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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화 〉#54 그것은 마치 공명의 함정처럼(4) (215/271)



〈 215화 〉#54 그것은 마치 공명의 함정처럼(4)

두쿵! 두쿵! 두쿵!


클로에는 심장이 미칠 듯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두려울 정도였다.


전혀 예정에 없던 인물의 등장도 그렇고, 무엇보다 피부를 찌르는  오싹한 한기와도 같은 적의가, 그녀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7번대의 대장, 라헤.

【천칭자리】에서 비롯되는  능력은 반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여기에, 7번대의 대장이...?’

그야 13호가 불렀겠지. 그렇다고 밖에 볼 수는 없지만... 클로에가 경악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이런 건 시나리오에 없었어!’

소피아의 시나리오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시나리오상으로는, 타마라와 빌런 13호를 이 자리에서 제압하고 자신은 여유롭게 소피아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텐데....


‘시나리오가... 파탄났다고...?’


그런 생각이 들자, 오한과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이우스의 히어로 아가씨. 그렇게 겁을 먹으면 꼭 이 쪽이 악당 같잖아요.”

라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클로에는 가능한 태연을 가장하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빌런과 내통하는 시점에서, 당신들은 악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네. 그러면 악당인 것으로 치죠. 상관 없습니다.”


라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악당이든 정의든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빌런인지 히어로인지, 어디의 어떤 사람의 부하이고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그런  전혀, 하나~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이라며 라헤가 말을 이었다.

“――제 부하에게 손댄 것은, 결단코 후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철저하게,  별자리에 맹세코, 반드시.”


부오옷-하고.

한순간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기백이, 압박감이, 마력이――라헤를 감싸듯 넘쳐흘렀다.

“......!!!!”

그저 그 기운을 앞에 두는 것만으로, 클로에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오롯이 자신을 노리고 쏘아지는 명백한 적의. 명백한 해의.

당장에라도 덜덜 떨면서 머리가 이상해진 토끼처럼 도망치고 싶어지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클로에는 마력을 끌어모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포심을 밀어내기 위한 기합성.


동시에, 라헤의 정면에 은으로 된 골렘이 나타났다.


키는 대략 2m, 마치 기사와도 같은 형상으로 갑옷을 둘러 입은 골렘은 은으로 가득 채워진 묵직한 망치와도 같은 주먹을 라헤를 향해 휘둘렀다.

직선으로 쏘아지는 은빛의 궤적.

아스팔트 복도라도 산산조각  묵직한 일격이지만, 그 궤적은 하얀 장갑에 감싸인 가녀린 손에 아무렇지 앟게 가로막혔다.


라헤가 내민 손이, 골렘의 묵직한 주먹을 막은 것이다.

“......읏...!”

클로에가 손가락을 휘저으며 골렘에게 추가로 마력을 부어넣었다.

새로 밀려 들어온 마력을 추진제로, 골렘은 열심히 팔에 힘을 부어넣었지만――라헤의 손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으로  골렘이군요. 형태도, 파워도 좋네요.”

라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어서 골렘의 주먹에 금이가며, 천천히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근데 은이어서 그런지, 강도가 좀 실망스럽네요.”

그대로 팔을 휘둘러 골렘의 주먹을 내치고, 무방비한 골렘의 몸통을 부츠굽으로 쾅! 걷어찼다.

골렘에 비해서 지나치게 가는 다리였지만, 골렘의 몸은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쿠궁! 쿵! 달캉! 쿠우우웅!!!

바닥을 구르며 물수제비마냥 튀어오르고, 이윽고 근처에 쌓여있던 철근의 잔해를 무너뜨리며 요란하게 파묻혔다. 끼긱거리며 다시 움직이려 했지만, 그대로 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무너져내렸다.


그 처참한 광경에 골렘의 밑에 깔린 13호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끝인가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강철의 처녀들이여】!!!!”

글로에가 굳은 표정으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라헤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에 골렘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라헤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조금 전 허리춤에 걸려있는 다른 하나의 검을 뽑아 들어 손에 쥔다.

“어머나, 어디까지 만들어 내려고... 이 정도면 대단하긴 하네요.”


넓은 부지 안을 거의 가득 메울 정도의 골렘들.

이만큼이면 본래 클로에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클로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소피아의 시나리오가, 그녀의 한계마저 비틀어 열고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숫자의 골렘을 만들어 낸 것이다.


“라헤에에에에에에에!!!!”

한계 이상의 골렘을 만들어 내 헉헉대면서, 클로에는 골렘들을 조작했다.

무수한 골렘들이,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왜소한 흰전투복의 히어로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 * *




‘소피아의 능력은 반칙이지.’

13호는 느긋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트루 스토리】랬나.


바라는 미래를 적는 것으로, 미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능력.

타마라에게서 그 능력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었다. 무언가 제약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 용의주도한 여자가 부하에게 상세한 내용을 알려줄 리는 없기에 타마라도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능력의 혜택은 스페이드  똑똑하게 목격했다.

스페이드도 클로에도 같은 A급 히어로일텐데, 고작해야  일격. 일격만으로 스페이드를 무력화시켰다. 그 외에도 자잘한 분기점에서, 마치 그게 세상의 법칙이라는양 모든 현실이 스페이드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정말이지 반칙이다.

정말이지 치트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써컹-! 하는 소리와 함께 골렘 하나가 반쪽으로 잘려나갔다. 라헤의 검에 골렘이 단번에 양분당한 것이다.

...반칙보다  반칙 같은 저건 뭐라고 해야 할까.

기사 같은 차림새의 골렘들은 각자 검이나 방패, 혹은 거대해진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라헤를 붙잡기 위해 야만스레 달려들었다. 마치 폭력이 해일처럼 몰려드는 광경.


하지만 그 사이에서 라헤는 어디까지나 여유롭고, 우아하게 골렘들을 처리해나갔다.

까앙! 낑!


라헤가  검은 하나뿐일 텐데, 바람처럼 휘둘러지는 검은 골렘들의 공격을 모두 흘려내고 가볍게 쳐내버렸다. 마치 뒤에도 눈이 달려있는 게 아닐까 싶은 기이한 광경.

캉-!

또다시 정면에 있던 골렘 두 기가 양분. 이어서 라헤를 노리고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은으로  창과 검을 피하듯, 토독, 높이 날아올랐다.

마치 요정처럼, 라헤의 몸이 가볍게 공중에 떠오르고, 은의 기사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잇달아 휘둘러지는 검광은 폭풍과 같이, 혹은 벼락과 같이 떨어져 내려 골렘들을 헤집으며, 착실하게 골렘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

철컹철컹철컹철컹!!! 마치 포효를 지르듯 갑옷을 울리며 달려들던 골렘들 사이에서, 라헤가 상아색 머리를 휘날리며, 은의 골렘과는 다른 흰 빛의 궤적을 흩뿌리며 맹위를 떨쳤다.

참격에 이은 참격. 다가오는 적들을 모조리 단절해버리는 검격의 폭풍.


화려하면서도 잔혹한 일거수일투족이, 철컹거리며 날아드는 날카로운 은의 검이며 주먹을 빠져나가며 몸통을, 머리를 잇달아 베어 날려버렸다.


광활한 부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검광이 한  휘둘러질 때마다 골렘의 몸이 무너져간다. 마치 은이 아니라 진흙으로 만들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골렘의 몸은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잘려나갔다.


【천칭자리】의 능력은 어디까지 상대와 라헤 사이의 격차를 없애는 【밸런스】.


지금처럼 검을 휘두르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적의 기척을 파악하고, 반응하고, 은을 손쉽게 썰어버릴 정도로 칼날을 강화하고... 이 모든 것은, 라헤 본인의 기량이다.

하나, 둘, 셋, 넷....

치열한 검무에 골렘의 숫자가 착실히 줄어든다.


“이건... 이럴... 수는...!! 소피아님... 소피아님...!”


클로에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골렘을 돕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허공에 나타나는 무수한 은의 검이, 라헤를 노리고 칼끝을 향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그러나 라헤를 노리고 날아든 검은, 라헤의 주변을 반원형으로 감싼 얇은 얼음의 막에 가로막혀 튕겨나갔다.


라헤의 검이 은의 방패를 손쉽게 꿰뚫었던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림.


“소피아니임...!!!!!!”

무시무시한 라헤의 위용이, 【클로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시나리오를 비웃듯이 정면에서 깨부수고 있었다.


* *



“어머나?”

소피아는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몇가지 중요한 사항을 적어놓았던 수첩을 꺼냈다.


개 중 클로에에 관한 항목이, 그녀와 관련된 시나리오 중 일부가 뭉개지고 어그러져 가는 게 보였다.


“클로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보네....”

소피아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걱정이 아닌, 실망.


“정말이지 믿을만한 부하가 하나 없다니까. 무능하긴.”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수첩을 도로 닫았다.






* * *



어느샌가 부지 안에 남은 골렘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무모하게 라헤에게 달려들다, 그대로 베여져 쓰러졌다.


“......끝?”


푸스스 사라져가는 골렘들 사이에 선 라헤는, 이 정도는 운동조차 되지 못한다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나는 저 여자를 어떻게 이긴 거지?’

13호는 바닥에 눌려 엎드린 채 그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가서 반칙 같은 짓을 하긴 했다지만, 저런 여자랑 막상막하로 붙었다는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그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일어나라】.”

그러나 아직 클로에의 투지는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라】.”

푸스스 사라져가던 골렘들의 잔해가,  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일어나라】!!”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반짝이는 은의 입자가 모여들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굳건한 기사여, 강철을 두드려 부수는 거인이여】!!!!”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웬만한 건물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은으로 된 골렘.

형상은 지금껏 보던 것들과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크윽...!”

아무래도 이만한 크기의 골렘을 만들어내는  소피아의 도움이 있어도 무리였던지, 클로에의 코에서 한줄기 피가 흘렀다. 몸 안쪽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와오....”

13호가 그 위용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 사이, 클로에의 영창이 끝났다.

“【플라타 엘 콜로소(Plata El Coloso)】!!”

은으로 된 거대한 거인의 눈에, 반짝 붉은 빛이 돌았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춤의 서양식검이 뽑혀져 나와, 높이 들어올려졌다. 그 덩치에 어울 리게 마찬가지로 거대한 검이다.

저만한 질량의 물건이 떨어져내리면, 지반이고 뭐고 남아나는 게 없을 게 분명하다.


그보다 히어로 주제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저질러도 되는 거냐. 나중 일을 생각할 정도의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는 걸까.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들어 올려진 은빛의 검날.

그리고 그런 검날을,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덩치를 앞에 두고.


“【오라, 오라, 오라. 얼음의 여왕이여, 땅끝의 사자여, 이 자리에 와서 힘을 빌려주기를】.”

요정의 노래와도 같은 낭랑한 영창이 울려 퍼졌다.


“【가까워지는 파멸의 때. 세 번의 여름은 날이 어두워지고,  번의 겨울 동안 전쟁을 한다】.”

라헤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의 바람이, 뼛속까지 시려오는 냉기가 부지 안을 가볍게 휩쓴다.


“【얼어붙은 대지. 휘몰아치는 엄동. 해와 달은 삼켜지고, 하늘은 피로 가득 찬다.】.”


거인은 더 이상 기다릴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내렸다.

마치 유성과도 같이, 혹은 신이 내리는 단죄의 칼날과도 같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칼날.

“【모든 생명 있는 자에게 평등한 죽음을. 모든 것에는 영원의 안식을. 모든 것은 영원한 빙하 아래에】.”

그리고 라헤의 눈은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흔들림 없이 올려다보고 있다.


무거운 파멸의 칼날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라헤의 영창이 끝났다.

“【카타스트로페 핌불베트르】.”


그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 *






“아........ 우....”

클로에는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코에서 흐른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조차 내버려  채, 완전히 얼어붙은 자신의 골렘을 올려본다.

마치 남극의 빙하를 떼어온 듯한 거대한 얼음기둥. 그 안에 갇힌 거대한 골렘의 모습은, 흡사 어느 특이한 오브제처럼도 보였다.

얼음은 쩌적쩌적 금이가는가 싶더니, 이내 조각조각나며 골렘과 함께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 떨어진다! 맞으면 죽겠는데!”


“......호들갑은요.”


라헤가 검을 휘두르자, 무너져내리던 두꺼운 얼음덩어리들이 바람에 실려 공중에 떠올랐다. 이대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곳에 내려놓을 생각이겠지.


“자, 이제 더 이상 수는 없는 모양이군요.”


또각, 또각, 라헤의 부츠굽이 바닥을 울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흰 제복의 히어로의 모습을, 클로에는 숨을 헉헉 대며 올려다봤다.

“그러면 어떻게 해줄까요. 제 부하의 복수는.”


완패.


이길  없다.

이런 건... 반칙이다.


“소피아...님....”


클로에의 눈앞이 핑글 돌았다. 마력의 과사용으로 한계를 넘은 몸이, 풀썩 쓰러진다. 시야가 순식간에 깜깜해져,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홀로 쓰러진 클로에를, 라헤와 13호는 각각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 만으로 사람을 죽이다니, 이게 바로 대장급 히어로... 눈빛으로 살인광선 같은 걸 뿌리는 거구나....”

“아, 안 죽였어요! 그런 광선  나와! 그보다 그냥, 혼을 좀 내는 거로 끝낼 생각이었는 데에...! 이게 뭐야...!”

라헤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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