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38 쓰레기 빌런과 양아치 히어로의 만남은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1)
그것은 어느 미래의 이야기.
“......완전히, 당해버렸네.”
“죄송합니다, 대장님.”
4번대의 대장, 실.
대장의 상징인 푸른 전투복을 입은 그녀는, 지금 이곳저곳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쓰러져있다.
이곳은 ‘닥터’의 아지트, 눈 앞에 있는 것은 ‘닥터’가 세워둔 최강의 파수꾼과 배신한 부하인 엔데.
【시간조작】이라는 규격 외의 능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마찬가지로 규격 외의 능력을 가진 파수꾼을 앞에 두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쉽네. 아슬아슬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녀 역시 대장. 상대가 규격 외라도, 자신의 능력이 묻히더라도 어떻게든 하는 것이 대장의 소임이니만큼, 정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한 틱 차이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뻔했는데――
배신으로 인해 그 균형도 단숨에 무너져버리고,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실은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벨은 어떻게 됐어?”
“죽었습니다.”
엔데의 즉답.
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그녀를 떠올리며, 실은 눈을 내리깔았다.
“진짜?”
“‘닥터’의 명령이었던지라.”
“...그렇구나.”
탕-!
총신으로 변한 엔데의 팔이 올라오고, 한줄기 탄환이 매정하게 쏘아졌다. 그러나 탄환은 실에게 닿기 전에, 그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과연, 대장님. 마력이 거의 다 떨어졌을 텐데요.”
총알은 실과 엔데의 사이에 꼼짝 않고 멈춰있었다. 실의 능력으로 날아오는 총탄의 시간이 멈춘 것이다.
이래서야 더 이상 쏴봐야 총알 낭비다.
“...부하한테, 대장을 죽이게 할 수는 없지.”
“아직도 부하라고 해주시는 건가요.”
“그래. 적어도 이 손으로 직접 징벌을 때려주기 전에는 말이지.”
“상관은 없습니다만.”
엔데는 옆을 돌아봤다.
“그럼 파수꾼 씨... 아니, 라헤 대장님. 죽여주세요.”
“.......”
엔데의 옆에 서있던, 기묘한 헤드기어를 쓴 라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에 쥔 칼을 들어올렸다.
실의 【시간조작】의 능력을 무시하고, 그녀의 칼은 거침 없이 그녀의 흉부 한복판을 꿰찔렀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어느 미래의 이야기다.
* * *
시간을 되돌려 다시 현재.
보글보글,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익숙한 실험실 특유의 약 냄새에, 참모는 묘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잠시 잠에서 깨어나 멍하니 생각에 잠기려니, 이제는 익숙해진 닥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 정신을 차렸나 보네.”
“......최악의 아침이네요.”
“그래?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쾌적하게 재워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악취미적인 실험대 위가 말입니까?”
그 말대로, 참모가 누워있는 곳은 수술대가 연상되는 외과용 의자 같은 것이었다. 거기다 이것저것 마개조가 되어있어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사용처를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해보이는 물건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시트는 푹신하고 의외로 인체에 맞춘 구조여서 그런지 눕는 감각은 편안하지만, 웬만한 정신으로는 휴식 같은 걸 취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닥터는 턱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해. 그도 그럴게 나, 거의 잠을 안 자거든. 졸리고 피곤할 때면 약으로 뇌를 활성화시키고, 자는 건 거의 나도 모르는 새 정신이 툭 끊어져서 기절하는 정도고... 응. 그래서 편안한 잠자리라는 게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가거든. 인체공학지식을 이용해 만든 <특제수면의자>로는 부족한 모양이야. 감상을 들려주면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과학도 개발도 트라이 앤 에러를 반복해야 제대로 된 게 나오는 법이니까.”
“뭐, 일반적인 견해에서 말한 것 뿐이지, 딱히 개선을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불편하면 어쩌나 했거든.”
닥터는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우리 누나가 ‘보스’는 엄청 소중히 여기는 것 같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참모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닥터’라는 별명의, 도로시의 동생이라는 과학자는 자신을 【어비스】의 보스인 바이올렛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도로시가 그렇게 속인 거겠지, 누나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불쌍할 지경이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손대지 않는 겁니까. 의외로 신사로군요, 과학자 씨는.”
“응? 손을 대?”
“나름 매력적인 외모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의 저는.”1
참모가 가볍게 웃으며 유혹하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들어 올린 가녀린 손목에 걸려있는 수갑의 사슬이, 차르륵- 떨어져 내렸다.
“구속되어 아무 것도 못하는 무방비한 여자를 눈 앞에 두면, 뭔가 장난이라도 쳐보고 싶어지는 게 남자라는 생물이니까요.”
본래 참모는 남자다. 나름 키도 크고, 적당한 운동으로 보기 좋은 근육도 붙어있었으며 어쨌든 20년이 넘는 인생을 남자로서 살아왔던 몸이다.
그러나 지금, ‘닥터’의 눈앞에 있는 참모는 전혀 달랐다.
완전한 순백, 이라는 이미지가 구체화 된 듯한 여성이 눈 앞에 있다.
설국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차가운 은발에, 색소가 옅은 눈동자. 오밀조밀 정교한 조형의 이목구비는 마치 인형 같은 차가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게 하는 붉은 입술이 그런 이미지를 가볍게 불식시켰다.
팔도 다리도 남자에 비해서 확연하게 짧고, 여성스럽게 가녀렸다. 지나치다시피 가녀린 팔다리는 수저 이외의 것을 들 수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병약해보였다.
어딘지 신비로운 요정을 연상케 하는 모습은, 지나가던 남자들이어도 열이면 열 넋을 잃고 쳐다볼만했다.
그런 요정 같은 여성이, 얇고 심플한 박스티 한 장만 입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정숙하고 지긋하며 침착한 남자라도 짐승으로 바꿔버릴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흐음....”
확실히, 그 외모는 닥터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분명 매력적인 ‘암컷’이라고.
보스로서 사람의 위에 설만한 카리스마가 될 정도의 외모라고(물론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성이 보스라는 건 닥터의 착각일 뿐이지만).
“누나 외의 사람한테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미안할 정도야.”
닥터는 진심으로 미안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게, 대부분의 여자들은 지성의 조각도 보이지 않은 암컷들 뿐이니까. 그런 여자들을 여자라고 부르는 게 옳은 일일까? 벌레나 호박이라고 불러주는 게 차라리 실례가 안 되지 않아? 물론 보스, 당신에게선 나름 괜찮은 지성이 느껴져. 그러니까 조금 수준을 높여줘도 좋겠어. 음... 두리안 정도면 어때?”
“호박보다 심한 악의를 느끼는데요.”
“어라, 두리안 싫어? 난 호박보단 그 쪽이 더 좋은데. 뭔가, 과학적으로 조사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잖아. 특이한 조형이라던가, 냄새라던가.”
냄새나는 여자라는 것 같아서 싫다.
“그나저나 보스라는 사람이 여자여서 다행이야. 응. 도로시 누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질투 나서 죽여버렸을 거니까. 온갖 약물로 몸을 흐물흐물하게 녹여서 도로시 누나 앞에서 추한 꼴이란 꼴은 다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하수구에 흘려서 보내버렸을 거야. 누나의 소중한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네.”
“......【어비스】에 남자 멤버도 있는데요?”
“응. 참모랑 13호란 사람들이 있다며? 알고 있어. 이미 사형 준비는 끝났으니까 잡히기만 하면 언제든지 끝장내 줄 수 있어. 도로시 누나랑 같은 지붕 아래서 산 남자들이 있다니, 용서할 수 없지.”
기준이 심각하다. 중얼중얼하는 닥터가 악귀나찰 같은 표정을 짓기에, 지켜보던 자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여자로 바꿔 준 도로시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자, 그럼 식사하기 전에... 일단 일과를 시작할까요.”
“.......”
참모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닥터의 손에 들린 것은 묘한 디자인의 헤드기어. 도로시의 기술을 모방하고 응용해 만든 세뇌도구.
“누님의 소중한 보스에게 손을 대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목줄은 필요하니까. 안전한 게 좋잖아. ...그래도 아직까지 이렇게 세뇌에 저항하다니, 솔직히 놀랐어.”
“......흥. 얼마든지 해 보시죠. 당신의 조잡한 세뇌에는 걸리지 않을 거니까요.”
“그 대장님까지 세뇌한 기술인데 조잡하다니... 뭐, 이것도 트라이 앤 에러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낸 이상, 너는 좀 더 나은 세뇌기술을 위한 실험대가 되어줘야겠어.”
참모의 자그마한 머리에, 닥터는 손수 세뇌용 헤드기어를 씌우고는 전원을 올렸다.
“으...읏......!”
이어서 조금 후, 뇌를 폭력적이게 주무르고 유린하는 듯한 감각에, 참모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신음을 흘렸다.
* * *
“......지금은 참모가 나 대신 붙잡혀 있다, 이거구나?”
도로시에게 최면을 거는 것으로 대강의 일이 일단락 되고, 13호는 곧장 도로시의 지배하에 있던 이들의 세뇌를 풀었다. 스페이드와 클럽을 포함해, 자신의 방에서 인형처럼 멍하니 있던 보스까지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네, 보스. ...죄송합니다. 벌은 받겠습니다. 쫓아내셔도, 죽이셔도 좋습니다.”
“됐어. 도로시는 【어비스】에 있어 없어선 안 될 인재인걸. 배신에 대한 벌은 받아야겠지만, 그것도 이미 13호한테 받은 모양이고.”
바이올렛의 말에 도로시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을 붉혔다.
세뇌로 인해 <냥냥메이드>가 되어있었던 일은 꿈처럼 희미하게 기억이 날 뿐이지만, 어쨌든 무지하게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나를 세뇌하고서도 굳이 13호를 막을 때 보내지 않은 건, 나를 걱정해서 잖아. 참모를 대신 보낸 것도 그렇고. ...그 상황에도 충의를 보여준 것,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해.”
“...제 동생이 어떻게 해서든 인질을 원했으니까요. 제 여린 부분을 아는 만큼, 흔들리지 않게 할 패가 필요했던 거겠죠.”
그렇다고 인질로 쓰라고 진짜 바이올렛을 순순히 넘겨 줄 수도 없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동생인 닥터, 도토리가 【어비스】의 면면들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13호의 얼굴이야 알려져 있지만, 참모나 보스인 바이올렛의 얼굴은 모른다.
그걸 이용하기로 한 결과가 지금이다.
“그래도 용케 속아 넘어갔네. 하긴, 아무리 네 동생이라도 남자 손에 보스를 맡기는 건 그렇지. 여자를 무방비하게 붙잡아 놨으면 일단 뭔가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게 국룰이니까!”
“아니, 그건 13호 너 같은 벌레 자식이나 그렇지.”
도로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우물쭈물 곤란한 눈치로 힐끔힐끔 13호와 바이올렛,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그게... 내 동생 녀석도 어비스의 보스가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거든... 내가 실수로 한 말이 있었다던가... 보스가 내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계속 추궁한 게 있어서.... 응. 그래서 알아버렸다고 할까.”
아무래도 그 닥터라는 인물은 보스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참모는 남자다.
그런데 어떻게 참모를 보스 대신으로 인질로 맡겨놓은 거지?
의아해 하며 마주보는 두 사람에게, 도로시는 머뭇머뭇 사실을 토로하고――자초지종을 들은 바이올렛과 13호는,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을 구르며 미친 듯이 웃었다.
“히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네.”
대강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잠깐 볼일을 보기 위해 도로시며 보스와 함께 있던 방에서 나왔다.
도로시의 고백에 따르면, 참모는 여자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보스 대신으로 보내는 인질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지만, 정말이지 기상천외하다고 할까 상상도 못한 결과다.
“여체화 된 참모라... 진짜 상상이 안 가네.”
적당한 근육이 있고 지적이고, 거기다 미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질투가 날 정도로 나름 남자다운 생김새의 참모다.
그런 녀석이 여자로 변했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안 간다.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에서 여장 콘테스트라면서 여장해서 나온 동급생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어색한 모습이려나. 그 얼굴로 가슴이 달렸으면 어떡하지. 와, 진짜 상상이 안 가. 그보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역겨울 것 같아.
“뭐, 사진 찍어서 두고두고 놀려줘야지.”
어쨌든 목숨의 위험은 없는 모양이고, 단순히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 참모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위기감이 결여된다. 어쩐지 그냥 둬도 알아서 빠져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하아."
물론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지만.
소중한 부하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그래도 보스는 무사히 구출했고, 도로시가 이쪽 편에 있다. ...그러니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버텨줘라, 참모. 금방 구해줄테니.
그리고 여자가 되어버린 꼴사나운 모습을 열심히 놀려주마!
사진으로 박제해서 영구보존 해주겠어!
깔깔깔!
“그보다 일단 화장실, 화장실.”
아지트는 넓으니 만큼, 방만이 아니라 매 층마다 공용 화장실이 있다. 남녀 공용이므로 당연히 노크를 하는 게 예의다.
하지만 그렇게 긴장했던 도로시 공략 작전이 무사히 끝나고, 참모의 여체화라는 극적인 소식을 접한 지금의 나는 그걸 깜빡잊었다고 할까, 생각도 못했다. 머리가 멈춰 있었다. 누군가 화장실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벌컥, 문을 열자.
“.................어.”
".................하?"
나를 바라보는 동그란 두 눈동자를 마주쳤다.
구불구불한 컬이 마구 들어간, 세련된 조형미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어딘지 유쾌한 듯 하면서 매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누군가가 있었다.
상상도 못했다.
누가 생각이나 할까보냐.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상상했을까.
익숙한 화장실 풍경 속에.
나도 여러번 사용했을 새하얀 변기 위에.
――하반신을, 국부를 그대로 드러낸 4번대의 대장님이, 다소곳하게 다리를 오므린 채 앉아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