에가 아, 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는 왜... 소피아님을...?”
몽롱한 얼굴, 몽롱한 의식 속에, 클로에가 힘없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라니?”
“모르...겠어요... 항상... 생각... 희미해져... 아냐.... 아냐, 아냐....”
“클로에?”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클로에가 마치 발작하듯 몸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아냐... 아냐... 아냐...! 머리가... 아... 우... 아...!!!!!!!!”
“클로에! 야!”
“......아... 안 돼...!”
클로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멎질 않는다.
‘이거,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한 모양인데.’
실물을 본 적도 없고, 참모나 라헤를 통해 전해들은 인상 밖에 없는데, 벌써 최악이라는 이미지가 스멀스멀 느껴졌다.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아무생각 없이 클로에의 몸을 확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클로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 괜찮아. 괜찮아.”
“아... 후아....”
“자아, 심호흡. 심호흡. 천천히. 스읍~ 하아... 스읍~ 하아....”
“...스읍...... 하아... 스읍... 하아......”
심호흡과 함께 발작도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나는 그 틈을 타 세뇌약을 적신 손수건을 클로에의 입에 가져다 댔다. 여전히 심호흡을 계속하는 클로에가 세뇌약을 더욱 더 깊게 들이마셔간다.
‘그 여자가 장난을 친 모양이니, 그냥 세뇌하는 것으로는 안 되겠지.’
이 충성심이라는 견고한 껍질이 있는 한, 아무리 암시를 걸어도 깊은 곳까지 닿지는 못할 것이다.
역시 이용하려면 이 충성심을 어떻게든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도로시의 말을 떠올려봤다.
――‘무언가를 맹신하는 인간이라면 오히려 다루기 쉬워. 어딜 어떻게 공략하면 좋은지, 뭘 손대면 되는지 확실하게 보이거든.’
――‘맹신하는 걸 정면에서 부정하는 건 절대 안 돼. 대신 변화구를 주는 거야. 네가 믿고 있는 건 정말 사실이냐,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이런 식으로.’
――‘세뇌에도 저항할 만큼, 어떤 억지 주장에도 흔들림 없는 신념은 정말 드물어. 대부분의 맹신은 진흙 토대 위에 쌓아진 집 같은 경우가 많거든. 공략하기 시작하면, 금방 무너져버려.’
자, 그렇다면.
클로에의 이 충성심을, 나는 어떻게 이용해 볼까나...?
* * *
『자, 클로에.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다. 지금부터 내가 셋을 세면 일어나는 거야.』
클로에는 안개가 낀 듯 탁한 의식 속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빌런... 13호...?’
어째서 적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애초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아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마치 무의식의 바다를 이리저리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하나... 둘... 자, 이제 일어나라... 셋.』
이리저리 떠다니던 클로에의 의식이, 13호의 호령과 함께 단숨에 끌어올려졌다.
“......어?”
클로에는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 뜨며 주변을 살폈다. 눈 앞에는 빌런 13호가 커다란 소파 위에 오만하게 앉아있었다.
“깨어났나, 클로에? 기분은 어때?”
“여긴.... 어째서.....”
“기억해? 라헤한테 엉망진창으로 깨지고 혼자 쓰러졌는데.”
“.......”
클로에는 빠득, 이를 울리며 독살스런 눈으로 13호를 쳐다보았다.
당장에라도 골렘을 소환해 이 남자를 천갈래 만갈래 찢어죽이고 싶었지만, 마력의 과사용으로 몸 안에서 티끌만큼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능력을 사용하려면 아마 앞으로 몇시간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 오물덩어리 쓰레기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면서!”
“인맥도 힘인데?”
“그게...읏.”
“너도 할 말 없지?”
“.......”
13호는 어색한 듯 머리를 긁었다.
클로에는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몸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열기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는 사이에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약 같은 걸 먹였다거나.
“쭉 지켜봤는데, 너, 그 소피아인가 하는 여자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나더라?”
“소피아님은 너 같은 쓰레기랑 다르니까. 고귀하고, 아름다우셔.”
“응. 그렇지, 나 같은 쓰레기랑은 다르지.”
13호의 손이 클로에의 뺨을 쓰다듬었다.
단순히 손이 닿은 것뿐인데, 클로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상한 기분....’
어쩐지 찌릿찌릿한 느낌이, 손이 닿은 뺨에서 전해져왔다. 심장이 두근, 두근, 세차게 뛰어올랐다.
“나도 그 소피아님이 엄청 대단하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것저것 들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너 같은 여자가 그렇게나 충성을 맹세할 정도니까.”
개소리.
더러운 남자 따위가 알 수 있을 만한 고귀함이 아니다.
클로에는 그렇게 반박하며 일축하려 했지만,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냐... 남자라도... 응. 소피아님의 고귀함을 알 수도 있지. 그래, 엄청 대단하신 분이시니까.’
원래라면 남자의 말 따위 귀담아듣지 않을 클로에였지만, 어쩐지 13호의 말은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불가사의한 느낌이 클로에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야.』
『그러니 내 말은 무엇이든 믿어줄 것.』
그런 암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 남자 주제에... 소피아님의 위대함을 알다니, 조금 하는 모양이네요.”
“응. 그런데 막상 라헤한테 쪽도 못 쓰는 너를 보니까 네가 동경하는 소피아님도 별 거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
“무슨 그런!?”
클로에의 눈에 다시 표독스러움이 담겼다.
그렇다고 반박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소피아의 힘을 빌려놓고서도 라헤에게 져버렸으니까.
“너는 소피아님이 하찮은 남자따위보다 훨씬 고귀한 분이라고 그랬지?”
“그렇죠. 당신처럼 비열한 쓰레기 따위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그럼 보여줘봐.”
“......에?”
클로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 자리에 소피아님은 없어. 하지만 소피아를 따르는 네가 있지. 네가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하신 소피아님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여준다면, 나도 내 성심을 다해서 소피아님께 충성을 바치도록 맹세할게.”
13호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일까?’
이런 남자의 말을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의심스런 마음이 들것 같았지만, 클로에는 억지로 밀어냈다.
어차피 지금은 붙잡힌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다. 13호가 마음만 먹으면 무방비한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빼앗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세뇌기술인지 뭔지를 써서 7번대의 히어로들과 같은 꼴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피아님에 대한 거라면... 질 리가 없어.’
설령 13호가 자신을 세뇌하려 한다 해도, 이 충성심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기다 그 빌런 13호를 소피아님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만들 수 있다면.
분명 소피아님께서 자신을 칭찬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의욕이 샘솟았다.
무엇보다 이 남자의 말을 거절하기 싫다는, 알 수 없는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기분 탓이겠지.
“좋아요. 빌런 13호. 당신에게 소피아님의 위대함을 알려드리죠...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 있다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잖아.”
13호는 피식 웃으며 벨트를 풀고 하의를 내렸다. 팬티도 마저 내리자, 조금씩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는 남성의 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리며 눈 앞에 노출되었다.
“네 충성심이 진짜라면 육체의 욕망 따위에 지는 일은 없겠지? 내가 지쳐 굴복하는 게 먼저일지, 네가 소피아님보다 남자의 자지를 선택하는 게 먼저일지, 한 번 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