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42 그리고 빌런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고 합니다(임시)(4)
혼란스러운 의식 속에, 라헤는 경악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묵직한 주먹에 맞아 날아갔다는 것도, 자신을 날려보낸 게 13호라는 것도 믿기가 어려웠다.
상대는 강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히어로보다, 빌런보다도 강하다고 느껴졌다.
그래봐야.
그렇더래도.
“――――!”
라헤는 말이 되지 않는 노성을 울렸다.
불의의 일격에 후들거리던 몸도 금방 활력을 되찾았다.
【천칭자리】의 능력.
상대와 균형을 맞추며, ‘절대로 지지 않는’, 말 그대로 【불패】의 그녀 앞에서,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상관 없었다.
차가운 냉기가 솟아오른다. 라헤가 손을 까닥들어보이자, 멀찍이 서있는 13호를 향해 쩌저저적- 얼음의 길이 생겨났다. 13호의 발도, 솟아난 얼음에 파묻혀 속박한다.
“하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가속.
라헤의 몸이 얼음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레일 위에 오른 탄환처럼 힘차게 약진한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돌진의 기세를 이용해 13호의 몸을 단숨에 양단하고자 짐승의 송곳니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챙-!
겹쳐지는 건 한순간.
오랜 경험을 통해 확신한, 필살의 일격. 불패의 참격.
그러나 잘려나간 건 13호의 몸이 아니라――꺾이고 부러진 라헤의 도신이었다.
“아니...?!”
13호의 손에 들린 건 한자루의 검. 그쪽도 라헤의 일격을 버티지 못한 것인지 뚜욱 부러져 내렸다. 그러나 13호는 상처 하나 없다.
그런데 별안간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거기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날붙이는 위험하잖아, 이 아가씨야.”
발밑의 구속은 어디로 갔는지, 라헤의 눈앞에 13호가 다가와 있었다.
“크으...!”
마력으로 강화된 13호의 단단한 팔이, 사지가, 그녀를 붙잡고자 휘둘러지고 내질러졌다. 라헤는 당황하지 않고 13호의 손을 피해내거나 쳐내며, 오히려 틈을 찾아 급소를 노리고 손을 날렸다.
길고 쭉 뻗은, 낭창낭창한 팔다리를 유연하게 움직이며, 재빠르게 그러면서도 정교하게 노려 쏘는 그녀의 일격은, 비록 맨손이어도 충분히 사람을 부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듯, 13호의 팔이, 다리가, 모든 것을 물 흐르듯 밀쳐내버렸다. 13호의 급소를 꿰뚫고자 내찔러진 손목이, 반대로 붙잡혀 비틀어 올려졌다. 이쪽의 빈틈을 노리고 13호가 내민 팔을 막아냈다 싶으면, 이번엔 그 팔이 독특한 움직임을 보이며 자신의 허를 찌르고 그대로 휘감듯 올라왔다.
“말도 안 돼...!”
가슴께를 잡히기 직전, 라헤는 13호의 배를 발로 차 억지로 거리를 벌렸다. 당황과 경악이 그녀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의 기술은 히어로이자 대장으로서, 재능과 경험과 효율적인 훈련을 통해 잘 다져진 것이다.
그러나, 13호의 것은.
“아.....!”
“흐랴앗!”
의식이 잠깐 느슨해져 버렸다. 그 틈을 타, 어느샌가 13호가 따라 붙었다.
얼빠진 기합성과 함께 가드의 틈새를 뚫고 들어온 13호의 장저타에, 명치를 얻어맞고 공중에 몸이 부웅 떴다.
푹 꺽인 채 경직된 시야 속에, 13호의 다른 한쪽 손이 들려 올라가는 것이, 그리고 묵직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아, 그렇다, 이것은.
퍼-엉!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러진 13호의 손바닥이, 들려올라간 라헤의 등을, 옆구리를 내리쳤다. 타격점에 닿는 순간 터져나간 마력의 여파로, 라헤의 몸이 조금 전과 같이 저멀리 날아가버렸다.
쿵! 우지끈! 촤아아아아앗!!
소나무 숲을 뚫고, 이번에는 폭포가 흐르는 시냇가에 처박혔다.
꼬르르륵... 깊은 시내 한복판에, 라헤의 몸이 무겁게 잠겼다.
이것 참.
라헤는 체념의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13호의 저건, 자신의 것보다도 다져지고, 부동이며, 흠 잡을 데 없이 섬세하고, 무엇보다 호쾌하며, 단단한 거목과도 같은, 완성된 체술이자, 기술이었다.
촤아앗-
푹 젖은 라헤의 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때, 라헤. 이제 머리가 좀 식었어?”
“......글쎄요.”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 계속 할 거면 콱 가슴 만져버린다?”
“...이제껏 수도 없이 주물렀으면서 뭘.”
“후, 가슴 주무르기의 길은 끝이 없어. 넌 아직 진정한 공포를 모른다고.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슴 주무르기를 보여주겠어.”
“역시 저질이군요, 13호. 빌런다워요.”
“빌런의 귀감이자 최강최악의 빌런이 나야. 알아줘서 고마워.”
“......”
라헤는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최악인 건 둘째치고... 지금만큼은 최강인 걸 인정해드리죠. 음... 실의 능력으로 되돌린 건가요.”
라헤는 13호의 프로필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고자리】... 히어로와 빌런, 그 외에 지금까지 발견된 여느 각성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죠. 정상적인 방법으로 각성해서는 손에 넣을 수 없을 능력이기도 하고요.”
어느 신화의, 수 많은 영웅들을 태운 배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알고 있으면 항복해. 지금 너, 상태도 안 좋아보이는데.”
“그렇네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에요.”
라헤는 한탄하듯 말했다.
“머리는 흐리멍덩하고, 몸은 뜨겁고, 이성과 본능이 섞여서 뒤죽박죽... 당장에라도 날뛰라고, 죽을 때까지 죽이라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여요. 벌레가 머릿속을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네요. 솔직히 몸에 힘도 안 들어가요. 후들후들 떨려요, 팔다리가.”
당연하지만 닥터가 세뇌하는 상대에게 이것저것 세심하게 신경 써줄리도 없었다.
건강이며 효율을 생각해 필요한 영양분은 주입해주었지만, 억지로 세뇌하기 위해 혹사당한 뇌나, 이래저래 억지로 휘둘려진 신체는 말 그대로 최악의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즉, 베스트 컨디션이란 겁니다.”
라헤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도대체 어디가.
13호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억척스레 자세를 잡는 라헤에게 대항하기 위해 본인도 자세를 잡았다.
한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와버렸다.
“진짜 멋진 여자네. 반해버릴 것 같잖아. 그러니까 가슴 만지게 해주라. 아니, 반드시 만져주겠어, 가슴.”
이렇게, 주물주물하고.
“부탁이니까 죽어주세요, 그냥.”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음 순간.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라헤가 빠져있던 시내가, 물을 쏟아내던 폭포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
급격하게 불어오는 냉기에 13호가 경계하자니, 라헤는 시내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13호에게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동시에 라헤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13호를 노리고 사출되었다. 얼음송곳의 뒤를 따라 달려나가는 라헤의 양손에는, 부서진 검 대신 얼음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얼음 검이 들려있었다.
빌런과 히어로의 싸움이 다시금 재개되었다.
* * *
라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13호의 상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실은 마지막 마력을 쥐어짜내, 13호의 몸에 【시간조작】을 사용했다.
일전 축제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실은 대상의 육체의 시간을 조작해 다치기 전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것을 응용해 13호의 몸의 시간을, 전성기였던 그 시절로 돌려보낸 것이다.
별자리가 괜한 변덕을 부리기 전.
말 그대로 최강최악이던 그 시절의 13호로.
그러나 돌려보낸 건 13호의 육체뿐, 현재의 별자리는 여전히 그 상태다. 13호에게 마력을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가호를 내려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 13호에게 남은 것은, ‘과거의 마력’과 ‘각성자라는 사실’ 뿐이다.
지금은 몸에 마력이 가득하다지만, 이걸 다 써버려도 별자리는 다시 보충해주지 않는다.
지금 있는 걸 쓰면 끝.
말하자면 일회용.
충전기에서 뽑아낸 스마트폰 같은 상태다.
그렇기에 승부를 거는 건 단기결전.
조금이라도 빨리, 이 안에 있는 마력을 다 써버리기 전에, 라헤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저 살아남기 위해, 라헤를 제압하고자 달려나갔다.
* * *
라헤의 얼음 검이 춤추고, 얼음 송곳이 시간차를 두고 13호에게 덮쳐들었다.
챙- 채챙-!
그러나 도수공권이었을 13호는, 조금 전의 검과 같이 어느 샌가 손에 들린 무기로 날아드는 얼음 흉기들을 쳐내고, 부수고, 잘라냈다.
‘창...?’
손에 들린 것은 아름다운 장식의 창. 척 보기에도 내력이 있어보이는 물건은, 휘두르는 것만으로 얼음을 쑹덩쑹덩 손쉽게 잘라버렸다. 라헤의 두 손에 있던 얼음검도, 풍차처럼 휘둘러진 창자루에 맞아 깨어져버렸다.
그러나 깨어진 얼음 검 대신 새로운 얼음 검이, 라헤의 손에 나타났다.
검이 휘둘러진다. 깨어진다. 새로운 검이 나타난다. 부서졌다. 새로운 검이 나타난다. 날카로운 참격이 내질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치명상을 입는 날카로운 검격의 응수.
소모전과도 양산이 계속되고, 시내며 폭포마저 얼려버렸던 라헤는 그럼에도 조금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그 기세에 흉악함을 더해갔다.
라헤의 노도와도 같은 참격과 검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에 든 창이 깨어져나갔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며 라헤가 거센 찌르기에 들어갔지만,
챙-!
이번에는 새로이 나타난 단검에 막혀버렸다.
“칫......?!”
참격. 응수. 돌진. 후퇴. 빈틈. 반격.
얼음이 빛을 반사하며 흩뿌리는 청백색 검광과, 13호의 손에 들린 돌같은 단검의 빛이 이지러지며 서로 부딪쳤다.
격전이 이어질수록, 13호의 무기는 계속 바뀌어갔다. 들고 있던 단검은 어느샌가 한쌍의 손도끼로 바뀌고, 다음 순간 거대한 부검으로 바뀌었으며, 또 다음 순간에는 낫, 그리고 사슬로도 바뀌었다.
온갖 무기가 13호의 손에 나타나고, 사라진다. 익숙해져버린 움직임이 바뀌어, 새로운 무술의 형태를 자아낸다.
마치 여러명을 상대 하는 것 같은 감각에, 라헤는 초조함을 느꼈다.
13호가 은혜를 입은 별자리는 【아르고자리】.
부품이 되는 네 개의 별자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별자리. 가리키는 것은 그 옛날, 전설의 황금양의 털을 구하고자 신화 속의 온갖 전설이며 위업을 이루어낸 영웅들을 태운, ‘아르고’라는 이름의 위대한 배.
위대한 여정을 떠나는 희망에 찬 영웅들의 쾌선.
【아르고자리】의 은혜 아래 있는 한, 13호는 동서고금 그 어떤 영웅이나 용자, 현자의 온갖 힘을, 무예를, 무구를, 능력을, 특성을, 축복을 다룰 수 있지만――그 조차도 부차적인 것.
무엇보다 괄목해야할 점은, ‘영웅’이라는 점.
‘영웅’이라 함은, 어떤 상대를 앞에 두더라도 결코 지지 않을 뿐더러――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승리’를 가져온다.
이것이야말로 13호가 최강의 빌런인 이유다.
라헤가 【불패】라면.
13호는 【필승】.
라헤가 【절대로 지지 않는다】면, 13호는 그런 적을 상대여도 【반드시 승리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벌써 수십개째 만들어 낸 얼음 검을 손에 쥐고, 라헤가 노성을 터뜨리며 쇄도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분명히 자신은 강해진다. 절대로 지지 않기 위해 그녀의 별자리는 새로운 마력을 허락하고, 세계의 법칙마저 비틀어버린다.
그러나 눈 앞의 남자는, 13호는.
13호를 쓰러뜨리기 위해 방대해진 라헤의 마력을 앞에 두고, 더욱더 단단하고 첨예하게 마력을 갈고 닦는다.
10번의 참격으로 죽지 않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100번의 참격을 날리는 게 라헤라면.
13호는 10번의 참격을 깨부수고 100번의 참격도 깨부술 단 한 번의 찌르기를 날린다.
반칙이다.
지금껏 수 많은 사람들이 라헤를 보고 생각한 그것을, 지금은 라헤가 13호를 바라보며 그 마음에 품었다.
그녀의 능력으로도, 도저히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세뇌에 좀먹힌 흐릿한 이성으로 깨달았다.
쨍강! 쨍강!
두 자루의 얼음 검이 또다시 싸라기를 흩뿌리며 산산히 부서져나갔다. 자신을 포획하기 위해 휘둘러진 13호의 사슬을 피해 라헤는 유연하게 거리를 벌리더니,
“【쏟아져라, 얼음의 창】!!”
셀 수도 없이 무수한 얼음의 송곳을 공중에 띄우고, 그대로 13호를 향해 무자비하게 쏘아보냈다.
“많아!”
이번에는 13호 또한, 온갖 영웅들의 무수한 무구들을 끄집어내 대응한다. 날아드는 송곳을 산을 갈랐다는 거대한 도끼로 쳐내고, 고대의 괴수를 붙들었다는 사슬로 끌어내리고,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는 방패로 막아냈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날아다는 모든 송곳을 쳐내고 나니, 서리마저 내려앉은 공터에서는 라헤의 모습이 사라져있었다. 당황하며 13호가 주변을 돌아보자니,
“【영겁의 꽃, 그림자 나라의 빙하】!”
낭랑한 영창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아름다운 평온, 백장미 흐드러지게 피는 빙설의 폭풍을, 이곳에】!”
높이 뛰어오른 라헤가 머리 위로 들어올린 손 위에는, 어느 설산의 악천후를 불러온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의 얼음 폭풍이 몰려들고 있었다.
온 힘을 긁어모은 마지막 일격이, 지금 막 라헤의 손 위에 준비되었다.
라헤의 손이, 죄인의 단죄를 알리듯 엄숙하게 내려선다.
“【마레우스, 템페스타스】!!!!”
라헤의 손을 따라 무자비한 얼음 폭풍의 추가, 13호가 서있는 소나무 숲에 떨어져내렸다.
압축되고 압축되어있던 빙점 이하 극지대의 냉기가 사나운 짐승처럼 날뛰고, 13호를, 공터를, 소나무숲을 집어삼켰다. 얼음의 거스러미가 라헤가 내려다보는 온 땅 위에 펼쳐진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미쳐날뛰는 냉기의 폭풍에 맞선 것은, 마찬가지로 빌런의 낭창한 외침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여행자. 우리는 모두가 영웅. 그런 우리들의 여행과 모험의 날이 밝았다.】”
라헤의 영창이 끝나기 직전. 그녀의 손에 들린 얼음폭풍의 추가 내리 떨어지기 전에, 13호 또한 그에 맞서듯 영창을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는 모험자들에게, 영웅의 앞길을 여는 찬가를 이곳에】”
그건 언젠가 무술에 능한 히어로를 마주쳤을 때 사용했던, 비장의 카드.
“【필요한 건 여행을 떠나는 배. 지금 바로, 내게 주오.】”
정면에서 떨어져내려오는 폭풍을 올려보며, 13호는 남아있던 모든 마력을 이 마지막 수에 쏟아부었다.
13호의 영창이 끝나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라헤가 불러낸 폭풍의 추가 지상에 닿고, 그리고 터져나가 온 땅을 새하얗게 물들었다.
미쳐 날뛰는 폭풍에 13호의 몸도 삼켜졌으나,
“【그라키아레스, 아르고】!!”
다음 순간.
퍼-엉!
밀려드는 폭풍을 뚫고.
미쳐 날뛰는 빙설의 냉기를 뚫고.
――거대한 배가, 마치 하늘로 솟구치듯 나타났다.
“?!”
무시무시한 기세로 터져나가는 한파. 그 사이를 뻥 뚫고 나타난, 온갖 고난이며 악재를 뚫고 영웅들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신의 가호를 받는 배.
그 배의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선두(船頭)가 라헤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끝을 내자, 라헤!!!”
선두에 꼴사납게 매달린 것은 13호.
이 배를 불러내느라 마력도 다 써버렸다. 새로이 마력을 보충받을 수 없는 13호에게는, 이제 이 이상 라헤와 싸울 수단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게 마지막.
라헤 또한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과한 마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점이 남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
13호는 매달려있던 선두를 밟고, 뛰어올랐다. 이제 막 추락을 시작한 라헤의 몸을, 13호의 몸이 덮친다.
라헤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13호의 손은 능숙하게 그녀의 가드 사이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왔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13호는 온 힘을 쥐어짜내 기합을 터뜨렸다.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라헤는, 적어도 동귀어진을 노리고자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내 투명한 얼음 검을 손안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내밀어진 13호의 손.
그 손이 향한 것은.
그 손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붙잡은 것은.
물컹.
대장을 상징하는 흰 제복 위로 부풀어 오른, 라헤의 가슴을.
13호의 손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꾹 붙잡고 주물주물 주물렀다...!
* * *
그건, 말하자면 바보라고 해야할까.
이런 중요한 국면에, 이쪽은 당장에라도 죽이려고 살기등등해서 검을 꺼낸 이 순간에, 13호의 선택은 급소를 찌르는 것도 관절을 꺾는 것도 아닌, 여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방을 주무르는 것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훌륭한 복선 회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진짜 멋진 여자네. 반해버릴 것 같잖아.’
――‘그러니까 가슴 만지게 해주라. 아니, 반드시 만져주겠어, 가슴.’
뭐, 그건 둘째 치더라도.
“어... 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더욱 더 이상한 것은, 라헤의 반응.
13호의 기습이 별 거 아닌 것이라고 판단하고, 가까스로 생성해 낸 얼음검으로 13호의 목을 치려고 했던 그 순간.
가슴에서 밀려오는 찌릿찌릿한 쾌감에, 라헤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요란한 교성을 흘렸다.
"으와와와와와와...!"
우둑! 뚜둑! 뚜두두두둑!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소나무 가지를 꺾어가며, 낙하의 기세가 줄어든 두 사람은 폭신한 눈 위에 한데 엉켜 추락했다. 눈이 쿠션이 되어준 덕에 다친 곳은 없었지만, 라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후우. 살았네.”
“흐이이이이이... 아... 하아아으으으....”
조금 주물러졌을 뿐인데도, 온갖 개조를 당하고 꽤 오랜 시간 13호의 손길에 노출되었었던 라헤의 몸은, 세뇌가 뒤엉켜 폭주하고 있는 지금도 13호의 손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13호의 손이 닿자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나름 도박이었지만.'
그래도 잘되어서 다행이라고, 13호는 힘이 빠져나간 라헤의 몸을 집요하게 주무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