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43 대장님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1)
7번대의 대장, 라헤.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 규격 외의 능력까지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대인관계에서 약간 딱딱한 징조가 보이나 친근한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큰 트러블도 없이, 출세가도를 당당하게 걷고 있는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7번대가 맡고 있는 S시는 넓이도 넓이지만, 무엇보다 국가의 중심에 해당하는 중요한 도시다. 그런 히어로부대를 맡은 것으로 모자라 대장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동료들의 질투를 받고 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지금까지의 공로, 그리고 차가운 빙설 여왕 같은 아름다운 외모까지 맞물려 어느 누구도 해코지 못하는 것이 바로 라헤였다.
‘하아... 재난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그녀도 실패할 때는 있었고.
과거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쓰디쓴 경험에, 지금 라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닥터에게 조종된데다, 폭주하는 바람에 실에다 부하들까지 다치게 하고....”
만약 그 빌런이 멈춰주지 않았다면, 자신의 손으로 부하들을 숙청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 끔찍해서, 라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뭐해~ 라헤~?”
“아, 실....”
복도 저편에서 자신을 발견한 실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사건이 있은 뒤로 며칠, 실은 이미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상태다.
라헤는 그런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4번대의 대장. 능력은 【시간조작】. 컬이 들어간 구불구불한 긴 흑발과 한쪽 눈에 보이는 시계판 같은 문양. 화려한 외모와 자유분방한 언동 때문에 이래저래 눈에 띄는 동기.
“뭐야, 아직도 꽁해있는 거야? 그 빌런한테 져버린 걸로?”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니, 그것도 조금은 있지만.”
무엇보다 라헤를 침울하게 만든 건, 그녀가 패배를 맛봤다는 것.
꼼수도 잔꾀도 아닌, 풀파워의 그녀를 멋지게 거꾸러뜨린 빌런의 능력은 확실히 위험했다.
“뭐, 그때는 내가 능력으로 돌려놓았던 덕분이고~ 원래라면 죽었다 깨나도 우리 라헤를 이길 수 없지이~.”
“글쎄요... 만약 저 빌런이 언제가 힘을 되찾기라도 하면 막을 사람이 있을까요....”
“총대장님이면 가능할지도 모르고?”
“어쨌든 보고서는 올렸으니까요. 이것으로 【어비스】에 대해 위험레벨을 올려주면 좋겠네요.”
덤으로 세뇌로 인해 적의 수족이 되어버린 이 사태도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 그 보고서? 뭔가 빡빡하게 적혀있더라.”
“이번 사태가 벌어진 원인부터 저희가 취약한 부분이라던가, 【어비스】의 위험성이라던가 제 실태라던가 고스란히 적었을 뿐인데 41장짜리 보고서가 되어버려서....”
“태워버렸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좀 더 나은 히어로활동이――뭐?”
“태워버렸다구. 하여간, 라헤는 지나치게 고지식하다니까. 딱딱하다고 해야되나.”
“무, 무,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골빈 양아치가!
남의 보고서에!
그거 쓰느라 손가락이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히힛.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거야 잘만 설명하면 돼. 굳이 적나라하게 실패담 같은 거 적을 필요 없다구. 안 그래도 질투와 시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몸인데, 그런 빌미를 주는 건 NG야.”
“그렇더래도...!”
“그리고 라헤 너도 세뇌당했던 거잖아? 그런 네가 쓴 보고서를, 너는 믿을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빌런의 세뇌 아래에 있는 자신이, 정말 빌런에게 불리해질 보고서를 썼을까?
자신의 기억은 Yes라고 외치지만, 이 기억이 믿을만한 건지는....
“아무튼 개선이 좀 있도록 내가 적당히 쓴 보고서를 남겨뒀으니까, 라헤는 걱정말고 돌아갈 것!”
한없이 가볍지만 믿음직한 동료다. 라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실. 그러고 보니 퇴직건은 어떻게 됐나요.”
이번 사태로 라헤가 침울해진 또 다른 원인이다.
절친한 친구이자 믿음직한 동기가 퇴직을 선언한 것이다.
“일단 신청은 해뒀어. 각성자, 거기다 대장급이니까 퇴직하는 데도 고생이더라.”
“당신 한 사람이 100명의 범죄자나 10대의 탱크보다 무서우니까요.”
“하여간. 사람을 병기 취급하는 건 그만해줬으면 하는데.”
실은 투룰 거렸다.
“한 2개월쯤? 인수인계라던가 정리에 들어가고, 그 뒤엔 새로운 대장이 정해질 때까지는 벨이 임시 대장이 되겠지. 최고참이니까.”
“...히어로를 그만두면, 뭘 할 건가요.”
“글쎄. 빌런이나 해볼까?”
라헤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농담농담, 이라며 실이 서둘러 손을 저었다.
“이번 일로 내 능력이 좀 더 개화했거든. ...자유롭게 시공간을 돌아다니면서 유유자적 여행이나 떠날까 생각중이야.”
“시공간 여행... 터무니 없네요.”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작게 중얼거린 말에 라헤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2개월 동안은 볼 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질리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와서 다시 대장노릇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쉽게... 아니, 당신 능력이면 뭐, 불가능한 일도 아니네요.”
“그렇지! 이 몸 최강! 히힛!”
“싸우는 것 밖에 못하는 저보다야 훨씬 낫죠.”
어쨌든 절친한 동기는 앞길을 정한 것 같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만도 없으니, 자신도 퇴직 후의 일을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게 좋으려나.
타고난 머리로 자격도 이래저래 따놨으니, 협회의 경리 같은 것을 맡는 것도....
“이만 가볼텐데, 메르 봤어? 인사를 못했는데.”
“아까 잠깐 봤어요. 뭔가 바빠 보이던데요. 무슨 빌런 조직을 쫓고 다닌데요.”
“그 애도 바쁘구나~ 나중에 놀려주러 가야지~.”
“꾸깃꾸깃 구겨지고 싶은게 아니라면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제야 용건이 끝났다는 듯, 실은 바이바이~ 하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라헤~. 슬쩍 훔쳐봤는데 그 속옷 참 예쁘다~ 언제든 보여줘도 되겠는걸!”
“......!”
그런데 능력 낭비하지 말라고!
* * *
“하여간 그 애는....”
하여간 장난기가 심하고, 매사에 설렁설렁이고...
그래도 의외로 엄격해서, 사이가 나빴던 메르와의 관계에서도 좋은 중간다리 역할을 해줬었다.
그런 절친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외로운 기분도 든다.
뭐,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친구의 앞길을 축복해줘야지.
‘그보다는 오늘 있을 회의야.’
지금 라헤는 7번대의 기지로 돌아와 있다.
오늘은 정규 미팅이 있는 날이다. 협회의 상관이 직접 기지에 찾아와 히어로의 실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현 상황과 문제점, 개선점들을 직접 토의한다.
오늘 라헤는 이 미팅에서 【어비스】에 대해 진언하려 한다.
아마 그 빌런은 이 미팅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교묘하게 정보를 숨겨놨으니, 알 턱이 없다.
실이 보고서를 올렸다고는 해도, 아직 그 실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직접 이 눈으로 보고, 자신이 실각할 것까지 각오하고, 라헤는 현 실태와 【어비스】의 위험도를 확실히 전달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고지식한 걸까요....”
쓰게 웃었지만, 어쩔 수 없다.
부하들을 위해서도, 이 한 몸을 희생하는 정도야 우습다.
‘정의’를 지킬 수 없다면, 자신이 대장으로 설 의미가 없다.
“어머나, 대장 일찍 오셨네요.”
기지로 돌아오니, 붉은 단발머리의 부하가 맞아주었다.
스페이드, 그 이름대로 뺨에 커다란 스페이드 문양이 있는, 성실하고 정의감 넘치는 부하.
“네, 스페이드. 별 문제는 없나요?”
“예. 평화로워요. 그... 특별한 호출도 없었고요.”
호출이란 【어비스】 측에서 부르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7번대는 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어필을 위해, 7번대의 멤버 중 일부만을 그날그날 부르거나 한다.
불려간 부하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는....
라헤는 밀려오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회의를 통해, 한 방 먹여줄 수 있을테니.
어디 마음껏 즐겨봐라, 빌런. 그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는 것을 차분히 감상해주마.
“사령관님이 벌써 와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네? 어... 들은 게 없는데요.”
“그런가요... 오늘은 사령관님과 회의가 있으니까, 회의실 근처로는 오지 말아주세요. 무엇보다 그 빌런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또각, 또각, 라헤는 힐굽을 울리며 회의실로 향했다.
뒤에 남겨진 스페이드는,
“...? 오늘 회의 같은 게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라헤의 뒤를 쳐다보았다.
“들어가겠습니다.”
“오오, 어서 오게, 라헤 대장.”
똑똑, 노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사령관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 대장을 맡은 자신의 직속 상관. 존경할만한 ‘정의’의 대변자.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냐아냐. 원래 시간보다 일찍 와버린 내 잘못이지.”
너그러운 말투와 함께 말하는 사령관의 모습에, 라헤는 마음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어쩐지... 저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할까.
흐지부지되려는 긴장을 다 잡고, 라헤는 서둘러 회의의 준비를 마쳤다. 애플에게 지시해 커피를 타오도록 시켰다. 아침에 본부에 가기 전부터 준비를 대강 끝내놨기 때문에, 간단한 정리 후에 바로 회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음, 향이 좋은 걸, 이 커피.”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애플이 나가고, 라헤는 손에 든 자료를 들어올렸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3호 사령관님’.”
“그래, 언제든 시작하게.”
13호 사령관의 너그러운 목소리와 함께, 라헤는 낭랑한 목소리로 정리해둔 안건을 읊었다.
좋았어.
오늘의 회의로, 【어비스】를 반드시 끝장을 내주고 말겠어...!
* * *
――‘말해봐라, 떠올려 봐. 너는, 누구였지...?’
――‘저는... 히어로협회 7번대의 대장... 라헤입니다....’
――‘그럼 나는 누구지?’
――‘빌런 조직 【어비스】의 빌런... 13호....’
――‘아니, 틀렸어.’
――‘에...?’
――‘내가 빌런이라는 사실은 잊어라, 라헤.’
――‘어, 그럼....’
――‘라헤, 나는 네 상관이다.’
――‘......?’
――‘네 직속 상관은 누구지?’
――‘사령관님... 그 다음은 총대장님...이십니다.’
――‘그래, 나는 히어로협회의 13호 사령관이다.’
――‘사령관....’
――‘그래, 복창해라. 나는 네 상관이고, 너는 내 부하... 나도 히어로다... 알겠지?’
――‘13호님은 히어로... 사령관님....’
――‘너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알겠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
――‘그래. 대장인 네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부하들이 따라오지 않으니까. 현장에서 명령체계가 흐트러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어떤 요구도, 어떤 명령도, 너는 의심하지 않고 복종한다... 상관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겠지?’
――‘알겠, 습니다....’
* * *
“일단 7번대의 현 문제점과 취약성입니다. 사령관님이 요구하셨던 비밀 암호문도 자료에 기재해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라헤는 성실하게 회의를 진행해나갔다.
【어비스】에 대한 안건도 전해야하지만, 정기 회의인 만큼 그 외의 것들도 이야기 할 것은 많았다.
“그 외에도 요청하셨던 기밀자료의 건입니다.”
“호오, 잔뜩 있군.”
“제 권한으로 가져올 수 있는 자료들은 전부 가져왔습니다.”
히어로협회의 취약성, 각 구성원의 능력과 배치 등, 빌런에게 넘어간다면 지부 몇 개 정도는 하룻밤만에 궤멸당할지도 모르는 자료들이다. 취급에 몇 배는 주의해야한다.
뭐, 사령관님도 열람 권한이 있고, 걱정할 만에 하나의 일은 없겠지만.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이쪽 자료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겠나?”
“예. 그러니까 이건 인접한 5번대의 순찰 루트입니다만――”
성실한 설명에 13호 사령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칭찬했다.
“설명이 아주 자세하고, 이해도 잘 돼. 7번대의 대장은 유능하군.”
“감사합니다.”
칭찬받았다....
존경하는 사령관에게 칭찬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목소리 때문인지 라헤는 살짝 들뜬 기분이 되었다.
13호는 커피잔을 입가에 기울이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조금 식어서 그런가. 쓰군.”
“아, 부하에게 시켜서 설탕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냐, 우유면 돼.”
“그렇다며 우유로――”
“가져오게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여기 있는데.”
사령관의 말에 라헤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 회의실에 우유는 없는데.
“거기에 있지 않나.”
사령관이 척, 검지로 가리킨 것을 보고, 라헤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손가락 끝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저기....”
“그 모성이 넘치는 가슴에서, 우유가 나온다고 들었는데?”
라헤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그게....
뭔가 변명하려는 말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 복종해야한다.
조금 부끄러운 정도야....
“알겠습니다....”
라헤는 자료를 내려놓고, 금색 자수가 들어간 히어로제복 상의의 끈을 풀었다.
상의 앞을 젖히자, 분홍색 브라에 감싸인 풍만한 유방이 드러났다. 라헤는 브라를 풀어, 출렁이는 가슴을 드러냈다.
“자, 여기 있네.”
13호 사령관이 책상 위의 커피잔을 톡톡 두드렸다. 라헤는 잔 위에 가슴의 끝을 가져다대고, 가볍게 주물렀다.
‘응....’
존경하는 상관 앞에서 가슴을 드러낸 수치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한껏 민감해진 가슴 때문일까.
라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슴 끝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고,
퓨웃....
유두에서, 새하얀 액체가 솟아나와 커피 안에 스며들었다.
라헤는 혹시 몰라 모유를 몇 번 더 쏟아내고는, 커피를 슬쩍 밀었다.
“추, 충분하십니까...?”
“흠, 맛있군. 좋은 모유야....”
우유가 첨가된 커피를 홀짝인 13호는, 잔을 내려놓고 라헤의 유두 끝에 맺힌 모유를 손가락으로 떠서, 입 안으로 가져왔다.
아... 내 모유를... 마시고 있어....
“시, 실례했습니다. 회의를 계속하겠습니다.”
잠시 멍해졌지만, 라헤는 서둘러 옷을 정돈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상관의 명령이고, 이 정도야 전혀 이상할 게 없는데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 라헤를, 13호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