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53 히어로 타마라는 빌런도 남자도 우습게 보였다(2)
‘딱히 우리의 정보를 줄 이유는 없어.’
하지만, 하고 입을 열려던 타마라는 문득 생각했다.
‘기억에 위화감이 느껴지면 【편집】한 기억이 풀려버릴지도 몰라... 조금쯤 신뢰를 주는 것도 필요하겠지?’
정말 중요한 기밀을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알아도 지장 없는 정보라면 줘도 괜찮을 것이다.
“타마라? 솔직하게 말해줄래?”
“아, 예에... 그러니까, 그게.”
어디까지 알려줘도 되지? 알려줘도 좋은 정보라면. 어디까지지?
일단 스페이드를 꾀어낸 게 우리라는 것? 사실 스페이드는 빌런이 아니라 클로에한테 당했다는 것? ...아니, 그건 안 되겠지, 상식적으로.
“그러니까....”
스페이드를 붙잡아서 기억을 【편집】했다는 것도, 그녀를 【어비스】의 스파이로 쓰려한다는 것도... 당연하지만 알려선 안 된다.
그러면 뭘 알려줘도 되지?
어라,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더라?
“타마라.”
“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고, 의식이 빙글빙글 돌았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해도 좋은 그런 건....
“도착했다.”
“헤?”
어느 건물 앞에서 13호가 멈춰섰다. 타마라가 멍한 표정으로 건물을 올려다보낟.
13호가 타마라의 손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화려한 간판의 호텔.
통칭 러브호텔이라 부르는 곳이다.
* * *
쏴아아아아아아-
‘뭐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타마라는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단순히 심심풀이 삼아 13호를 농락하고, 그러다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적당히 기억을 고쳐쓰고 버려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함께 러브호텔에 와버렸다.
13호의 목적이야 빤했다.
‘지금까지 읽어 들인 기억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깊은 세뇌를 위해서는 육체적인 접촉이... 나아가 성적인 접촉이 유효한 모양이니까.’
거기다 타마라 본인은 이렇게 예쁜 여자다. 물론 서구인치고 앳된 인상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때때로 모델로도 활동하는 그녀는 스스로가 매력적이라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세뇌를 제쳐놓고 발정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
오히려 형편은 더 좋다.
13호 같은 추레한 남자랑 러브호텔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못했을 뿐이지, 다른 사람의 눈은 없고, 13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목적에 딱 맞았다.
느긋하게 기억을 읽고, 느긋하게 기억을 【편집】해주자. 일이 끝나면 최고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기억을 조작해주면 된다.
‘그럴 의리는 없지만... 뭐, 불쌍하니까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문제가 있다면, 지금 13호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똑부러지게 대답했어야 했는데. ‘관련 없다’...고.”
자신이 세뇌한 대상이 명령대로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 때부터 13호의 시선에 불신감이 어린 것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자그마한 의심 때문에 내 능력이 해제되어 버릴 수도 있어....’
과거에 아픈 꼴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타마라는 그런 것에 민감했다.
조금 전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안 된다. 단발 기억을 조작하는 거라면 몰라도, 【편집】하는 기억이 길고 많을수록, 어디하나가 잘못되면 한순간에 전부 붕괴해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이대로 다시 기억을 【편집】해 봐야 모래사장에 집짓기 같은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손보기 전에, 먼저 신뢰를 되찾아야 돼.’
가능한 기억에 위화감을 줄이지 않으면.
타마라는 바디워시로 온 몸에 거품을 내며, 결의를 다지기로 했다.
* * *
『응, 그래, 참모. 오늘은 안 들어갈 거야. 제대로 저 여자를 세뇌하고 돌아갈게. ...응. 확실하게 떨어뜨려야겠어.』
샤워를 마치고 비치된 목욕가운을 입고 나오자, 13호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게 들려왔다. 아마 참모라는 인간이겠지.
‘소피아님은 무슨 실험체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어쨌든 마찬가지로 요주의 인물임에 틀림 없었다.
방심하면 오히려 이쪽의 목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책략가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굳이 13호의 기억을 조작해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이유도, 크게 보면 그 참모 때문이기도 하다.
“나왔구나, 타마라.”
“좀 더 통화하셔도 좋은데요.”
“아니, 여성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웬 신사적인 척이람.
타마라는 역한 기분이 들었지만 얼굴로는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13호는 타마라와 교대하듯이 샤워하러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 방 안에 비치 된 찻잔에 뜨겁게 데운 메밀차를 따라주고 갔다.
“목이 마를 테니까, 차를 끓여놨어.”
확실히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니 땀이 나서 그런지 목이 마르긴 했다.
‘하지만 빌런이 준비한 음료를 순순히 마실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
타마라는 따라진 찻잔의 내용물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메밀차 특유의 고소한 냄새에,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섞여있었다.
차보다는 커피를 즐기는 타마라다 보니 이게 본래 차 향기인지, 아니면 뭐가 섞여서 나는 향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대충 뒤집어 물 버리는 통에 부어버렸다. 씻고 나온 13호가 비지 않은 잔을 보면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목은 말랐기에, 근처에 놓여있던 까지 않은 생수병을 집어 꼴깍꼴깍 들이켰다.
......? 맛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아닌가. 영국에서 마시던 물보다 훨씬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제주도에서 생산한다는 그 생수인가.
‘자, 그러면 13호가 나올 때까지 전략을 좀 짜볼까....’
타마라는 러브호텔의 인테리어를 신기한 듯 둘러보면서, 침대에 걸터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타마라, 타마라?”
요람처럼 기분 좋은 흔들림에, 타마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
타마라가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잠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푹신한 침대가 너무 기분이 좋았던 걸까.
“차에 타놨던 약이 돌았나 보네.”
13호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 차는 바로 버려버렸으니까.
오늘은 이래저래 일도 있었고, 방탈출도 했으니 피곤했으니까. 잠들어도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약이 돌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을 13호는,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자신을 위에서 덮치듯 다가와, 목욕가운 틈새로 손을 꼬물꼬물 집어넣고 있었다. 맨살에 남자의 손이 닿자, 흠칫 몸이 떨렸다.
“아... 13호....”
“님은 붙여야지?”
재수 없는 남자.
원래라면 이딴 태도를 취하는 남자는 대번에 따귀를 때려줬겠지만, 아니면 불알을 밟아 괴롭히며 서열정리를 확실히 해줬겠지만, 지금은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
타마라는 본래의 성질을 죽이고, 스스로 팔을 13호의 목에 감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춥... 추웁.... 쪼옥...
13호의 혀가 타마라의 입술을 비집어 열고, 그녀의 입술을 적극적으로 빨며 돌아다녔다.
‘......키스는 좀 괜찮네.’
여러 가지로 스펙이 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키스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7번대를 함락하면서 여자들을 마구 농락한 결과일까.
‘이게 그 7번대를 함락한 몸....’
뭔가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오싹오싹해졌다. 히어로 지부 하나를 통째로 함락한 남자를, 지금은 자신의 손에 가지고 놀고 있으니까.
13호의 기억을 읽으면서, 생각했었던 것 이상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어비스】만의 정보만이 아니라, 몇 세대를 앞선 과학력을 갖춘 과학자들을 세뇌했다던가, 그 참모와의 관계라던가... 이 녀석은 보기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남자다.
그런 사실을 소피아에게 전부 알리지는 않았다.
충분한 가치는 보여주었으되, 진정한 가치는 알리지 않았으며, 13호는 【편집】한 자신의 꼭두각시 인형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 녀석은 그 【만능】의 단서다.
‘아예 소피아님과 클로에를 이 녀석한테 넘겨버릴까? 그리고 이 녀석을 내가 쥐고 흔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닐까?
타마라의 눈에 탐욕스러운 욕망의 빛이 번들거렸다.
좋다. 그렇게 하자. 언제까지 클로에 그년이 자신을 깔보게 할 셈인가.
자신은 13호에게 세뇌당한 척, 무해한 허수아비 같은 꼴을 보여주면서 경계심을 없애고, 마찬가지로 소피아 측에는 충실하고 미숙한 부하로서 충실하게 명령에 따르는 척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이득을 자신이 취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버릴 것 같았다.
“하아....”
긴 키스 끝에 입술을 떼자, 타마라의 뺨이 요염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타마라, 타마라. 이제 떠올려 봐... 아이우스의 네가 아니라, 내 노예가 된 너를.... 자. 너는 나의, 무엇이지?”
13호의 눈이 자신을 꿰뚫듯이 바라봤다.
타마라는 흔들림 없이 그 시선을 응시했다.
자신은 지금 13호에게 세뇌된 상태다. ...그렇게 기억하도록 13호의 기억을 【편집】했다.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똑바로 연기해주자.
그러니까.
“네, 13호님... 저는 아이우스에 속해 있지만... 하지만 13호님께 세뇌 당해... 당신의 종이 되어버린... 비참한 히어로 타마라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음... 저는 13호님의 명령에는 절대 거역하지 않고, 13호님을 숭배하고, 13호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실한 노예에... 야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13호님의 암캐입니다... 몸도 마음도... 13호님의 것입니다....”
타마라의 선언에, 13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내 기억을 조작하려고 나를 습격한 너를, 내가 다시 세뇌했지.”
“네, 그렇습니다... 13호님은 저 같은 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무척이나 지혜롭고 대단하신 분이라... 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타마라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13호의 기억 속에 있던 과거의 세뇌 패턴들을 짜집어서 만들어 낸 가짜 세뇌의 기억.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13호가 할 법한 세뇌의 기억을 만들어 본 건데.
‘하찮은 놈.’
이렇게 세뇌로나마 자신의 한심함을 숨기려는, 정말이지 볼품없는 남자다.
“그렇군, 너는 야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암캐라는 거지.”
13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끄덕이더니, 목욕 가운 아래로 집어넣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앗...?”
목욕 가운 안 쪽의 부드러운 속살을 섬세하게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타마라의 허벅지를 주무른다.
그 손길은 조금도 혐오스럽지 않아서, 무심코 타마라는 몸을 맡겨버릴 뻔 했다.
“아, 13호님... 이건...!”
“타마라, 확인하는 건데, 너는 나만의 노예가 된 거지?”
지근거리에서 마주친 13호의 눈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드, 들킨 건 아니겠지...?
타마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예... 저는 분명, 13호님의 노예이고... 암캐가 맞습니다... 저는 분명 태어났을 때부터... 13호님의 것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게 분명합니다... 믿어주세요....”
교태로운 목소리로 타마라가 말하자, 13호는 씨익 웃더니,
“알았다.”
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금 키스.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의 키스에서는 섬세하게 입술을 가르고 열어, 잇몸을 훑고, 야들야들한 혀 끝을 비벼왔다.
온 몸을 미끄러져 내리던 손은, 그대로 부드럽게 감싸듯 타마라의 몸을 깊게 끌어안았다.
“흐으으응...!”
키스 때문에 힘이 빠진 틈을 타듯, 가운 아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리듯, 그러나 곧바로 유두를 만지지 않는 섬세한 손길. 13호의 손가락이 유륜을 쓰다듬고, 이따금 유두의 측면을 손톱으로 긁듯 미묘하게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기분이 좋아, 타마라는 무심코 코맹맹이 소리를 흘렸다.
‘괜찮아... 이 정도는... 오히려 기분이 좋고....’
조금만 더 유혹하면, 분명 13호는 의심도 잃고 헤롱헤롱해질 것이다.
남자란 성욕이 충만하면 피가 사타구니로 쏠리는 법이다. 이성이 충분히 흐트러졌다 싶으면, 언제든 기억을 조작해 주면 된다.
어차피 오늘은 심심한 기분이었는데 잘되지 않았는가.
이런 것도 여흥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어디 한 번 만족시켜보라고, 등신 빌런.’
타마라는 자신의 입술과 혀의 맛을 한껏 만끽하듯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이는 13호를 속으로 비웃으며, 끈적끈적하게 서로의 타액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