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39 의심하라, 빌런이여(3)
쉬익-!
눈 앞에 달려드는 것은 한 줄기 빛.
조종당하는 상태에서도, 전혀 날이 죽지 않은 검기.
어느 한 미래선. 닥터의 아지트 한구석의 벽에 기댄 채, 실은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녀의 능력인 【시간조작】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기묘하게도 눈 앞에 날아드는 라헤의 자비 없는 칼날은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능력을 사용해봤자, 라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시간을 멈추면 멈춘 시간 째로 찢어발기고,
찰나의 과거로 돌아와 미래시(未來視)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곧바로 대응한다.
상대가 강하다면, 자신은 더욱 강해져서 대응하겠다는 양아치 같은 논리.
이게 라헤의, 【천칭자리】의 능력.
자신의 ‘정의(正義)’에 반하는 상대를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는 치사한 능력.
‘어차피 더 이상 미련은 없지만.’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었고. 자유가 보장되기 어려운 ‘각성자’면서도 히어로며 대장이라는 입지를 이용해 나름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남자복은 없어서, 부하인 메이벨과 마찬가지로 처녀인 건 마음이 아프지만... 뭐.
실은 두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검 끝은 지척에 닿아있었다. 이대로 꿰뚫리면 아플까? 심장이 꿰뚫리는 기분은 어떤 걸까? 라헤라면 뼈는 피해서 찔러주겠지. 매정해 보이는 주제에, 상대가 아프지 않도록 열심히 인체에 대해 공부하고 훈련하는 라헤를, 친구이자 동기인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다.
‘13호... 벨.’
닥터의 계략에 의해 함정에 빠졌고, 【어비스】와 부딪치고 라헤와 엔데의 협공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지나고.
적이 된 줄 알았던 벨이 지원해주고, 위험하던 순간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빌런 13호의 도움도 받고.
.......
두 사람 다 죽었겠지.
살다살다 빌런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그보다 벨, 13호랑 친해보이던데, 뭔가 분위기도 그렇고... 둘이 뭔 일이 있었던 거려나. 알콩달콩 새콤달콤한 일이 있었으려나. 히어로와 빌런, 앙숙인 두 사람의 연애사라니 그거 두근두근한 걸. 그런 로맨스 두근두근하잖아. 그치?
하하, 어떡하지. 죽기 직전인데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래도 웃으며 죽을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실없는 웃음으로 죽는 건 좀 그럴까.
아니, 사람이 죽는다는 건 의외로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지막은 좀 더 무게감 있는 고민 같은 거로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사치인 걸까.
.......
.................
.........................................................?
‘응?’
이상하다. 아무리 체감시간이 느리다곤 해도, 왜 아직도 아프지 않은 걸까. 검이 꽂히지 않은 걸까.
‘...어라, 뭔가....’
앉아있던 바닥의 감촉이, 기대고 있던 벽의 느낌이 달라졌다.
고개를 들어보자, 분명 눈 앞에 있어야 할 라헤도, 엔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여긴 어디람.
‘시간이동... 과거로 날아온 걸까?’
그럴 마력이 남아있었나? 있는 대로 쥐어짜느라 텅텅 빈 마력으로 가능할까?
비틀거리며 일어선 실은, 홀린 듯이 주변을 살펴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조금 뒤, 바깥으로 나온 실이 보게 된 것은――
* * *
‘이것 참~ 곤란한데 말이지~ 나는 이렇게나 결백한데~★’
실은 “우웅~” 하는 신음을 흘리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13호와 메이벨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갑자기 미래에서 왔다거나 그러면 의심할만한가.
“어쩌면 좋을까나....”
이대로면 곤란하다. 이제 곧 닥터 토벌을 위한 작전이 시작될 텐데, 서로간에 신뢰가 없다면 중요한 순간에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내가 직접 아니라고 말해도 믿어주진 않겠지.’
일단 뭔가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실은 과거의 기억을 재생해가며 13호와 벨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츄웁... 츕....』
약 10분 후.
“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머머머머머.”
키스?!
갑자기 키스하고 있는 거야?!
아니,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베, 벨 이 녀석...! 남자에 관해선 그렇게 순진해 보이더니, 이렇게 까진 애였던 거야?!’
뭔가 흥미진진하다.
그 순진한 알콜 중독 화가 녀석이,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
“오, 오오오오... 이거 어쩐지 즐거워지는데....”
사랑스런 부하, 아니지, 지금은 전(前) 부하일까. 하여튼.
벨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빌런 13호와 꽁냥 아닌 꽁냥, 썸 아닌 썸, 미묘한 분위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은근 흥미진진했다.
실은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두 사람의 과거의 영상을 쫓아 발을 옮기는데,
“..................저기, 그거 뭐야?”
“흐기야악?! 잘못했어요!”
맙소사. 심장이 뚫려버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뒤에서 말 걸면 놀라잖아.
실은 끼기긱, 목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거... 13호지? 저기, 어쩐지 내 눈에 두 사람이 되게 가까워 보이는데... 나도 자세히 보여줄래?”
【어비스】의 보스인 바이올렛이, 범접할 수 없는 어둠 같은 것을 눈동자에 담은 채, 축축하게, 어두컴컴하게, 무시무시하게... 13호와 벨의 영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오싹, 하는 한기가 들었다.
응? 뭐지? 딱히 추운 건 아닌데.
어쩐지 내가 없는 어딘가에서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냥 기분탓이겠지.
“그래서 좀 감이 잡혔어?”
“알게 된 건 네 녀석이 얼마나 변태인지 정도 밖에 없당께....”
“변태? 아하하, 이걸 변태라고 하면 어떡해? 오늘은 신경 써서 순한맛만 보여준 건데.”
“이것보다 더 위가 있다고?!”
“굳이 설명하자면 뒷무대라고 할까, 연극으로 치자면 프롤로그 정도. 온 스테이지라던가 클라이맥스는 기대해도 좋아.”
“‘기대해도 좋아’가 아니랑께 변태자식아!”
아무튼, 서로 티격태격하기를 잠시.
우리는 결국 별다른 성과도 없이 아지트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아직 실의 정체를 파악할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이벨 너를 인질로 붙잡고 심문할까?”
“대장의 능력 앞에서 니가 나를 인질로 잡을 수 있겠냐고.”
“술을 먹여서 본심을 드러내게 만드는 건?”
“...오, 그건 괜찮을지도 모르겠당께. 대장, 술이 약하니깐.”
좋아, 그렇다면 그걸로 가자.
“그럼 일단 술을 먹이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술을 먹여서 어떡하려고?”
“아니, 그러니까 본심...을.......”
별안간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왓, 하고 깜짝 놀라버렸다. 바로 뒤에는,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보스가 서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로, 미소지으면서.
“보스? 언제 왔습니까? 기분 좋아보이시네요.”
“응. 그럴 일이 있었거든. 저기, 벨이라고 했지? 잠깐만 저리로 가있어줄래요? 내 부하인 13호랑 얘기할 게 좀 있어서.”
메이벨은 그래도 괜찮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보스랑 얘기하는 데 굳이 이 여자가 같이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벨은 알겠다는 듯 총총히 멀어졌다.
“보스, 무슨 일 있나요?”
“아니, 별 일은 없어. 근데 저 여자랑 많이 친해진 것 같네?”
“예? 아니, 그다지 친한 건 아닌데.”
“아냐아냐. 친해보여. 옆에서 보면 둘이서 같이 꽁냥대는 느낌이고.”
어라, 그런가?
단순히 실이라는 공통화제가 있다보니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져버리긴 했는데.
“확실히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 여자랑은 별 일이 없거든요. 생각해보니까 세뇌시키지도 않았었네요. 기회가 되면 하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세뇌시키지도 않은 히어로와 꽁냥꽁냥이라... 그렇구나. 응. 지금까지도 주변에 여자는 많았지만, 이건 진짜 사랑이다, 같은 거려나?”
뭐지. 뭔가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데?
“에, 아니, 사랑이라니... 진짜로 저 여자는 아무 것도 아닌데요.”
“어라? 응? 그래?”
“네, 그렇죠. 그냥 단순히 일적인 관계랄까....”
“그렇구나. 13호는 일적인 관계로 상대에게 찌인~한 키스를 요구하거나 하는 거구나.”
......어?
“어... 혹시 보스, 보셨습니까?”
“아니, 뭐, 어쩌다보니 기회가 있었다고 할까.”
“어쩔 수 없네요. 그러고보니 보고드릴 타이밍을 놓쳐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만, 그게, 이러저러해서――”
그러고보면 도로시의 배신 때문에 보스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지.
나는 보스에게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메이벨의 목숨이 위험했던 것과, 도로시의 특제 회복제를 주사했던 것, 그리고 약의 부작용 때문에 한동안은 내 체액을 그녀에게 제공해야한다는 것도.
뭐, 이건 일종의 의료행위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인공호흡을 했다고 그걸 썸이라느니 연애 같은 것으로 연결짓는 건 무리가 있다.
그렇게 말하며 보스에게 이해를 구했더니,
“그렇구나, 그렇구나.”
“네, 그런거죠, 보스.”
“그래서 13호 넌, 키스할 때 아무 것도 안 느꼈어?”
“.......”
어쩐지 집요한 눈으로 물어보는데, 뭐지, 내가 뭔가 잘못했다.
“아, 아니, 뭐... 벨은 미인이고 하니... 매력적인 여자와 키스하는 데 아무 것도 안 느끼지는... 않죠....”
“그렇구나, 그렇구나.”
보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랑 했던 키스는 어땠어? 그것도 의료행위였나?”
“......에?”
어라?
나는 보스와 키스한 적이 있다. 아니, 그 이상의 것도 했었더랬지.
확실히 지우지 않은 기억 중에도 키스한 적은 있으니까.
...아니, 진짜, 가끔 장난치면서 선을 넘는 짓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 때의 기억은 확실하게 지웠고. 응! 분명 보스의 기억 속에 남은 키스는 허용 가능한 정도일테고!
“아하하하, 보스도 기분 좋았잖습니까. 그 정도야 뭐.”
그러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능청스럽게 얼버무렸다.
“그 정도야, 뭐. 응. 그래, 그렇지.”
“예, 그렇죠.”
“이건 좀 다른 얘긴데, 13호 너 컴퓨터가 고장났더라?”
“아, 예. 좀 이상한 파일을 받았던 모양이라. 하여간 바이러스라니 누가 그렇게 못된 것을 퍼뜨리는 건지.”
“그거, 고쳤어.”
“예? 보스가요?”
보스는 고개를 저었다.
“실이.”
“실? 그 여자가 제 컴퓨터를요? 그런데 그 여자 컴퓨터 잘 다루나요?”
“아니. 고장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더라고.”
호오.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도 가능하구나. 놀랍다. 안 되는 게 뭘까, 그 능력은.
......어라, 그런데 왜 내 컴퓨터를?
“어, 저기, 보스?”
“어쩌다보니 말이야. 정말 어쩌다보니 13호 네 발자취를 따라가게 됐거든. 부하가 얼마나 문란하게 생활하는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긴 해도 어쨌든 나는 보스잖아? 다소의 폭거도 허용되지 않을까 싶었어. 응.”
“어....”
“그런데 말이야, 실이 도와주겠다더라고.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요!’ 라고 의욕이 넘쳐서 말이야. 그러다 보니 네 컴퓨터에 도달하게 됐지. 이야, 놀라워. 영상이 꽤 많이 있더라고? 내 명령대로 히어로들을 차례차례 세뇌하는 것도, 남자로서 한 명 한 명 성적으로 함락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해. 칭찬해줄게. 쉬운 일은 아니지. 물에도 불에도 아랑곳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내 부하에게 박수.”
“하하, 칭찬 받으니 부끄럽네요. 도로시랑 애플에게 검사받으려고 세뇌할 때는 항상 촬영을 해두고 있거든요. 뭐, 단순히 나중을 위해 소장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요. 그걸 봐버리셨군요.”
“응. 컴퓨터에 보존해 놓은 네 영상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이더라고. 이야, 대단했어. 하하하! 역시 내 부하야!”
“하하하하, 그렇죠. 보스의 부하가 좀 대단하긴 하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아하하 웃었다.
“...그런데 그 영상에, 나도 있더라고.”
순간 공기가 쩌적, 얼어붙었다.
......
...............
........................................음.
그렇지. 내가 세뇌하는 과정을 찍어서 보존해 둔 거니까, 당연히 보스의 영상도 있지. 이건 너무 도가 지나쳤다 싶어서, 암시로 지워버렸던 내용도, 전부.
솔직히 컴퓨터 얘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보셨습니까?”
“응. 봤어.”
“...하하.”
“응? 웃는 거야? 나도 따라 웃으면 돼? 하하하하.”
“아, 감사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
타닷!
도망쳐야한다.
나는 뒤로 돌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리려 했다.
“【멈춰】.”
“으엇?! 다리가 안 움직여...!”
다리만이 아니라, 온몸이 밀랍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게 된 내게, 보스는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스로 고개는 돌릴 수 있어서, 그런 보스를 쳐다봤다.
“그 뒤로도 말이야, 실이 도와줘서 13호의 발자취를 계속 따라가 봤어. 응. 이야, 놀랍더라, 그 여자. 시간을 돌려서 과거의 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더라고. 네가 심심할 때면 나한테 개처럼 기게 만들거나, 내가 너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세뇌를 걸어서 내가 샤워하는 내내 지그~시 바라보거나, 이야, 상상도 못한 이벤트가 참 많더라고. 영상으로도 남지 않았던, 그런 것들까지. 이럴 수가, 싶을 정도로 많았어.”
보스의 어깨 너머로, 기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즐겁다는 듯 히죽이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저 여자, 나를 파멸시키려고...!
역시 닥터의 수하인 거야!
내 약점을 찾아서, 싸우기도 전에 파멸시키려고 보내진 스파이가 분명해!
“보스! 속지 마세요! 모든 게 저 여자의 계략입니다! 여기서 내분을 일으키는 게 저 여자의 속셈――”
“입 다물어 줄래, 13호.”
미소지으며 내는 담담하게 깔린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하아, 정말. 13호. 13호. 내 사랑스런 부하 13호. 이럴 수가, 이렇게나 못된 아이인 줄 처음 알았잖아.”
“보, 보스....”
보스가 내민 손가락이, 내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까지 스르륵- 내려왔다.
그 모습이, 손길이 너무나도 요염해, 나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보스는 그대로 내 귀에 입을 가져오더니, 훅, 하고 숨을 불어넣고,
“못된 부하에게는, 벌이 어울리겠지?”
요염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 *
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113번 관절이 반대로 비틀어진다.】”
“끄오오오오옷...!”
“【27번 관절은 왼쪽으로 꺾인다.】”
“쿠아아아아아아아?!”
“【13번과 201번은 서로 붙는다.】”
“후오오오오오오오?!”
나는 보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온 몸의 각종 관절이나 기관부가 기괴한 인형처럼 비틀려졌다. 분명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되었을 것 같은데, 보스는 시종일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무서운 여자...!
“음. 다 모였나?”
그리고 적당히 보스의 화가 풀렸을 무렵, 보스는 실과 메이벨, 그리고 일과를 마치고 기지에 들른 스페이드와 클럽, 체크까지도 모두 불러, 기지의 라운지에 모이게 했다.
모두가 소파에 앉고, 보스는 바닥에 네 발로 엎드린 채 의자 상태가 된 내 위에 자그마한 엉덩이를 올리고, 모두를 돌아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렇게 모이게 한 건 다름이 아니야. 이 여자를 믿어달라고, 내가 직접 보증하기 위해서다.”
“보스?!”
“넌 조용히 해, 13호.”
“후오!”
보스가 손에 든 채찍으로 내 엉덩이를 때리자, 기분 좋은 소리가 나와버렸다. ...어째 나도 참모화가 되어가는 느낌인걸....
“뭐, 일단 일의 발단부터 설명해겠네, 모르는 사람도 있을테니.”
보스는 모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나와 메이벨이 실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실이 닥터의 세뇌 아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도 안 돼... 실 대장이....”
가장 처음 반응을 보인 건 스페이드였다. 의심의 빛이 깃든 눈길로 실을 쳐다보자, 실은 쓰게 웃으며 손을 저어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확신하는 거냥께. 대장이 세뇌에 걸렸는지 아닌지.”
이어진 건 메이벨의 목소리. 계속해서 고민해왔던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나름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미 한 번, 엔데라는 동료에게 배신당했던 그녀다. 그만큼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
보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엉덩이를 채찍으로 찰싹 두드리고, 루즈가 칠해진 탐스런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된다고 생각해. 숨기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남김 없이.”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실. 진실만을 만하도록 해. 거짓은 허락하지 않겠다.】”
항의하려는 벨의 목소리를 자르고, 보스가 말했다.
【언령】.
생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말대로 따르도록 하는 능력.
“【실. 네가 우리의 편이라면 저항하지 말고 내 명령에 따라라.】”
실의 몸이 움찔 떨렸다.
대량의 마력을 소비해 저항하는 상대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상대가 순순히 받아준다면 그녀의 능력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지금, 실은 그녀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힘으로 저항하려 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 여러명의 히어로들이 눈치챌 것이다.
보스는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먹혀드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실. 너는 우리의 적인가?】”
실은 고개를 저었다.
“【실. 너는 닥터의 편이야?】”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
“【실. 너는 우리에게 이 건에 관해 숨기고 있는 일이 있나?】”
이번에는, 실은 고개를 젓지 않았다. 고민하는 듯 하더니,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실. 네 얘기를 들려줘. 이 건에 관하여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네가 모르는 사실까지 포함해 우리에게 알려주도록.】”
보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실은 그 말에 각오하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알겠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겠어?”
“문제 없어. 필요한 얘기니까.”
보스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벨을 흘끔 쳐다봤다. 메이벨은 긴장한 얼굴로 실을 쳐다보고 있다.
“...맨 처음에, 나는 라헤에게 찔리려던 순간 미래에서 지금으로 트립해왔다고 했잖아?”
그렇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거, 사실 거짓말이야. 데헷★”
“““뭐?!”””
그게 거짓말이라고?!
그럼 역시 이 여자는 믿어선 안 되는게....
“아, 아니! 전부 거짓말인건 아니고, 결과적으로 보면 맞아! 분명 미래에서 현재로 날아온 건 맞거든! 라헤한테 찔려죽을 뻔한 것도 맞고! 이야, 정말 라헤는 치트키 같은 애라서, 내 능력으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죽기 직전에 무슨 일인지 멋대로 능력이 발동되어서 말이야, 시간을 이동했거든. 이것까진 전부 사실!”
실은 다급하게 보충하더니, 그런데 말이야, 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시간을 이동하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이동해 온게 이 시간대가 아니라――‘10년 후의 미래’였다는 것 뿐이야.”
이건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라며 실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