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0화 〉#46 그리고 빌런은 우정과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1) *TS주의(참모) (190/271)



〈 190화 〉#46 그리고 빌런은 우정과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1) *TS주의(참모)

(이번편은 TS참모 에피소드 입니다. 관련 컨텐츠가 부담스러우신 분들은 스킵하셔도 스토리 이해에는 무방합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들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남자들이 하는 말일까, 여자들이 하는 말일까. 잘은 모르겠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솔직한 내 감상을 말하자면, 사치라고 밖에 들리지 않는데 말야.


그도 그럴게 여자랑은 별로 인연이 없는 인생이고, 빌런 같은 짓이나 하고 있으니 결혼 같은건 꿈도  꾸겠고, 그 이전에 결혼해 줄 여자가 없다.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결혼한 인간들은 승리자로 밖에  보인다고.


결혼  주제에 ‘결혼은 인생의 무덤’ 같은 말을 꺼내는 인간은 복권에 담청되고 ‘복권? 그거 세금이니 뭐니 완전 골치야~ 복권 같은건 안 사는게 좋아~’ 같은 말을 하는 놈으로 밖에 안 보인다.

기만자들.


결국 서로 좋고 좋아서 결혼 한 거잖아.


당신들은 어쨌든 폴인 러브할 사람을 찾은 거잖아? 사랑할 상대나 사랑해줄 상대를 찾은데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의례며 고난 등을 통과하고 골인한 거잖아? 사랑하는 아내와 이렇고 저렇고 그런 짓까지 합의하에 끝낸 거잖아?

인기 없는  같은 남자는 그런 거 꿈도 못 꾼다고!

결혼 같은거 씹인싸들만 하는 거 아냐?!

막 그런 느낌으로 아버지한테 하소연했더니 얻어맞았다. 너도 결혼해보면 알 거라면서. 결혼할 예정이 없어서 평생 모르겠네요, 아버지.

어쨌든.


그렇게 인기도 결혼할 예정도 없는 나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꿈을 꾼다.
이쁘고 나를 사랑해주는 색시와 알콩달콩한 신혼생활. 그리고 함께 두꺼운 장편 소설 20권 분량에 달하는 판타지한 시련과 극복과 일상을 보내고 사랑의 결정인 나와 아내를 반반씩 닮은 이쁜 13호군 2세를 만들고, 평화롭게 나이를 먹으며 결국엔 사랑하는 아내와 백년해로, 같은 꿈을 꾸고 있다.

황당하다고?


꿈이니까 괜찮잖아.


어쨌든.

“그렇다면 세뇌한 분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심는  어떻습니까?”

참모가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지만, 입을 콱 때려줬다.


그건 뭔가 진짜로 끝장난 느낌이잖아.

너는 여자랑 사귀려면,


1. 범죄를 저지른다.


2. 약물로 세뇌한다.

3. 포기한다.

이런 선택지 밖에 없는 것 같잖아.


끝장이잖아 그거.

나한테 왜 이러냐고.


꿈도 희망도 없는 거냐고.


“아리아 양이나 애플 양도 13호님에게 어느정도 호의가 있는 모양인데요....”

“그 녀석들도 세뇌 때문에 생긴 감정이잖아. 아무 것도 없으면 나 같은  좋아해 줄 리도 없고.”


“그건 아닌 것 같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쓸데없는 희망을 주지마. 항상 여자란 존재는 내 기대와 희망을 배신했으니까. 닳고 닳아버린 내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순진하게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


그 뒤 참모는 다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말하지만, 어쨌든.

갑작스레 결혼에 대해서 재잘재잘 떠들어 봤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본론에 들어간다.




딴딴따단~♪ 따다단~♪

『그럼 식의 진행을 계속 하겠습니다.』


『신랑 13호, 앞으로.』

이건 행복한 결혼의 풍경.

잔뜩 늘어선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턱시도를 입은 나를 성대하게 축하해주고 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나아가는 내 눈 앞에는, 내게서 등을 돌린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서있다.


꿈이라는 걸 이해했지만.

아, 나도 결혼을 하는 거구나 싶어 들떠있었다.

신부가 나를 돌아본다.


나는 신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반짝이는 은색 머릿결. 설국의 요정 같은 색소가 옅은 눈동자. 가녀린 팔다리에 청초한 느낌의 이목구비.


정확하게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상대.

그녀는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다소곳하게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약지에는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자,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키스를.』


아아, 이 여자가  아내가 되는 거구나.


...행복해!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조심 내게 다가와, 발돋움하는 그녀.

어쩌지, 목소리까지 내 취향이다. 심금을 울린다. 행복으로 뇌에 연쇄적인 화학폭발이 일어날  같다.


“사랑해.”


“저도요.”

 사람의 입술이 겹친다. 부드러움. 달콤한 향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축하해 13호~!』

『야호~ 너도 결혼을 하는구나~.』

결혼실의 종이 울린다. 사람들의 우레 같은 박수소리와, 성대한 결혼행진곡이 우리를 축복한다.

아아,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거냐고.


영원히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그렇죠, 13호님. 저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평생을 저와 함께하시죠.”



“...........어?”

그리고 다음 순간 들려온 건, 굵직한 남자 목소리.


내  앞에 있던 이상형의 여성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곳에 있는 건, 늘씬하게 턱시도를 빼입은, 나보다도 키가  참모의 모습.
웨딩드레스의 이상형은 사라졌다. 그러나 대신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13호님. 13호님의 참모로서, 제 평생 당신을 모시겠습니다...남편으로써 말이죠. 후훗.”

참모는 안경 아래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다시 한번 키스하기 위해 내게 얼굴을――




* * *




“끄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온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온몸의 땀샘이 열리고 식은땀이 벌컥벌컥 흘렀다.

“겨, 결혼.. 아니지?! 나 아직 결혼한 게 아니지?! 웨, 웨딩드레스... 옷은... 아니야...! 하아아아아아... 다행이다아.....”


나는 드레스 차림도 아니고, 약지에 반지도 없었다.


아닌거지? 진짜 아닌거지?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 * *

빌런조직 【어비스】는 영광을 누리던 과거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작아졌다. 지금은 나를 포함한 간부 넷만이 남아있는 채다.

그래도 남자 둘, 여자 둘로 꽤 괜찮은 비율이었는데....


“어머나, 13호님.  그래도 깨우러  참이었는데.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반짝이는 은발에, 가녀린 팔다리, 색소가 옅은 눈, 청초한 분위기의 소녀스러운 여성.

비척비척 복도로 나오니, 참모가 잘됐다는 듯이 나타났다. 앞치마에 국자를 들고 있는, 어딘가의 새댁 같은 모습이다.

“아, 응.... 오늘은 참모 당번이었나.”


“후후, 따뜻한 누룽지에 젓갈을 조금 내왔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심플한 쪽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맞다.  내가 바라던 아침식사다.


평소라면 역시 참모라며 고마워 했을 텐데.

“13호님, 저기, 안색이 안 좋아보이십니다만....”

참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 청초한 얼굴을 보고, 나는 저도 모르게.

“히익?!”


기성을 지르며 도망치듯 뒤로 물러났다.


“................어... 13호... 님?”

“아, 아니. 이건. 그게, 따, 땀 때문에 젖어서! 냄새도 나고!”


“저한테 그런  신경  쓰셔도 되는데....”


“지금은 참모도 여자잖아! 신경 써야지! 그보다 누룽지라고? 아~ 배고프다! 배고파서 먼저 갈게 참모!”

“앗. 13호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재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여자로 변한 참모와는, 아직은 이렇듯 싱숭생숭한 분위기다.






“Hey, hey, 13호 씨. 당신 잠깐  좀 볼래요?”


대충 점심시간이  때 즈음, 아지트의 카페테리아에서 <배달 업체의 성실함을 시험하기 위한 스탑워치 측정 계획>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데, 별안간 클럽이 엄격한 얼굴로 찾아왔다.


 녀석이 나를 직접 찾는 일은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이람.


“무슨 일이야? 난 지금 배달 동선을 꼬기 위한 교통량 통제 결과를 계산하느라 바쁜데.”


“무슨 그런 한가한 짓거리를....”

“후후, 이것으로 배달업체들도 빌런의 무서움을 알게되겠지.”


“한심함은 알게 되겠죠. 그건 됐고요, 그보다 요즘 13호 씨, 태도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내 태도가?

“딱히... 아, 좀 더 야한 짓 해달라고?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저 말고, 참모 씨한테 말이에요.”


“.......”


“참모 씨가 저한테 상담하러 왔어요. 요즘 13호 씨가 참모 씨를 괴롭히고 있다면서요.”

“괴롭힌 적 없어?!”

“아이 참,  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서는, 싸우기라도 한거면 빨리 화해하세요. 침울해져서는 죽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요. 아무리 적이라지만, 저런 우중충한 얼굴 하고 있으면 저도 불편하다고요.”


팔랑팔랑한 하녀복 차림의 클럽은 성가시다는 듯 툭툭 내뱉었다.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그래도 역시 참모가 그렇게 침울해졌다면 미안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쪽도 지금 잔뜩 고민하고 있다고.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건가요, 13호 씨도.”


“으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자니, 클럽은 마음에  든다는  흘겨봤다.

그리고는 한숨.


“어쩔 수 없네요.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게요.”

“...진짜? 나 빌런인데?”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도 히어로의 일이니까요. 됐으니까 말이나 해보세요.”

천사님이 강림한 줄 알았다.


좋은 여자구나, 클럽.




* * *



참모는 【어비스】의 힘든 시기도 함께 버텨 준, 소중한 동료다.

동시에 취미며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

워낙 마음이 맞고 남자들끼리만 털어놓을 수 있는 이런저런 얘기며 고민들을 서로 나누다 보니, ‘상대가 여자가 되면 천생연분으로 맺어질 수 있겠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한 적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참모는 진짜로 여자가 되어버렸고.


심지어  취향에 너무 딱 맞다.


“아무리 내가 개차반에 쓰레기 빌런이라지만, 도저히 친구를 상대로 그런 눈으로 볼 수는 없다고... 그래선 안 될 것 같다고 할까....”


“흐응... 13호 씨, 이 커피 좀 쓴데 설탕이랑 우유 좀 주실래요.”


“응. 여기.”

“과자도요. 커피는 내놓고 다과는 없다니, 서비스가 엉망이잖아요.”

“미안. 자, 여기 쿠키.”

“스톱. 13호 씨가 숨겨 놓은 비장의 과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전 오늘 그걸 먹고 싶어요.”


“끄응... 누구한테 들킨 거지... 어쩔 수 없네....”


나는 선반에서 프리미엄마저 붙은 비싼 과자를 꺼냈다.


“――아니, 상담해주는  아니었냐고!”

“...그게, 이야기가 하도 시시해서....”

“시시하다고 하지 마! 초코파이보다 연약한 내 마음에 상처가 되잖아! 그보다 그렇게 말할 거면 들어준다고 하질 말든가!”

“워워, 진정해요 13호 씨. 어쩌겠어요, 이제 곧 30대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우정담 같은 건 댁네 보스와 아리아가 보는 BL물 말고는 수요가 없다고요.”

“아리아도 본다고?”

“Yes. 진성 BL녀죠, 아리아 씨는.”

“우와....”


“최근 댁네 보스랑 함께 집필 작업을 하는 것 같던데요.”

“왠지 요즘 둘이 자주 만나더라!”

그런 뒷얘기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내 고민담에서 어쩌다 이쪽으로 대화가 흘러온거지.


클럽은 커피를 쪼록 들이키고는, 내가 내온 프리미엄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커피를 주욱 들이키고는, 만족한 듯이 “후우~”하고 숨을 내쉬었다.

“뭐, 굳이 상담을 해드리자면, 13호씨는 참 쓸데 없는 고민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쓸데없다니, 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거든?”


안 그래도 마음이 맞는 참모가, 하필이면  이상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이대로 반해버리기라도 할까봐 무섭다고, 나는.

그 녀석도 친구나 다름없는 내가 자기를 더는 남자로 봐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


“Fucking idiot! 쓸데없는 고민이에요. 그도 그럴게, 혼자서 불편하다고 피하거나 하면 상대한테 상처가 되잖아요. 문제는 조금도 해결이 안 되고, 미뤄지기만 하죠. 그 정도 생각도 못 하는 건가요.”

클럽의 어조는 평탄했지만, 약간 비난의 목소리가 서려있었다.

확실히 클럽의 말대로면, 참모는 지금 나한테 무시당해 침울해진 상태라고 했다.


“Talk. 어릴 때야 표현하는 법이 부족하니까 그렇다고 쳐도, 나이는 먹을대로 먹은 인간이 뭐하는 건가요.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좀 거리를 두자, 이 정도는 말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무엇이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당신이든 참모 씨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냥 미뤄두려고 하기만 하다니, 한심함을 넘어서 최악이에요!”

처억! 손가락을 들이밀며 설교하는 클럽.


나는 허를 찔려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떴다.

나보다  살은 어린 여자애한테 이런 소릴 듣고 있다니 부끄럽네.


“나참, 그리고 그런 걸로 고민할 거면 그냥 둘이 섹스라도 하면 되잖아요. 깔끔하게. 딱 들어보니까 여자인 참모한테 발정났다는 얘기구먼.”

“너 임마! 그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그딴 소리 하는  아냐!”

“흥. 뭐, 13호씨는 쓰레기인 주제에 은근 쫄보니까요. ...어쨌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받아들이지 못해도 좋고, 순응하려면 그래도 좋아요. 하지만 대화는 피하지 마세요. 기본이잖아요.”


“...알겠어, 알겠다고. ...참모랑은 대화를 좀 해봐야겠네.”

“뭐, 이번에 한해 그럴 필요는 없어요.”

클럽이 딱, 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그러자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꾸물꾸물 고개를 들이미는 인물이 있었다.

찰랑이는 은발. 가녀린 어깨.


참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들어온 것이다.

“참모?! 너, 듣고 있었....”

“죄송합니다, 13호님. 13호님에게 거부당하는 게 너무 상처였던지라... 그만 이런 부끄러운 방법을....”

“제 【감각동조】로 청각을 공유하고 있었어요. 얘기는 다 들었으니까, 이제 나머지는 둘이서 알아서 매듭을 지으세요.”

클럽 이 녀석, 쓸데없는 짓을...!

조금쯤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줄 것이지....

“참모,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그게....”

“13호님은, 저를 여자로 보고 계시다는 거군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겁다.

나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완전히 여자라는  아니라, 그게... 갈팡질팡한다고 할까... 그런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참모!”


“――전 좋습니다, 13호님!”

그러나 음울해보이던 분위기는 거짓말이라는 듯, 참모는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탕! 테이블을 두드리며 얼굴을 불쑥 가까이 가져왔다.

오, 와, 와앗. 가까워!

“이 참모, 그 옛날 13호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시고 삶의 의미를 주셨던 그 날부터, 줄곧 13호님의 것이기만을 바랬습니다! 친구나 부하로서 13호님의 곁에 있는 것도 좋았지만, 여자로서 13호님을 만족시켜드리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13호님께서 바라주신다면 저는 얼마든지 여자이고 싶습니다!!!”

이쪽의 영혼을 뒤흔들 듯.


참모의 열의가 넘치는 외침은,  심금을 울렸다.

정말 나는 참모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도움을 받았고, 솔직히 항상 빚진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주다니...!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저를 묶고 때리고 채찍질하면서 범해주세요! 마조돼지라고 욕해주세요! 아아, 드디어 스스로 암퇘지로 타락할 수 있다니... 이런 기대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참모의 말에  식어버렸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군침을 흘리며 기대하는 눈빛의 참모.


이 마조변태녀석.

“안 해 그런 거!”

“안 해주시나요?! 너무해?!”

“난 사디스트 같은 거 안 좋아한다고! 순애를 좋아하는 순정파 로맨스남이란 말이다!”

“...Fuck. 어느 입으로 그딴 말을 하는 건가요. 자기가 한 일을 기억도 못하는 생선대가리 수준의 기억력 밖에 없는 건가요.”


옆에서 클럽의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에잇! 그런 거에니까 아직은 보류! 참모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하겠어! 너도 갑자기 여자취급 당하면 기분이  좋을 거 아냐!”

“13호님께서 여자로 대해주신다면  행복할 따름입니다! 아니, 전 이미 영혼 깊은곳까지 암퇘지니, 얼마든지 때리고 범하고 욕하면서 ‘이 천박한 마조돼지년! 본성을 드러내!’ 같은 말로 저를 매도하셔도 좋습니다! 13호님의 특수한 취향에도 얼마든지 맞춰드리겠습니다!”


“난 그런 취향은 없다고!”

“에에잇! 고집붙통!”

다음 순간.


참모는 손을 뻗어,  뺨을 꽉 잡아 고정했다.


“엇......?!”


참모의 보석 같은  눈과, 눈이 마주친다.


색소가 옅었던 참모의 눈은, 지금은 피처럼 붉은 빛으로 변해있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돌처럼 굳어버린 것처럼.

눈 앞이 어질어질하고,  앞의 참모에게 영혼째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정신이 이상해진다.


눈 앞의 참모가... 갑자기 사랑스러워져, 견딜 수가 없다.


“후후, 여자의 몸이 된 뒤로 마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매료】도 가능해졌습니다, 13호님...!”

이어서 옆에서 지켜보던 클럽이, 준비되었다는 듯 약품을 적신 손수건을 내 입과 코에 가져다 댔다.

클럽의 눈은 빛을 잃은 것이,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상정하고 참모가 암시를 걸어둔 게 분명했다.


내 입과 코를 덮은 손수건에서는 익숙한 달콤한 세뇌약의 냄새가 났다.

【매료】와 세뇌의 콤보.

도로시와 애플의 도움을 받아 세뇌에 나름 저항력이 있던 나였지만, 이것에만큼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내 의식은 단번에 어둠속으로 떨어져버렸다.

“괜찮아요, 13호님. 전부 제게 맡겨주세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이,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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