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52 히어로 인 더 트랩(HERO in the trap)(2)
기이이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구체형 기계에 불이 들어왔다.
『...?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치직거려?』
『망가졌나? 왜 이래?』
거래장소인 룸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문. 그 앞을 감시하듯 선 보초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통신방해용 소형 EMP. 히어로협회의 특수개발 장비로,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근처의 통신장비를 무력화시킨다.
‘이걸로 통신은 못 해. 더 이상 지원이 오거나, 마피아들에게 알려 돌아가게 할 일은 없어.’
침착하게 주변을 살핀다. 일부러 사용되지 않는 느낌을 줄 생각인지, 이곳 지하의 조명은 늘 보던 LED 형광등도 아닌 알전구, 그것도 두 개밖에 없다.
‘실수해선 안 돼.’
후우, 후우우우-
스페이드는 눈에 띄지 않도록 EMP 기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몰래 챙겨두었던 권총을 손에 든 채 숨을 고르고――그대로 전장의 전구를 노리고 쐈다.
파창!
“누구냐?!”
명중. 하나는 깨졌다. 이쪽에 가까운 전구를 깨뜨렸으니 이쪽은 단번에 어두워졌을 것이다.
새카만 복장은 어둠에 녹아들어, 쉬이 발견되진 않겠지.
철컥.
문 앞의 보초들이 당황하는 사이, 스페이드는 권총을 다시 조준해 나머지 하나의 전등을 쐈다.
챙그랑!
“으와아아아아아앗!”
“웨, 웬 미친놈이!!! 침입자다!!”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거기다 지하에 있는 이 복도는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한다. 유일한 광원인 전등불을 잃은 남자들은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난 보여.’
탓, 타닷.
“누구야!! 어디냐!!”
도움닫기하듯 가벼운 발놀림으로, 스페이드는 어둠 속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녀의 눈은 이 어둠 마저도 꿰뚫고 볼 수 있으며, 그녀의 민감한 감각은 보이지 않는 상대의 기척을 정밀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녀와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남자들은, 스페이드가 품 안까지 들어와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히어로 납시셨다, 등신들아. 누구보고 미친놈이래.”
두 명, 순살.
* * *
『...밖이 뭔가 소란스러운데?』
『통신도 안 돼.』
『아까 그거, 총소리였지?』
빌런 조직 【사이코】. 조직원 전원이 불법 인체개조를 받고, 마찬가지로 전원이 ‘숙청허가’가 떨어진 위험한 빌런들.
I시 연안의 폐창고를 개조한 이 거래터에 모종의 이유로 대기하고 있는 그들은, 밖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술렁이고 있었다.
“정숙.”
그러나 중심에 서있는 한 젊은 남자의 말에, 모두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여기가 학교 수련회야? 빌런 조직이면 빌런 조직답게 가오 좀 있게 행동하자? 자, 히어로가 찾아왔다면 어떻게 할까?”
이들의 수장인 젊은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 순간 쾅! 하고 출입문이 거친 기세로 열렸다.
문 너머에 서있는 건 붉은 머리, 붉은 눈의 히어로.
검은 마스크며 착 달라붙는 가죽 슈트, 가죽 반바지너머로 여성스런 실루엣이 돋보였다.
남자는 푸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쏴.”
툭 내뱉었다.
동시에 요란한 총성이 룸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 * *
“【열두 개의 시련. 그 첫 번째. 30일간의 사투 끝에 쓰러뜨린 사자의 거죽】.”
문을 열기 전, 무력화시킨 남자들 사이에서 스페이드는 천천히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살과 창으로도 뚫리지 않으며, 어떠한 검으로도 베이지 않는 튼튼한 방패】.”
솟아오른 붉은 마력이 불길처럼 주변을 둘러싼다. 마구 터뜨리거나 보내버리는 화려한 마법은 아니며, 다음 발동까지의 인터벌이 길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스페이드에게 있어 무척이나 유용한 마법.
“【리온타리 티스 네메아】!”
영창이 완료된 것과 동시에, 스페이드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발로 차 열었다.
* * *
타탕! 탕! 탕!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탕!
귀를 틀어막고 싶어질 정도의 굉음이 끝도 없이 울려퍼졌다. 기관총도 아닌 단순한 권총이었지만, 이만한 숫자가 앞다투어 쏘아내니 기관총과 별 다를게 없었다.
쥐새끼도 빠져나가지 못할 탄막이 출입구를 발로 차 열고 나타난 스페이드에게 쏘아졌다.
웬만한 히어로도 이만큼 빗발치는 탄막에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C~D급의 히어로까지 밖에는 상대해본 적 없는 빌런들은 안이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기대를 배신하고, 새카만 가죽 슈트의 침입자는 날아드는 탄환을 신경쓰지 않고 거침없이 전진해, 본인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동료의 얼굴을 콱 붙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직!
사람의 머리에서 나는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소리. 바닥에 처박힌 동료는 쓰러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안...?!』
침입자의 몸을 둘러싼 사자와 같은 형태의 불꽃의 막이, 날아드는 탄환을 전부 막아냈다. 어마어마한 탄막에 둘러쌓였음에도 생채기 하나 없다.
『끄악...!』
이어서 물흐르듯이 움직여,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리버리까던 빌런 한 명이 스페이드의 발에 복부를 걷어차여 몸이 부웅 떴다.
종잇장처럼 날아가던 빌런은, 방구석에 쌓여있던 고철더미에 파묻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히어로다. 다들 꼼짝 마! 순순히 항복하면 사정은 봐주겠다!”
스페이드가 마스크를 벗으며 크게 외쳤다. 사나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빌런들의 전의가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마피아가 오기까지 약 10분.’
정각에 맞춰올지, 조금 일찍 올지는 모른다. 그보다 그녀를 지키는 이 마법의 효력이 사라져도 역시 위험하다.
효력이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자면... 약 5분.
그 안에 여기 있는 녀석들을 전부 제압해야한다.
쉽네.
『에에잇! 한 년한테 뭘 그리 쩔쩔매는 거야! 전원 총 버리고 덮쳐!』
“거 나야 좋지. 화끈하게 한 번 붙어보자, 등신들아.”
팔이 길어지는 녀석, 근육이 뻥튀기하는 녀석,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달려드는 녀석.
인체개조와 각종 도핑으로 강화된 빌런들이 덮쳐드는 앞에서, 스페이드도 마스크를 던져버리고 흉흉하게 웃으며 응전했다.
* * *
스페이드가 한창 싸우고 있는 그 시각, 거래처로 지정된 건물의 바깥.
그곳에 터벅, 터벅, 걸어들어가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소피아님, 슬슬 시작된 것 같습니다.”
[EMP 대항용 기기를 준비해놓길 잘했네요. 이쪽도 통신이 끊길 뻔했어... 그럼 나머지는 클로에, 당신에게 맡기겠어.]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기는 죽이되, 되도록 얼굴은 지켜줘요. 장난감에 흠집 나는 건 싫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은 끊겼다.
아이우스의 클로에는 그녀의 성격대로 빠릿한 태도로, 스페이드가 한창 싸우고 있는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우스의 임시 숙소가 된 어느 호텔방 안.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경을 쓴 소피아는 홀로 앉아 중얼거리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내리고 있었다.
“【(용감한 히어로는 빌런들의 음모를 막기 위해 그들 사이에 뛰어들었습니다)】.”
노트에는 미려한 필기체로 쓰여진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마치 한편의 소설과도 같은 내용.
지금 스페이드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 이 노트를 봤다면, 마치 보고 온 그대로 적어내린 듯한 내용에 필시 깜짝 놀랐을 것이다.
“【(다수의 강대한 빌런들에게 둘러싸여 지쳐버린 히어로 스페이드)】.”
소피아는 안경 렌즈 너머의, 비취색 눈을 반짝이며 펜을 놀려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어떠한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녀가 써내려 나가는 글이, 마력과 호응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크악...!”
“가, 강해, 히어로...!”
불꽃으로 감싸인 주먹이, 지금 막 고릴라처럼 근육이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빌런의 복부 한복판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어서 등 뒤를 노리듯 덮치며 달려오는 긴 팔의 빌런을, 스페이드는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빙글 돌려, 무릎 뒤로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다.
콰아아앙!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빌런이 무력화 되었다.
하아, 하아...!
스페이드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이상해....’
총을 버리고 죽자사자 달려드는 빌런들을, 스페이드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응전했다. 애초에 전부 ‘숙청허가’가 떨어진 빌런들. 어쩔 수 없다면 죽인다는 판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력. 그렇기에 100%의 힘을 다해 빌런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빌런들은 생각이상으로 막강했다.
‘이 정도면 협회가 책정하는 위험치로 2급 정도는 될 거야... 하지만 사전에 들었던 내용과는 다른 것 같은데...!’
그녀가 알기로, 빌런 조직 【사이코】의 위험치는 3등급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정확한 인원과 개조정도를 모르니 반드시 올바른 수치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와 다르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신체 재생이 특기인 녀석은 재생이 지나치게 빠르다.
근력이 강화된 녀석은 벽도 바닥도 신경쓰지 않고 부숴버릴 정도로 세졌다.
움직임이 빨라지는 녀석은 바퀴벌레처럼 지치지도 않고 잽싸게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래봐야 상정 내. 생각 했던 것보다 상대가 강했다더라, 하는 일은 워낙 비일비재하다. 확실히 달라붙는 빌런들이 생각보다 상대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 벌써 이렇게 지치는 거지...?’
기이하게도 5분도 되지 않는 전투로 지쳐버린 자신의 상태다.
스페이드는 역전의 히어로다.
진짜로 위험한 빌런들을 몸소 상대해 온 그녀로서 이 정도는 버겁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닐텐데....
“아...?”
피익- 몸을 두르고 있던 붉은 불꽃의 기운이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벌써 효력이 끝났나? 손목에 두른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은――
“어딜 한 눈을 팔아, 이 년이!”
“아, 진짜!”
까-앙!
휘둘러지는 묵직한 알루미늄 배트를 스페이드는 팔로 막아냈다. 가녀린 팔은 멀쩡한데, 휘둘러진 배트만 처참하게 구부러진 모습을 보고 빌런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 틈을 타 스페이드는 토독, 빌런의 혈을 짚어 그대로 제압했다.
딸그랑-
배트를 손에서 놓으며 쓰러진 빌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스페이드에게 덤벼드는 빌런은 없었다.
'뭐, 사소한 건 됐나.'
남은 건.......
“진짜... 괴물...!”
룸의 끝. 아무래도 이 빌런 무리의 수괴로 보이는 남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어쨌든 저 놈만 잡으면 끝나니까. 생각보다 마법이 빨리 풀렸지만, 풀리기 전에 거의 끝냈으니 충분하다.
저벅-
“히익?!”
스페이드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남자는 꼴사납게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이런 녀석을 상대해야하나.
“말도 안 돼... 이런 얘기는 못 들었어...!”
“얘기...?”
그러나 이어진 남자의 말에는 귀가 솔깃해졌다.
“무슨 얘기? 야, 곱게 말할 때 불자?”
“오, 오지 마!”
남자가 황급히 권총을 꺼내들었지만, 손이 덜덜 떨리더니 저 혼자 놓쳐버렸다.
“......뭐해?”
“히, 히익?!”
처음에는 부하들 사이에서 유유자적 담배나 피면서 가오 잡더니, 부하가 전부 쓰러진 지금은 완전히 한심함만이 덩어리로 남았다.
‘대충 끝내고 협회로 끌고가서... 이야기는 천천히 듣는 거로 할까.’
뽑아낼 정보가 많으니 죽일 수는 없고, 웬만해선 손에 피묻히기도 싫다.
스페이드가 딱하다는 듯한 한숨과 함께, 벌벌 떠는 【사이코】의 수장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새로이 나타난 기척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Pathetic(한심해), pathetic(한심해), 이만한 머릿수로 히어로 한 명 어쩌지 못하다니. 애초에 수컷이란 것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요. '시나리오'대로기도 하고요.”
‘여자...?’
이 룸에 뚜벅,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누군가.
푸른 빛이 감도는 머리를 뒤로 모아 묶은, 늠름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미스 스페이드. 아이우스의 소피아님의 명령으로 찾아 온 클로에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순순히 저를 따라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굳이 이런 데까지 와서 따라오라니? 아이우스면 나 같은 히어로는 얼마든지 오라가라 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의 동료 중 아무도 모른 채 따라와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부탁드릴 수도 없겠죠.”
“저 여자야!”
갑자기 나타난 클로에의 말을 끊듯이, 【사이코】의 수장인 남자가 외쳤다.
“저 여자가 시킨 거라고! 그 명단이랑 계획을 둔 것도, 여기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애초에 각성약의 거래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여기에 히어로가 찾아올 테니 그 히어로를 붙잡으라는 말 밖에 못 들었고! 어차피 총은 듣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들었어! 죽일 생각도 없었다고!!”
횡성수설 외치는 남자의 말에 클로에가 눈썹을 찌푸리고, 스페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뭐 때문에?”
“당신을 생포하기 위해서.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돌려보내드릴 테니 안심해주시고 저를 따라와주세요.”
“지랄.”
파앗-!
스페이드는 예비동작도 없이, 단숨에 클로에를 향해 달려들었다. 꽤 떨어져있던 거리였지만, 스페이드의 각력은 그 정도 거리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순식간에 좁혀버렸다.
“순순히 들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해요.”
'그래야, 한다...? 무슨 뜻이지?'
스페이드가 노리는 것은 【점혈】. 같은 히어로인 그녀에게 폭력을 썼다가 어떤 트집이 되돌아올지 모르기에, 흠이 나지 않고 간편한 제압술인 점혈로 그녀를 단숨에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페이드가 재빠르게 내민 손은, 클로에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자 어이없게 허공을 갈랐다.
‘에......?’
“지금의 당신은 제게 이길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그런 '시나리오'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콰앙!!!!
“커흑...!!”
허공에 나타난, 쇠로 된 거인의 팔이 스페이드의 자그마한 몸을 내리쳐, 짓눌렀다.
묵직한 주먹과 바닥 사이에 낀 스페이드는, 단 일격에 꼼짝도 못하고 무력화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