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52 히어로 인 더 트랩(HERO in the trap)(1)
『■■■■■■■■■』
『■■■■■■■...』
‘사람이 많아....’
스페이드는 긴장하며, 천장의 배기 통로에서 몸을 웅크렸다.
지금 그녀는 어느 빌런의 아지트에 숨어 들은 상태다. 다만 단순한 빌런 조직은 아닌 것이, 아무래도 해외의 마피아들과 특수한 연줄이 있는 모양이다.
해외와의 유착관계, 거기다 빌런으로서의 위험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스페이드의 임무는 평소와는 다른 잠입임무가 되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아래에서 들려오는 뚜벅, 뚜벅, 하는 발소리를 숨어들어온 환기구 속에서 숨을 죽이고 들으면서, 스페이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 임무의 출처는 아이우스.
7번대와 【어비스】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굳이 스페이드를 지명해서 임무를 내린 것도 그렇고...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환기구 아래의 남자들이 떠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스페이드는 낮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 * *
“잠입임무...라고요?”
“네, 스페이드. 협회에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라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아뇨, 딱히 싫다는 건 아닌데요. 자주 했었던 임무고.”
【신체강화】는 단순한 능력이지만,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웬만한 히어로들도 어느정도의 신체강화는 가능하지만, 스페이드만큼 그쪽으로 스테이터스를 몰빵한 사람은 없으니, 낮은 랭크였을 때부터 이리저리 불려다녔다.
덕분에 잠입임무 경험도 적지는 않은데....
“라헤 대장? 손 놓지 않으면 자료를 받을 수가 없는데요?”
어쩐지 임무에 관련된 자료가 적힌 서류뭉치를 넘겨주질 않았다.
“......스페이드, 거절하려면 거절해도 돼요.”
“에? 아니, 조금 전엔 거절하면 안 된다면서요?”
“이 임무, 아무래도 아이우스 쪽에서 요청한 모양이에요.”
자료를 슬쩍 보니 해외 마피아 어쩌구 하는 게 보였다.
‘아이우스....’
각성자들에 대한 취급은 나라마다 다르고 절차도 복잡해서, 외국계 빌런들이 관련되어 있으면 국제협회――아이우스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람을 파견할 수도 없으니, 사전에 실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현지의 히어로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이상한 게 아니지만.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커맨더 소피아... 그녀는 상당히 수상합니다. 스페이드, 각 멤버들에게도 급한 임무가 내려와서 오늘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거절하겠다면, 나머진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최근 한국에 파견 나온 아이우스의 소피아. 13호와 마찬가지로 라헤 또한 그녀를 경계하고 있다.
“에이, 괜찮을 거예요, 라헤 대장. 할래요.”
결국 걱정하는 라헤 대장을 뿌리치고, 스페이드는 임무를 받아들였다.
* * *
‘애초에 내가 안 받아들이면 다른 애들한테 화살 날아갈지도 모르고....’
잠입임무는 자주 해봤으니,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도 도망치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아래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스페이드는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환풍구를 열고 복도로 내려섰다.
“홋.”
타닥-
여기저기 잔뜩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각종 처리가 된 잠입 전용 특수복은 그다지 더러워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상의에 가죽 반바지, 그리고 새카만 마스크. 머리는 뒤로 모아 묶은 상태의 스페이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짠내가 났다.
‘경비 자체는 허술하네. 증거가 남지 않게 하려는 걸까?’
겉보기에도 폐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엉성한 건물이었다.
외국계 마피아와 국내의 일부 빌련 조직의 주기적인 밀거래에 이용하는 곳인 모양이다. 밀거래 장소로 의심되는 곳은 여러 곳 있었으나, 아리아가 예언으로 특정해 줬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위치 말고는 제대로 보이는 게 없네요... 언니, 조심해주세요.’
아리아의 말도 있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전체적인 그림은 파악했어.’
스페이드는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며, 대강의 건물 구조와 인원 분포를 확인했다.
순찰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인원이 적은 게 다행이었다. 거기다 누군가 오더라도 1층이나 지하에서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위쪽은 감시의 눈이 거의 없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하에는 창고 같은 방들이 있었어. 열어보진 못했지만 엄중하게 락이 걸린 걸 봐선 분면 뭔가가 있는게 분명해.’
거래를 하는 물품. 연관된 조직의 정보.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각성자의 수와 조직원들의 인체개조 상태.
대충 이 정도를 알아간다면 충분할 것이다.
‘나 혼자 밖에 없으니까, 직접 부딪치는 일은 피하고 싶고.’
가능하면 문서로 된 명단 같은 걸 찾으면 제일 좋다. 디지털로 남기는 정보는 어디서 어떻게 해킹당할지 모르고, 기기 문제로 손쉽게 날아가버릴 수 있으니 중요한 정보라면 웬만해선 아날로그식으로 남겨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어딘가에 아날로그로 된 문서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 스페이드가 있는 곳은 이 건물의 최상층인 4층. 감시의 눈이 적은 2층부터 순서대로 이 잡듯이 뒤져보고 있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성과는 없었다.
정말 거래장소로만 쓰이는 걸까? 장식도 거의 없이 텅텅 빈 건물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역시 감시도 안 하는 이 윗층에 있을 리는 없겠지――.”
스페이드는 기대하지 않고 4층 안 쪽에 있던 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안 쪽에 있던, 새카만 양복의 남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딱 걸렸다.
“.........뭐, 뭐...여자?!”
“어디서 보낸 년이냐!”
한 명은 스킨헤드. 한 명은 턱수염이 멋진 선글라스 양복 남들. 마피아인지 조폭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들은 품 속에 다급하게 손을 넣었다.
총이냐!
‘소리가 나선 안 돼...!’
“후웃...!”
팟-!
“엇?!”
남자들의 시야에서 스페이드의 몸이 순식간에 둘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대로 빙그르르르르르르 몸을 돌리며,
“으쌰!”
탁-! 팟!
크게 휘두른 다리와 팔꿈치로, 남자들의 손에서 총을 떨궈냈다.
“크읏... 이 년이?!”
“년, 년, 말 꼬라지 좀 신경 써라, 응?”
퍼퍼퍽-! 쿠우우우우웅!
턱에 한 방. 이어서 명치 복부 목젖을 순식간에 연타한 스페이드는, 그대로 남자의 거구를 어깨에 들쳐메고 그대로 엎어 쳤다.
“일로 형님!!!”
남은 한 명의 남자가 스페이드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고릴라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스페이드는 태연하게 뒤로 물러서며 솥뚜껑 같은 손을 그대로 맞잡았다.
“어, 나랑 악력싸움이라도 해보자고? 응?”
스페이드는 깊게 웃더니,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으, 끄으으으으으...!”
남자는 손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에 고통스레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우렁차게 기함을 지르더니, 별안간 어깨가, 팔이, 손이 크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인체개조...!’
“야아아아아아아아아! 우습게 보지 마라 씹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말 조심하라고 했다, 빡대가리야.”
붙잡히지 않은 남은 한 손을 휘두르려는 순간.
스페이드는 그보다 더 빨리 손을 움직여, 토도도독, 검지로 남자의 몸을 수차례 가볍게 찔렀다.
남자의 몸이 굳어버린 듯 경직되더니, 그대로 천천히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는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께 되었다.
“【점혈】... 체크 언니에게 배워두길 잘했네.”
스페이드는 열심히 가르쳐 준 체크에게 감사하며 중얼거렸다.
무협지 같은 기술이 있다길래 심심해서 배운 건데,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엎어치기로 쓰러뜨린 남자도 점혈을 응용해 기절시킨 후, 스페이드는 안쪽을 둘러보았다.
“오와, 럭키.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거야?”
스페이드는 기쁘게 중얼거렸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으니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책상 위에는 A4 사이즈 클립보드에 고정된 몇 장의 종이와, 튼튼해 보이는 작은 금고가 있었다.
먼저 클립보드의 종이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명단... 조직 전원은 아닌 것 같지? 거래에 참가하는 명단...? 그런 건가?’
사람 이름이며 그 옆에 비고로 어떤 식의 육체개조를 받았는지 그런 내용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분명 큰 성과다.
스페이드는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다, 명단이 아닌 다른 것이 적힌 종이에 눈이 못 박혔다.
『비각성자의 각성화를 이루는 특수한 약』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거...!’
닥터가 개발한 ‘각성약’? 아니면 개량된 새로운 약?
아무래도 이 ‘각성약’은 해외에서 들여오는 물건인 모양이다. 【시궁쥐】나 닥터가 사용한 것과는 다르다.
이 종이에는 ‘각성약’의 효능이며 내용 등이 자세하게 적혀있었으며, 아래에 이어진 종이에서는 거래 후의 사용처 등도 적혀있었다.
‘단순한 각성약이 아니야... 일시적인 도핑효과도 추가되어서, 더 강력해질 수 있다고.’
종이에 적혀진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조직은 오늘 밤 거래를 하자마자 바로 이 각성약을 투여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 아침, 각성약으로 인한 변화가 끝나자마자 무차별 테러를 일으킬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히어로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개개인을 각자 처리하려고....’
그 정도의 세세한 계획이 적혀있었으며,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B안, C안 같은 예비 계획도 상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큰일났다...!”
스페이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무리 대장들이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희생을 막을 수가 없다. 심지어 이 자료의 내용대로라면, 각성약으로 일시적으로 도핑된 힘이면 대장급과도 맞설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이딴 멍청한 짓을...!”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스페이드는 화를 삭이며 종이를 고이 접어 허리의 벨트에 고정된 파우치에 집어넣었다.
옆에 있던 금고는 다이얼을 맞추지 않으면 열지 못하는 식이라, 마력으로 강화한 팔 힘으로 단숨에 뜯어내버렸다.
안에 들어가 있던 건 작은 유리병에 들어가 있는, 특이한 색감의 약. 적혀져 있던 대로라면 거래하기로 한 약의 샘플일 것이다.
본래라면 임무는 여기서 끝. 이제 이 자료를 가지고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스페이드는 그렇게 요령 좋은 여자가 아니다.
‘거래시간은 앞으로 15분 후랬어. 약을 교환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용할 거라고도 했고.’
거래가 끝나는 걸 기다렸다가 미행한다... 같은 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원군을 기다려야 하나? 15분 내에 올 걸 믿고?
스페이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 다들 임무가 있댔지. 그리고 15분만에 여기까지는 못 와. 가장 가까운 히어로 지부도 30분은 걸려.’
“아으, 정말....”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다.
――거래 전에 막는 수밖에.
스페이드는 비장하게 눈을 뜨고 결심을 다졌다.
* * *
‘아오, 많아...!’
몰래 숨어서 엿보는 사이, 험상궂은 인상의 양복남들이 잔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개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시커먼 셔츠며 바지로 되어 있어서, 어둠 속에서 보면 얼굴만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지금 스페이드가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은, 지하 1층 안쪽의 넓은 강당.
아무래도 이곳이 거래장소인 모양으로, 거래 시간이 가까워지자 지금까지 스페이드가 알아봤던 것 이상으로 많은 남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외국계 마피아들이 얼마나 올지는 몰라. 장비도 모르고, 어떤 식의 개조가 되어있는지도 전혀 몰라.’
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만이라면. 조금 전 자료를 가지고 나온 덕에 쪽수도 어떤 개조를 받았는지도 전부 알고 있다.
‘그러니 마피아가 오기 전에 이 놈들을 전부 때려눕힌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거래 장소에 찾아온 마피아들도 때려눕히고, 거래하려던 약도 뺏어버리면 된다. 빌런 조직과 마피아가 한 뭉텅이로 달려든다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따로따로 상대하는 거라면 가능성이 있다.
‘지금 들어가는 놈들이 마지막이야.’
들키지 않게 몸을 숨긴 채 지켜보는 사이, 두 명이 더 거래장소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보초로 선 두 명, 바깥에서 망을 보는 네 명까지 포함해 이것으로 스물 일곱 명. 리스트에 적힌 인원 수와 딱 맞는다.
“좋아...! 그럼 깽판 좀 쳐볼까...! 다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