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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화 〉#37 패배한 과학자는 빌런에게 말 못할 짓을 당한다고 합니다(1) (162/271)



〈 162화 〉#37 패배한 과학자는 빌런에게 말 못할 짓을 당한다고 합니다(1)

예전의 나야 두려울  없는 최강최악의 빌런이었으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나쁜 짓을 했다. 예를 들면 유명한 미술전의 티켓을 몽땅 사서는 미술에 꿈을 꾸고 있는 아이들이 잔뜩 있는 커다란 고아원에 공짜로 뿌려버린다던지.

후후, 고명한 아티스트들을 끌어모으려던 미술전에 아이들만 득시글해지다니,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꿈과 희망과 재치와 유머로 가득한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고생했을 미술전 스태프들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스태프였다면, 하고 생각하면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린다.

어쨌든.


그렇게 악하고 무서운 짓을 하더라도, 하고 싶으면 하면 됐다. 인당 티켓 제한 따위 있더라도 그냥 정면에서 힘을 보이면,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다. 물론 미술전 티켓 때는  팔리는 티켓을 전부 사줘서 고맙다면서 스태프가 큰절을 올렸다지만, 그건 그  이야기고.

어쨌든.

힘이 있었을 때야 정면에서 부딪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삐끗하면 당하는 것이다. 최약체 13호인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그러니 그런 내가, 단순히 창문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정도로 안심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 꼼수를 생각해뒀다, 그런 것이다.


안전빵이라고 할까.


반복하지만, 그런 것이다.



* * *



그리고 도로시의 실험실 안.


나는 새근새근 곤히 잠에  도로시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애플과 코코는 뒷수습을 위해 밖으로 내보냈다. 무엇보다 지금은 단 둘이 있고 싶었다.

“......자는 모습은 귀엽네.”


이 여자, 불면증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번도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알고지낸지 몇  째인데, 처음 보는 자는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여자애... 같았다.


‘여자애라고 할까,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겠고.’


성인이겠지? 일단?


다만 영양섭취가 제대로 안 되는지, 키도 작고 팔다리도 짧고 말라서,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같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영양섭취만 하면 된다면서 칼로리메이트와 닥터페퍼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보고 기겁했더랬지.

“...쿡.”

저도 모르게 실 없는 웃음이 나왔다. 도로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눈을 찌를 것 같은 머리카락을 슬쩍 걷어주었다.


티격태격하면서, 자그마한 집단에서 최고로 유명한 빌런 조직까지, 그리고 몰락하고 추락한 지금까지도 함께해주었던, 괴짜 과학자.

“쯧,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지.”


도로시에게는 추가로 세뇌약을 투여했다. 과연 세뇌와 최면의 명수라고 할까, 애플은 애초에 세뇌향도 어떤 도구도 필요 없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이게 없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애플은 나가기 전까지 도로시의 정신방벽을 무너뜨리고, 내 명령과 암시가 깊게 배어들도록 설정해두었다. 세뇌약이 돌고 있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도로시는 그대로 따르는 인형이 되어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쩔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도로시를 깨웠다.

“도로시, 도로시. 일어나라. 일어나. ...일어나도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도로시는 “우음...”하고 신음하더니,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1...3호....”

“일어났어? 아직 잠이 부족하려나? 그 다크서클이 지워지려면 한 사흘은 내리 자야   같은데.”


“...그만큼 오래 자면 오히려 피곤해지는 법이야. 그리고 이건 유전이니까 잠을 자고 말고는 상관 없어.”


그런 모양이다.


“그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분명 너를 세뇌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도로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눈을 몇 번 굴리더니, 이내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느 때처럼 야비한 책략이겠지.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듣고 나면 시시해서 죽고 싶어질 지도 모르는데?”

“......과학자로서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용납못해. 책략가는 아니라지만 호기심은 있어.  들이지 않고 당장 불어  오물 덩어리야.”

나에 대한 평가가 너무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복수로 도로시의 코를 손가락으로 집어 빙글빙글 돌려주었다. "하지마...!"라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걸 보니 마음이 풀렸다. 우후후후, 맨날 나를 괴롭히던 과학자가, 지금은 내 손에...!

“뭐, 방법이라곤 해도 진짜 별 거 아니야. 애초에 코코가 네 세뇌에 걸리지 않았을 뿐이니까.”

“코코가? ......그럴 리가! 참모의 손에 떨어진 그 여자를, 내가 직접 깊이 조정했다고! 몇시간이나 써서!”


“애초에 그 여자는 참모의 세뇌도 제대로 안 먹혔거든.”

코코  여자는 하여간 교활해서,  걸린 척을 하고서는 뒤통수를 때리는 여자다. 그녀의 능력인 【미라쥬】에, 첩보부에서 갈고 닦은 가공할 연기 능력에다 조심술(操心術)에 대항하는 정신제어능력까지, 말 하자면 강적이다.

그렇기에 참모가 불평을 한 가득 담은 보고서를 올린 적도 있었지.

“아니, 그치만 세뇌 성공 사례의 보고서를 전부 보면서, 성격 유형이나 약점이나... 모든 걸 분석했다고! 있는 모든 자료를 써서 세뇌를 걸었는데... 거기까지 해놓고 세뇌가 걸리지 않다니, 그게 무슨....”


“그거, 조작된 거야. 그 여자, 평소에도 참모한테 골탕 먹이겠다면서 능력으로 모습을 감추고 열심히 이곳저곳 쑤시고 다녔더라고. 자기한테 불리할 만한 정보를 남길 리가 없지.”


겸사겸사 더미 정보를 두었을 뿐이다. 자료가 엉망이 되었다면서 참모가 울면서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가짜 정보... 맙소사.”

도로시가 신음했다. 정말이지 코코  여자는, 감당이 안 된다.


“뭐, 애초에 그 애플의 세뇌에도 걸리지 않았던 여자라고. 세뇌가 아예 안 먹혔다면 옛날 옛적에 도망갔을 테지만, 뭐... 참모의 책략으로 겨우 붙들고 있는 정도랄까. 그런 거야.”

그리고 나는, 우리는 아리아에게 부탁해서 그 코코와 접촉할 방법을 예지했다.

통신은 안 되고 도청당할 가능성도 있으니, 혼자 아지트 밖으로 나올 때라던가... 뭐,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접촉하게 되었다.


 뒤로는 도로시의 동향이나, 아지트에 있는 인원이라던가 스파이로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오늘이 습격하기 딱 좋다는 것도, 코코가 알려준 정보다.

“애초부터 코코를 세뇌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구나....”

“온갖 속임수로 세뇌를 회피하는 그 녀석은, 참모가 아닌한 당해내기 어렵지... 책략가가 아닌 이과 머리의 과학자인 너로는 절대 세뇌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도로시는 허탈한  너털 웃음을 흘렸다.

“그 편지도....”

“코코가 갖다 놓은 거야.”


“너희들이 굳이 정면에서 돌입한 것도, 애플을 구출해  틈을 만들기 위해?”

“정확해.”

나머지는 뭐... 붙잡힌 나를 그녀의 능력인 【미라쥬】... 환상과 환각 능력으로 구출해내고, 대신 애플을 눕혀놓았을 뿐이다. 도로시의 눈에는 줄곧 내가 잡혀 있던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내성이 없는 상대에겐 오감마저 속이는 그녀의 능력에, 도로시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속아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도로시는 세뇌하려던 순간, 되려 애플에게 세뇌의 늪에 빠졌다.


“하지만 체크 그 여자, 아무 말도 없었는데....”

“혹시나, 만에 하나 누군가 한  너한테 생포당할 경우를 생각했거든. 굳이 체크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아리아라도 네 전력을 전부 집중시키면 붙잡혀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세뇌를 대비해서――”


“기억을 지웠다, 라는 거구나. 나에게 심문 받아도 괜찮도록.”

뭐, 세뇌도구가 없는 시점에서 키워드를 이용해 트랜스 상태로 만들 수 있던 건 아리아와 체크 뿐. 메이벨에겐 특히 조심해서, 가능한 성가신 인원 한  정도만 붙들고 어딘가 숨어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놓고서 방심하고 있다가, 체크한테 붙잡힌 건 예상 외였지만. 원래는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너를 세뇌하려 했던 건데... 뭐, 이렇게 되었으니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일까. 어때?”


“.......”

도로시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는 것도 실망한 것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완...패....... 하아... 꼴불견이네, 나. 배신까지 해놓고서 요 꼴이라니.”

“내가 너무 유능해서 미안해?”


“우와, 때리고 싶어.”

도로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결국 13호 네가 이겼어. 내 이야기도 전부 들었지? 들은 소감이 어때? 나는 은인도, 가족처럼 생각하는 어비스의 동료들도, 나를 신뢰해주던 보스도 참모도... 너도 버리고, 전부 말처럼 사용했어.”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런 나를, 경멸해?”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경멸? 뭔 소리야? 짱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유치해... 너야 말로 뭔 소리야. 꼴불견이잖아 이거. 배은망덕하고.”

“아니, 그치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엄청 빌런답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도로시는 그 말이 의외라는  눈을 크게 뜨고는, 이어서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다.


“참모가 말한 대로네....”


“뭐라고 했길래.”


“안 알려줘.”

“치사하긴.”


그 뒤로 몇 마디 실없는 말을 주고 받았다. 도로시는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했다면 내가 혼내줬겠지.

빌런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뭐가 잘못일까.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빌런 짓을 하는 건데.

굳이 정상일 필요는 없다. 모난 곳이 있어도 좋다.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묵인해주는 게 아니라, 이쪽도 이쪽 방식으로 깎아내거나 주장하면 되는 거다.


서로 의견을 충돌하면서 사는 세상이, 억지로 맞춰가려는 세상보다는 조금 더 재밌다. 빌런이라서 그런 걸까.

“......슬슬 시간이 됐어. 끝을 내줘, 13호. ...변태자식.”


“누구보고 변태래.”

“너 어차피 이대로 나한테 야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

“...거짓말로라도 부정해라, 이 변태 오물 쓰레기가.”

“너야말로 말 조심해. 내가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너를 능욕할지, 네 태도에 따라 급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도로시의 얼굴이 처음으로 창백해졌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데도 덜덜 떠는 것 같더니, 그래도 후, 하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까.”


“응?”

“처, 처음이니까... 사, 상냥하게... 해주라....”

도로시의 그 말을 듣고.

마음 속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져 내린 기분이 들었다.


이 건방진 과학자님이!

맨날 나를 매도하는 이 여자가!

맙소사!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이럴 수가!

“뭐, 뭐야 그 얼굴은... 으, 으아... 자, 잠깐만.  갑자기 가까이 오는 거야?! 떠, 떨어져! 마음의 준비를 좀 하게... 으아아아아아....”

“응응! 상냥하게 해줄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로! 나만 믿어! 응! 그럼 도로시, 이제 내가 키스하면 ‘인형’ 상태가 되는 거야. 네 의식은 잠에 들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고 충실히 마음에 새겨 넣는. 알겠지?”

“으, 으으으으...!”

도로시는 분하다는 듯 눈을 꼭 감았지만,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런 도로시의 머리를 뒤에서 붙들고, 슬쩍 들어올리며――그 자그마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작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하다.

“........”

도로시의 몸에서 덜컥, 힘이 빠져나갔다. 반쯤 열린 눈꺼풀 아래에는 빛을 잃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도로시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역시 반응은 없다.


【어비스】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이자 배신자였던 도로시는, 지금 나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형으로 전락했다.

이제 남은 건 전리품을 취할 뿐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떤 암시를 걸어볼까...."


후후후후, 어떤 암시라.... 가능하면 맨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암시를, 제정신을 차리면 부끄러워서 죽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재밌는 암시를 걸어주고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게,  과학자한테 쌓인게 많거든!

오래 지내면서 좋은 추억도 있지만, 그만큼 쌓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모든 울분을, 오늘 이 자리에서 풀어주마!


"......오,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후후후후 웃으며, '인형' 상태의 도로시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기대로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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