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41 동생분은 화가 났습니다(4)
“아윽......?!”
미처 시간을 조작하지 못한 한순간의 틈을 노려, 라헤의 검이 실의 옆구리를 깊게 베었다. 검이 남긴 상흔에서부터, 쩌적쩌적 몸 안 쪽의 혈액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더블】!”
이어서 추격타를 날리려는 듯 휘둘러지는 라헤의 검을, 실은 능력을 이용해 잽싸게 피해냈다.
혈관이 얼어붙는 아픔에 가쁘게 숨을 내쉬며, 창백한 얼굴로 옆구리를 쥐었다.
――시간을 되돌려, 상처를 입기 전으로.
서리가 맺히고, 얼어붙어 가던 그녀의 옆구리의 상처 위에 시계바늘이 떠오르고 째깍째깍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간이 되감아 져 베이기 전의 탱탱한 피부로 되돌아왔다.
실이 안도의 한숨을 후우, 내쉬는 순간,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라헤가 다시금 눈 앞으로 육박했다.
“아아! 정말!”
또다시 능력을 이용한 긴급회피. 그러나 이 속도에도 타이밍에도 익숙해지는지, 라헤는 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휘두른 검을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다시금 실을 향해 휘둘렀다.
‘진짜, 상대하기, 싫네 증말~~~~!’
의 가호를 받는 실은, 그녀의 ‘정의’에 반하는 상대에게 절대로지지 않는다.
본래 그녀가 히어로로서 50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고, 상대가 70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라헤는 거울처럼 상대의 70이라는 능력에 대항하기 위한 70이라는 힘을 추가로 얻는다. 그렇게 최종적으로는 120이라는 힘으로, 70인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본래 70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해도, 라헤를 상대하는 데 30이라는 능력만을 쓴다면 라헤는 본래의 능력인 50에 30을 더한 80의 능력 정도만 쓰게 된다.
그 갭을 찌르기 위해, 실은 자신의 능력을 자제하고 있다. 라헤의 수준을 떨어뜨리기 위해 가능하면 맨몸으로, 【더블】은 위급시나, 필요한 순간만 최소한으로. 【태엽감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면 피해야한다. 그녀가 능력으로 상처를 없애는 만큼, 라헤 또한 체력이며 상처를 회복한다. 그런 능력이다, 라헤의 능력은.
‘슬슬 안 되겠네.’
견제를 위해 권총을 연사하고, 실은 라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래봐야 이 정도 거리는 라헤에게 있어서 한두 걸음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잠깐!”
실이 외쳤지만, 라헤는 상관 않고 다시금 달려나가려 했다. 다음에 노릴 곳은 머리다. 단칼에 끝장을 내주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이 들어보인 물건에, 라헤는 이번에야말로 멈춰섰다.
“그, 그건......!”
경악.
닥터의 세뇌장치로 인해 지금껏 줄곧 인형처럼 무감정 무표정을 선보이던 라헤의 얼굴이, 처음으로 동요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경악한 듯 입을 벌리고, 헤드기어 너머의 눈을 한계까지 치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실이 꺼내보인 것, 그것은――
“자, 네가 애지중지하던 인형이야! 이게 어떻게 돼도 좋다면, 지금까지처럼 싸워보든가!”
실이 꺼내 든 것은, 안증맞은 얼룩덜룩 흑백의 판다인형.
살인적인 귀여움으로 점철한 인형을, 라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치, 치사한...! 제 팡팡군을 인질로 잡다니, 역시 당신은 악이었어요!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와, 그런 이름이었구나, 이거.”
아지트에서, 어떻게 라헤의 허점을 끌어낼 수 있을까 13호와 상담하던 끝에, ‘라헤 공략의 약점은 아무튼 귀여운 것’이라는 조언을 얻었다. 그리고 조언대로 ‘귀여운 것’이 뭘까 고민하던 실은, 라헤가 가장 아끼던 인형을 꺼내온 것이다.
이것만큼은 친구이자, 숙식을 함께 했던 동기였기에 꺼내들 수 있었던 패였다.
철컥, 실은 싱글싱글 웃으며, 품에 안은 귀여운 판다인형――팡팡군의 머리에 권총의 끝을 가져다대었다. “히익!”하고 라헤의 입에서 얼빠진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라헤. 순순히 투항하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소중한 판판군한테 이~따만한 구멍이 생길 거야!”
라헤는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껏 라헤의 인생에서 이 정도로 절체절명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적대하는 빌런조직의 아지트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갔을 때도,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도, 13호에게 붙잡혀 이런저런 능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을 때도 이 정도로 절박한 적은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어쩌지어쩌지어쩌지~~~~!
라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능력, 라면 인질을 구출할 힘도... 아니, 자신에게 직접 위험이 닥친게 아니니, 제대로 능력이 발휘될 것 같진.... 애초에 상식을 뛰어넘은 힘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니 밸런스를 맞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팡팡군을 버려...? 아냐! 안 돼!
하지만 닥터를 지켜야한다! 그게 닥터의 명령이니까!
강력한 세뇌의 막조차도 뚫고 솟아나오는 라헤의 강렬한 본능과, 닥터의 암시로 인해 생겨난 충성심이 서로 맞부딪치고, 길항한다.
본능과 충성.
그 사이에 껴서 우왕좌왕. 괴롭게 신음을 흘리자니,
“빈틈이닷★.”
“!”
복도 저편에 있던 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신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한순간, 실은 시간을 멈추고 라헤의 뒤로 돌아온 것이다. 갈등에 빠져 우왕좌왕하던 라헤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핫~~~!”
한순간의 허를 찔렸지만, 그럼에도 눈깜짝할 속도로 뒤돌아 실을 베어버리려던 순간, 실이 팡팡군을 불쑥 내미는 바람에 억지로 팔을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실의 손이, 라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좋아좋아. 끝이야, 라헤.”
“아......!”
순간 발밑이 사라지고,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라헤를 휘감았다. 주변의 풍경이 흐려지고, 마치 세상에서 튕겨나간 듯 주변의 풍경이 압축하거나 팽창하며 멀어져갔다.
“자, 라헤. 우리 함께 세시간 뒤의 세계에 가보자구. 그 때쯤이면 다 끝나있겠지.”
라헤는 패를 아끼고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자폭. 혹은 동귀어진.
3시간 미래로의 【시간도약】에, 라헤를 끌어들인 것이다.
【시간조작】의 한가지 능력, 많은 이들이 꿈에 그리는 【시간도약】.
몇 년은커녕 며칠 단위의 도약에도 터무니없는 마력을 소비하기 때문에, 과거나 다른 시간대에서 마력을 빌려와 사용하는 실로서도 자유로이 사용할 수는 없는 능력이다.
라헤를 붙들어두는 것조차 어렵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뿐이라면 아예 라헤가 이 이상 현장에 간섭하지 못하게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라헤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변수를 없애기 위해, 자신도 함께 【시간도약】에 몸을 던져넣는다.
이전의 시간 축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헤를 격파하고 나서도 자신이 나서서 닥터를 타도해야 했기 때문에――할 수 없었던 방법.
그러나 지금은 13호가 있다. 든든한 뒷배가, 동료가 있기에 마음 편하게, 전신전령을 쏟아부어서 이루어낸 쾌거.
과거이자 또 다른 미래선에서는 실패하고 역으로 당할 수 밖에 없던 실이었지만, 이번의 시간선에서는 문제 없이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럼 나머진 맡길게, 13호.”
3시간 뒤에 보자고.
분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라헤를 앞에 두고, 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염원을 담아 중얼거렸다.
* * *
닥터는 긴장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실험체들은 히어로들의 발을 묶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하나둘 시시각각 닥터가 있는 실험실을 향해 쾌진격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외벽 비상계단에 있던 히어로들도, 바라던 목표를 이루었다는 양 미련 없이 떠나갔다. 도망치면서도 틈만 나면 원거리 저격술로 닥터의 설비를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다.
엔데는 여전히 메이벨이라는 히어로에 의해 발이 묶여있다.
이곳까지 최단거리로 달려올라오는 13호는, 닥터가 보내는 첨병들을 도로시 특제 도구들을 이용해 자유롭게 헤치고 올라오고 있다.
“맙소사, 맙소사맙소사맙소사맙소사맙소사!!!!”
이럴 수는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천재인 자신이, 범재인 저 우둔한 빌런에 의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고 있다니.
“아직이야! 라헤! 라헤만 어떻게 한다면!!! 빨리 해치워!!!”
그나마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고, 모니터 화상 너머로 라헤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던 닥터였으나.
화상 너머에서, 실에게 붙잡힌 후 별안간 모습이 사라져버린 라헤를 보고서는,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라헤는 더 이상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닥터의 총명한 머리는 멋대로 추측이며 추론을 이어나갔다. 어느 것이나 지금 상황에는 하등 도움이 안되는 추론이었지만.
“참모! 참모오오오오오오!!!!!”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닥터는 참모를 불렀으나, 조금 전까지 태평하게 과자를 와작와작 집어먹고 있던 참모는 실험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
대신이라는 듯 바닥에 내던져진 쪽지가 있어, 닥터는 떨리는 손으로 집어올렸다.
쪽지에는,
[패색이 짙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닥터님에게 충성을 다하는 입장으로서, 긍지 높은 항복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잠시 뜨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황당한 상황에 굳어버린 머리로 내용을 두세번 더 읽어나간 후에야, 닥터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튀었다.
튀었잖아, 이 녀석.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그 외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닥터의 말에 ‘절대복종’하고, ‘충성을 바치도록’ 세뇌했으나, 세뇌의 깊이가 약한 고로 닥터의 의사를 벗어나, 멋들어지게 폭주하는 모양이다.
뭐가 ‘항복을 위한 준비’냐. 그 녀석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두개골을 갈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해볼 걸 그랬다.
“――아, 아직! 아직이야!”
아직 최상층과, 실험실을 봉쇄한 격벽이 남아있다. 아무리 무투파 괴력의 히어로라도, 무시무시한 박격포를 가지고 있다해도 결코 부술 수 없을, 닥터 특제의 【안전장치】.
라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며칠씩이나 사라져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헤가 돌아올 때까지 농성을 하자.
이곳에는 식량도 있고, 닥터의 설비로 음이온을 잔뜩 품은 공기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아, 그렇지. 어차피 13호는 빌런이고, 실이며 메이벨은 히어로에게 쫓기는 몸. 지금이라도 히어로협회에 신고해서, 저 녀석들을 끌고가게 하자. 자신은 무고한 시민으로서, 히어로들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좋다. 무엇보다 도로시가 여기에 있으니까 며칠이든 갇혀있는 것 따윈 무섭지 않다. 도로시만 있으면 된다. 몇 년이어도 상관 없다.
“그래... 나는 당하지 않아... 아무도 여기까진 못와... 내가 지켜줄 테니까 누나... 응...?”
닥터는 세뇌용 헤드기어를 쓴 채 여전히 신음을 흘리는 도로시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쥐며,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응. 슬슬 가슴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좋아, 이제는 문제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승인되었습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락이 풀렸음을 알리는 삐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실험실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줄 두꺼운 격벽이――열렸다.
“이야, 겨우 도착했네. 솔직히 엘리베이터는 작동시켜줘야 매너 아니냐?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불평해도 되지? 응? 된다고 말해, 요 녀석아.”
“어, 어, 어, 어, 어..........?”
“뭐 임마. 하고 싶은 말 있음 해. 뭔데. 사람 손가락질 하지마. 부러뜨려버린다. 콱 씨.”
장난스레 빙글빙글 웃으며, 격벽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13호.
그런 13호를, 닥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닫았다.
13호는 그런 닥터를 앞에 두고, 혀를 쭉쭉 내밀며 스트레칭하더니,
“모두의 귀염둥이 13호가 와쪄염★! 혹시 도로시를 아~주아주 많이 닮은 13호군 2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가? 응? 동생군, 말 좀 해주지 않겠어? 여기 임신 테스트기 같은 거 없어? 응? 누나의 남친을 만난 기분은 어때? 응? 말해보라니까? 응응응응?”
눈은 호를 그리고, 혀로 콧구멍을 쑤시는 묘기마저 보여주며, 상대를 놀릴 생각이 가득한 조롱하는 미소로, 닥터에게 인사해주었다.
* * *
닥터는 참모며 도로시를 통해 13호네의 전력을 나름 꿰뚫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애플. 애플이 도로시와 함께 닥터에게 온 것은, 닥터의 전용기기를 이용한 강제 세뇌를 진행하기 위해서였지만, 도로시가 배신했다는 사실과 13호네들이 금방 쳐들어올 것을 알게 되고서는 곧바로 방을 준비해 구속하고 감금시켰다. 눈에 보이는 전자기기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그녀의 능력은 닥터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면 코코. 그녀의 능력은 빛을 조절해 환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이 능력은 카메라마저도 속인다. 그렇기에 닥터는 그녀의 습격을 대비해 전용 센서를 준비해두었다.
닥터는 나름 만전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닥터는 책사가 아닌, 발명가.
이미 도로시를 통해 닥터의 대강의 전력이며 설비를 알고 있는 13호와, 그리고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사태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코코를 견제하기 위한 센서를, 클럽이 핀포인트로 부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애플이 있는 층의 센서가 모두 무력화 된 틈을 타, 코코가 그녀를 구출했으며.
――닥터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내내 자신의 모습을, 구출해낸 애플의 모습도 숨긴 채 13호와 합류하고.
――애플의 능력을 이용해 닥터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격벽의 시큐리티를 해제하고, 손쉽게 이 철옹성과 같던 실험실에 입성했다.
진짜 책략가인 참모를 의지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지만.
참모를 의심하고, 오로지 자신의 두뇌를 의지하던 닥터는, 13호의 엉성한 책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것이다.
* * *
“뭐, 대충 그런 시나리오야. 기분은 어때, 처남?”
“크윽!”
닥터가 분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빨리 손을 조작해 근처의 패널을 만졌다. 시스템을 이용해 기계병사 같은 걸 불러들이려는 모양이었지만,
“소용없어요. 현재 당신의 권한은 전부 동결되었습니다.”
발랄하게 닥터에게 고한 것은, 내 뒤에서 안경을 척, 하니 밀어올리는 애플이다. 그 옆에는 코코도 득의양양하게 서있다.
애플의 능력, 【전뇌(電腦)의 주인】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닥터의 권한이며 모든 전자기기를 장악해버렸다.
남자인 닥터는 각성자일리도 없다. 더 이상 패 하나 남지 않은 닥터에게 승산은 없다.
“체크메이트야, 처남.”
“......처남이라고 부르지 마!”
“이것참, 반항기구나. 괜찮아. 이 형님은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 함께 술이라도 짠 들이키면 분명 마음을 터놓을 거야. 네 누나는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닥쳐... 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
닥터의 눈에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이 이상 도발하면 큰일이 터지려나. 뭐, 상관 없지만.
지나친 분노로 눈물이 나는지, 그렁그렁 눈물방울까지 맺힌 채 나를 노려보는 닥터를 본 첫인상은, 확연하게 도로시의 남동생이었다.
몸보다 한 치수 이상 커보이는 백의. 호리호리한 몸에 손질되지 않은 더벅머리. 그리고 도로시와 같은, 짙은 다크서클.
오오, 확실히 도로시의 모습이 있어.
도로시가 남자로 변하면 딱 이런 모습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살짝 감탄하고 있었다.
뭐, 다 끝났다는 생각에 조금 풀어져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더는 수가 없을 거라 안이하게 판단해, 경계를 지나치게 풀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서방님?!”
“엑......?”
나는 닥터가 낙낙한 백의자락 뒤로 손을 돌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의식의 틈새를 노리듯, 깨닫기도 전에 닥터는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들이댄 채, 멧돼지 같은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13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식은땀이 솟았다. 갑작스런 돌발상태에 온 몸의 근육이 긴장했다.
닥터가 내밀고 있는 것은, 끝이 뾰족한 송곳 같은 무언가. 그 끝이, 망설임 없이 내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고――
“호이.”
“어?”
나는 가볍게 몸을 돌려, 슬쩍 옆으로 피하며 닥터의 다리를 걸었다.
아니, 능력이 없더라도 운동부족인 약골의 돌진을 피하는 거야 일도 아니다. 이래 봬도 육체파이자 현장파라 경험이 많다고, 나.
“어, 어, 으아아아앗!”
닥터는 폴짝폴짝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이윽고 요란하게 발라당 넘어져버렸다.
“이봐, 괜찮아, 처남? 조심해야지. 잘 찔러보라구? 응? 그래서야 찌를 수 있겠어? 잘 조준해서. 발 밑도 확인하고. 응응?”
“.......”
“...처남?”
능글능글 웃으며 쓰러진 닥터를 놀려주려고 했더니, 닥터는 대꾸도 하지 않고 쓰러진 채로 조용히 있었다.
처음에는 죽은척인가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죽지는 않은 건지,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에 웅크린 채 나를 돌아보았다.
“.......와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닥터에 손에 들렸던 것은 송곳이 아니라――묘한 주사기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주사기의 끝이, 넘어지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닥터의 목에 꽂혀있다.
닥터가 입을 뻐끔뻐끔거리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 저거 알아.”
옆에 다가온 코코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저거, 피스톤질이 필요없는 주사기야. 한번 꽂히면 그대로 끝. 알아서 내용물이 안으로 밀고 들어가. 응. 망했는걸.”
“아, 아아아아아...!”
음소거에 걸린 것처럼 연신 뻐끔거리던 닥터가, 아니, 도로시의 동생 도토리가 절망의 한숨을 흘렸다.
“이, 이걸 어째야한다냐... 야, 지금 주입한 거 뭐야? 독약? 해독제 있어? 빨리 뭐든 말해봐! 어떡해야해!”
“해, 해독제 같은 거... 없...아흑?!”
“야, 야! 괜찮냐?!”
나는 다급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닥터의 어깨를 붙들고 외쳤다. 이, 이거 어쩌지. 아무리 밉상이고 우릴 고생시켰다고 해도, 이렇게 죽어버리거나하면 찝찝하다! 거기다 도로시의 동생인데!
“으윽, 하으으으으으윽...!”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닥터의 옷이 축축해졌다. 뭔가 연기 같은 것도 나는 것 같고, 닥터를 붙잡은 손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 작아지고 있어?!
“야, 야! 닥터... 도토리! 말 좀 해봐! 이거 무슨 약이야?!”
닥터의 아래에는 뭔지 모를 물웅덩이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몸은 시시각각 작아지고 있다.
몸이 녹아버리는 약인가?!
“야! 빨리 말해! 해독제! 해독제 없어?!”
“으으... 흐으으으... 아아아아아아........!!!!”
닥터의 신음소리가 점점 높아져갔다. 기분탓인지 여자의 그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아아~~~!! 정말 어째야한담!
나는 사람이 눈 앞에서 녹아버린다는, 정체불명의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한 영상을 상상하며 식은땀과 함께 닥터를 쳐다보았다.
* * *
그리고 잠깐의 시간을 지나, 현재.
“흑... 어, 어떡해... 이거 어떡하지....”
“““.......”””
나도, 애플도, 코코도.
눈 앞의, 헐렁한 백의며 셔츠를 걸친 여자――여성으로 변해버린 닥터를,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하, 웃음 밖에 안 나오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은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