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41 동생분은 화가 났습니다(2)
[[email protected]#$$%^&$!!]
뚝.
이성을 상실한 닥터의 고함소리에, 나는 재빨리 통신용 단말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단순히 농담 했을 뿐인데 이렇게 과민반응하다니, 분위기를 못 읽는 게 틀림 없다. 역시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그런지 인간 경험이 없는 게 분명해.
“.....니, 참말로 성격 나쁘네.”
“응? 그런가? 왜 이렇게 화내는지 놔는 줘~언혀 모르겠눈데~.”
“.......”
혀를 쏙 내밀고, 손짓발짓까지 섞어가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자,
“역한놈.”
메이벨은 진심으로 혐오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내뱉었다. 지금 그 표정은 좀 상처받았다.
“아니, 나도 나름 말을 고른 거거든? 그래도 가능한 예의를 지키면서 거부감이 덜한 표현을 찾아서 말한 거란 말야? 내 노력을 알아줬으면 해.”
“...아, 그러셔. 알겠당께, 알았어.”
메이벨이 뒤집어 쓴 토끼탈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들이 있는 곳은 남쪽 통로로, 선행해서 화려하게 치고 들어간 정문쪽으로 경비 인원들이 몰려간 모양이라 이쪽은 상당히 수월하게 침입할 수 있었다.
정문쪽으로 간건 스페이드와 체크, 완전 육체파인 두 사람이다. 가능한 한 화려하게 날뛰며 사람들을 끌어 달라고 부탁해두었다.
“가장께. 시간이 없으야.”
서둘러 앞장 서서 가는 메이벨의 뒤를 따라 달렸다.
자, 닥터를 도발하는 건 성공했으니,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 * *
콰장창창! 쨍그랑!
“13호오오오오오오오! 죽여버리겠어어어어어! 누나를! 네가 감히 누나르으으으으으으으을!”
닥터는 울분에 가득 차 테이블 위를 마구잡이로 쓸어버렸다. 위에 있던 비커며 약품이 들어있던 유리병들이 사정없이 깨어져 나가고, 뭔지 모를 연기가 솟아났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닥터는, 어느샌가 도착해있던 참모에게 분통을 터뜨리듯 명령했다.
“이봐! 당장 화상을 분석해서 누가 13호인지 알아내도록 해! 내가 가진 모든 실험체들을 사용해서 다진고기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
“어이?”
“.......”
“...먹으면 고양이귀와 꼬리가 돋아나는 형태변환약을 개발해줄게.”
“꺄아아아!! 만세...! 알겠습니다! 불초 이 참모, 당장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로 변한 참모가 만세를 외치며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해맑은 표정에 닥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싸매쥐었다.
하여간 시간이 부족한 게 문제다. 좀만 더 공들여서 인격을 지워버렸으면 다루기 더 편했을 것을.
아니,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은 없다마는.
“닥터님. 대략적인 몸짓이나 습관등을 보건데 2번 카메라에 잡힌 이분이 13호님인 것 같습니다.”
“저게....”
“어쩌시렵니까? 요격하려하신다면――”
“그만.”
닥터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참모가 자그마한 입을 닫았다.
“나는 13호가 누구인지 알아봐달라고 했지, 네 생각을 꺼내라고 한 적 없어.”
“그렇습니까.”
이쪽도 천재다. 다른 사람의 말 따위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도로시 누나 의외의 사람 따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최강의 말은 준비돼있지만, 13호에게 보냈다간 실을 막을 사람이 없어. ...가지고 있는 전력을 고려해보자면....’
참모가 입을 다문 앞에서, 닥터는 턱을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됐다. 침입자 몇 명 정도야 우스울 정도로, 이쪽에도 전력은 충분하다.
‘실험체P를 정면으로... 13호 쪽은 산 채로 끌고 오는 게 낫겠어. 아무도 안 보는데서 죽어버리면 허전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은 전부 주고서 죽여버리는 게 기분도 풀릴 것 같고.’
시스템에 이어져있는 터치패널로 파수용 시스템의 조작을 마친 닥터는, 엔데와 참모에게 몇 가지 지시해서 내보내었다.
그리곤 근처에 있던 서랍장에서 몇 가지 약품을 꺼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응. 역시 그냥 죽고 띡 끝내면 재미가 없지. 약을 준비하자. 13호 그 불한당을 고문할 약을. 인생 최고의 절망을 맛보게 해줄 신세계의 약을 만들어주자.”
닥터는 혼자 중얼거리며 약 제조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수상한 액체를 서로 섞고, 쇠막대로 휘젓거나 한다.
닥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용서하지 않아, 13호...! 누나한테 손댔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더는 없을 정도의 지옥을 맛보게 해주겠어....”
* * *
“스물아홉. 스페이드 니는 얼마나 했그라?”
“열일곱이요... 역시 체크 씨는 못 당한다니까요.”
“아하하하, 너무 풀죽지 말그라. 아무튼 니도 기대되는 후배니께.”
스물아홉, 열일곱. 스페이드&체크 팀이 각자 쓰러뜨린 경비 인원들의 숫자다.
차이가 심하긴 하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열일곱의 건장한 남성을 그 짧은 시간에 쓰러트린 스페이드도 결코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체크 씨, 그... 말하기 좀 그런데, 팬티는 원래 안 입으시는 건가요...?”
“응? 무슨 소리가? 잘 입고 있지 않나?”
“네...?”
“이봐라.”
체크는 싱글싱글 웃으며 망설임 없이 스커트 끝을 붙잡아 들어보였다. 드러난 것은 그녀의 매끈한 국부 뿐이다.
“.......”
“와 그리 이상한 표정이고?”
“...아뇨, 아무 것도....”
분명 13호 짓이겠지. 돌아가면 일단 꽉꽉 깨물어주면서 추궁하기로 했다. 세뇌 때문에 주먹으로 때리는 건 안 되는데, 꽉꽉 깨무는 것은 된다는 것을 최근 깨달았다.
“이걸로 1층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네요....”
“그럼 이제 윗층으로 올라가면 되는기가?”
“그렇긴 한데요, 이렇게 막혀 있어서야.”
스페이드가 한탄하듯 가리킨 것은 두꺼워 보이는 격벽이다. 사전에 전달받은 지도대로라면 이 격벽의 뒤에 계단이 있을 터다.
체크는 벽을 가볍게 쓰다듬듯 매만지고는,
“못 부숴?”
툭 내뱉듯 그렇게 말했다.
“.......”
사람을 참 험하게 부리는 구만.
스페이드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체크를 뒤로 물렸다. 그리곤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는,
“합!”
기합성과 함께, 격벽을 향해 힘찬 펀치를 날렸다.
우지지지지직!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쇠로 된 벽이 종잇장마냥 찌그러지고, 갈라졌다.
비-잉, 비-잉 하는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격벽에 충격이 온 것으로 뭔가의 스위치가 들어간 걸까.
피어오르는 먼지더미에 스페이드는 켈록켈록 가볍게 기침했다. 뒤에 서 있던 체크가 잘했다는 듯 손뼉을 쳐주었다.
“역시, 히어로 최고의 괴력이래이. 단순한 힘만으로는 내도 못 따라간데이.”
“힘 센 여자애라니, 뭔가, 뭔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요....”
어쨌든 통로는 열렸다. 스페이드는 그대로 계단 위에 발을 올렸지만,
“...! 스페이드, 조심하래이!”
갑작스레 느껴진 쎄한 기분에, 짐승을 방불케하는 육감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뒤로 뛰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우지끈-! 쿠구우우우웅!!
천장이 갈라지고, 무너뜨리고, 난폭하게 파괴되며 육중한 무언가가 조금전까지 스페이드가 서있던 곳에 떨어져내렸다..
“우, 와....”
“오메야....”
윗층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물체. 연기가 걷히고 그 실루엣을 보고, 두 사람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나타난 것은 바위덩어리 같은 사지며 산 같은 몸뚱아리를 가진 인간이었다. 위로도, 옆으로도 거대하다. 이건 인간이 아니라 고릴라일까? 이 정도 덩치를 가지고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수가 있지 않을까?
머리까지 족히 5미터는 될 듯한 거구를 앞에 두고, 체크도 스페이드도 긴장한 채 요격할 준비를 했다.
『그...으으....』
인간, 혹은 고릴라, 혹은 거인, 혹은――괴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은 계단벽에 끼인 몸을 꿈질꿈질 움직이더니,
『그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건물 전체를 울릴 무시무시한 포효소리와 함께, 양팔을 벌려 계단의 벽을 부수고, 스페이드와 체크를 향해 그 육중한 거구로 덮쳐들었다.
* * *
캉캉캉캉-!
건물 외벽에 나있는 비상계단이, 토끼탈을 쓴 두 사람이 다급하게 달려올라가자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으음... 클럽 언니, 숙여요!”
“Fuck...!”
아리아의 지시대로 계단에 딱 달라붙듯 몸을 숙이자, 머리 위를 부와아앙- 하고 울리는 전기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지나갔다. 클럽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단순한 구조의 기업빌딩인데, 억지로 뜯어내보니 별에 별 해괴한 함정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맙소사. 이게 무슨 빌딩이야, 요새지.
고작해야 몇 층을 올라왔을 뿐인데, 벌써 십수번은 죽을 뻔 했다. 아리아의 【단거리 미래예지】와 클럽의 넓은 시야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 썰리거나 태워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리아 씨. 예지는 앞으로 몇 번이나 가능할 거 같아요? 다음 함정도 맞출 수 있겠어요?”
“......주사위를 일곱 번 굴려서 전부 6이 나올 확률 정도로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욕넘치게 말하는데, 그거 그냥 가망이 없다는 거잖아.
아무튼 이 아이의 능력은 컨디션에 의존하는 게 너무 크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나마 좋은 컨디션이었던 덕분이지만, 더 이상 심장졸이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Holy... 안 되겠네요. 좀 더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냥 여기서 해버리죠.”
캉캉캉-
나머지 계단을 마저 올라가, 가장 가까운 층의 비상구문에 도달했다. 잠겨있었지만, 아리아가 손에 든 막대기로 가볍게 두드리자 철컥철컥 소리를 내더니 스스로 열렸다.
“Marvelous. 항상 생각하는데 대단한 능력이네요, 그거.”
“으음... 이런 일을 할 때말고는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요.”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열쇠공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클럽은 비스듬하게 매고있던 가방을 열어, 쇠로 된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햄스터 몇 마리가 쪼르르 밖으로 튀어나왔다.
클럽은 햄스터들을 잠시 손 안에 그러모으고는, 그대로 문 너머 복도에 풀어주었다. 햄스터들은 그 자그마한 발로 재빠르게 안을 나아갔다.
“【동조개시】.”
문가에 기댄 채 가벼운 주문의 말을 읊자, 꼭 감은 눈꺼풀 아래로 새로운 시야가 보였다. 조금 전 풀어준 햄스터들의 시야다.
클럽은 조금 전 햄스터케이스를 꺼낸 가방에서, 이번엔 그녀의 손에는 조금 큰 권총을 꺼내들었다.
“...3분하고 17초. 그 이상 있으면 위험해요, 클럽 언니.”
“Don’t worry. 그 정도 있으면 충분해요.”
그녀들의 임무, 정확히는 클럽이 맡은 일은 감시카메라 파괴.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몇 개쯤 되는 주요한 감시카메라를 저격해 부숴버리는 것이다.
가늘게 뜬 한쪽 눈으로 손에 든 총을 확인하고, 다시금 눈을 감아 시야에 집중한 후, 클럽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탄도조작】.
클럽이 사전에 설정했던 대로, 날아들던 총알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공중에서 몇 번이나 방향을 꺾어,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조금 후에 희미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체크는 이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타탕!
연달아 이어지는 총성. 그 때마다 뭔가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저격인데다 시야도 나쁘고, 탄도를 세밀하게 조정하기 위해 마력을 다루는 것도 정신력을 요한다. 거기다 탁트인 장소에 있다는 것도, 언제든 닥터의 손길이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클럽은 잔뜩 긴장해있다. 당장에라도 미친 듯이 떨릴 것 같은 손이나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온 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 클럽 언니, 이제 시간이에요!”
“한 발만, 더....”
“왔어요! 왔다구요!”
“칫...!”
복도 저 너머에서 몇 기나 되는 드럼통 같은 모양의 기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닥터가 개발한 자체 파수용 로봇으로, 침입자를 인식하면 내장된 총화기 및 폭탄과 전기톱 등 살상용 무기로 적을 제압한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이쪽의 권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력을 가진 총탄이 인정사정없이 퍼부어졌다. 아리아가 가까스로 클럽의 몸을 끌어당긴 덕분에, 그 자그마한 몸이 벌집이 되는 일은 면했다.
“Fuck... 맙소사.”
아리아의 팔이 이끄는 대로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려는 데, 클럽의 시야에 새로운 것이 비쳤다.
여섯장의 날개를 가진 몇 기나 되는 드론이 건물의 위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강하하고 있었다. 각기의 드론에는 당연하다는 듯 흉흉한 총구가 달려있었다.
“드론의 무기화는 국제법에 의해 금지화 되었을텐데요!”
클럽이 비명과도 같이 외쳤다.
이미 도덕이나 법률과는 상관 없다는 태도의 닥터에게는 의미 없는 말일 뿐이다.
계단 위의 두 사람을 포착한 드론들은, 관리자인 닥터의 명령대로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 * *
“뭔가 요란하네. 수학여행 갔던 날 생각나서 즐거워.”
닥터의 아지트인 빌딩 건물 어느 한 복도에, 실은 홀로 남아 서성이고 있었다.
돌입할 때는 두 명이었지만, 지금은 갈라졌다. 애초에 지금부터 있을 일을 생각하면 이곳에는 실 혼자 있는 편이 현명했다.
바깥에서는 희미하게 총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어딘가 아래서는 쿠웅쿠웅 지진 같은 진동이 울려퍼지고 있다.
13호가 이끄는 7번대 인원들과 닥터의 사병 같은 게 맞부딪친 거겠지. 그녀도 이 층까지 오는데 적지 않은 사병이나 방위용 기구들을 마주쳤다.
전부 상대의 시간을 멈추고 그사이에 요리조리 피해버렸지만.
‘저편의 미래에선 우리 4번대 애들만으로 돌입했었지.’
상대가 누군지, 어떤 병력이며 병기를 가지고 있는지, 이곳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주의해야 할 게 무엇인지... 그런 정보 따윈 하나도 없이. 때가 되고 보니 이곳에 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실로 엮어 조종하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었다.
부하들이 하나하나 쓰러져가고, 엔데는 배신하고, 어째야 좋을지 알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사이 라헤를 만나 결국 스러졌었다.
그 때의 그 막막함이란....
“그래서 참 다행이란 말야....”
어쨌든 13호를 만난 건 다행이었다.
13호라는 빌런이 생각보다 좋은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엔데에게 배신을 당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 했을 때, 메이벨과 함께 13호는 몸을 던져 자신을 지켜주었다. 메이벨을 지켜준 게 13호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미래에서.
그를 만났던 것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13호네들에게 털어놓을 때도 가까스로 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녀만의 추억.
그녀는 그 추억을, 13호의 손을 떠올리고는, 아랫배를 살짝 쓰다듬으며 발그레하게 뺨을 붉혔다.
“후후...♪”
실은 뺨에 손을 대고,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사근사근 걸어나갔다.
굳이 행선지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
비어있고 고요한 복도 너머에,
어느샌가,
누군가가 와서 그녀를 기다리듯 우뚝 서있었다.
“.......”
“어머, 드디어 왔구나.”
실은 반갑게 인사했다.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저 너머에 서 있는 건, 아름다운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머리에 비해 큰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늘씬한 장신의 여성.
라헤가, 복도 저 너머에 서있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돌입해도, 일단 너라면 나한테 보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기다렸어, 닥터가 있는 층 바로 아래에서.”
그 말대로, 지금 실이 있는 곳은 최상층의 바로 아래였다.
그녀는 지금 돌입한 누구보다도 빨리 이곳에 도달했으며, 느긋하게 라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라헤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가 있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로막듯이 그 앞에 우뚝 서서.
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또각또각 힐 굽을 울리며 걸어나갔다.
“멀리서 봐도 알겠어. 머릿결이 꽤 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밥은 잘 먹었어? 잠은 잘 자고? 역시 닥터란 녀석, 몹쓸 녀석이구나. 분명 제대로 쉬게해주지도 않은 거겠지. 그치?”
“.......”
“정말이지, 내 얼마 안되는 동기한테, 소중한 친구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용서할 수가 없네.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 남자 같은 거 최악이라서,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니까.”
“.......”
“네 부하들도 와있어, 라헤. 어서 그 이상한 거 벗어버리고 애들한테 돌아가. 가서 사과해야된다니까. 대장씩이나 되어서 그게 무슨 추태야. 마지막까지 홀로 남아서 결사 항전해도 모를 판국에, 부하들은 다 멀쩡한데 혼자 그 모양 그 꼴이고. ...아, 그 애들도 멀쩡하다고 해야하려나... 흐음....”
“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라헤의 입이 열렸다.
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닥터님은 정의이며, 그런 닥터님께 거역하는 당신은 악입니다. 닥터님의 명령으로, 닥터님께 해가 될 수 있는 당신을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기계적으로 토해내는 라헤의 말에, 슬픈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쓰게 웃었다.
"...그래, 해 봐. 할 수 있으면."
다음 순간,
라헤의 몸이 쏘아지는 탄환처럼 실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