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3화 〉#33 빌런은 양아치 화가를 만났습니다(4) (153/271)



〈 153화 〉#33 빌런은 양아치 화가를 만났습니다(4)

메이벨은 체크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의심의 등불이 켜져버린 그녀는 손쉽게 우릴 놔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위험하다.


지금  상황에서 체크의 정체가 들통나버리면, 스페이드에 이어 또 다른 7번대의 멤버가 【어비스】와 연관이 있다는  들통나 버린다. 한 명도 아니고, 두명.

이래서야 7번대 자체가 의심받게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7번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감사가 올지도 모르고, 혹은 모종의 조치가 취해질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세뇌에 대해 들통나 버리면 여러모로 향후가 불안하다. 거기다 【어비스】의 토벌 우선도도 올라갈테고, 자칫 잘못하면 【시궁쥐】 때처럼 대장급들이 잔뜩 몰려오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즉, 체크의 정체가 여기서 들켜버리면 안 돼!

“저, 저기, 우린 바쁘니까....”

“그, 그래요~~! 거기다 사투리라니, 뭔가 잘못 들으신게 아니신지~! 오호호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메이벨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나도 체크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과연 동물적 직감이라고 해야할지, 메이벨은 끈덕지게 체크를 붙잡은  놓아주지 않고, 더더욱 진한 의심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잠깐 기다려보랑께. 신분증 일단 보여주고.”

“여기요, 신분증.”

체크는 손목에 매달아두었던 주머니에서 다급히 신분증을 꺼내서 보여줬다. 참모의 철저한 준비로 가짜 신분증 정도는 이미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메이벨은 더더욱 눈썹을 오므렸다.

“신분증을, 지갑에 넣어둔 것도 아니고 바로 꺼냈다...? 뭔가, 이상한데.”

“(으아아아아악! 우, 우짜면 좋겄나, 13호?!)”

“(치, 치, 치, 침착해! 침착하고 일단 쥐구멍을 찾자.)”

“(느그부터 침착하그라 멍청이!)”


메이벨에게 들리지 않도록 눈빛으로 소통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생각해봤다.

......없다!

‘이래서야 위험해... 이 여자는 나름 부대에서 꽤 급이 높은 대원이니까. 다른 어중이떠중이 대원이었다면 단순히 확인해야할 소문 정도로 끝나겠지만,  여자가 확언하면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아직 이 자리에 있는 4번대 히어로는 이 여자 밖에 없다. 엔데라던가 다른 대원들은 다른 곳에 순찰을 도는 건지, 혹은 이쪽을 주시하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없애버릴까.


없앤다고 해도, 그저 그녀를 무력화시키고 어딘가로 끌고 가 기억을 지워버리는 정도다. 거기다 그게 가능하다면 추가적으로 암시를 심어 엔데에 이어 4번대의 일각을 또 하나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어쩐지 미묘한 촉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니! 거 언냐, 혹시 7번대의――”


결단의 때다. 결의해야만 했다. 이대로 체크의 정체가 드러나버리며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체크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으나, 체크가 별안간 예고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된 거 같데이. 좀 이른 거 같지만....”


“응?”

체크가 중얼거리자 메이벨이 의아하다는 듯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축제 거리의 일각이 불꽃과 함께 날아갔다.


* * *

애초에 이곳에 온 것은 싸우기 위해서  것도 아니고, 메이벨을 어떻게 하기 위해 밑밥을 깔아두려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설득이나 회유를 시도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 속이고 기만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정찰’을 위해서다. 다른 게 아니다.

엔데 때도 단순한 정찰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정말 예상치 못하게 일이 꼬여버렸다.
어쨌든.

이번 정찰의 목적은 메이벨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그녀의 능력이나 위험도, 습관이나 약점 같은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일상적인 순찰 업무 같은  지켜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히어로의 히어로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지만 빌런이 필요하다.

최근 빌런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때맞춰 우리가 감시할 때  앞에서 빌런이 날뛰길 바라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생각한 것이,

‘이거 그냥 짜고 치면 되지 않을까?’


직접 빌런 범죄를 일으키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심플한 계획이 세워졌다.

――‘곧 14시가 되네요.’


라면서 체크를 통해 시간을 확인한 것도, 사전에 준비해 둔 깜짝 게릴라 빌런 테러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물론 직접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럴 배짱이 있었으면 당장 4번대 기지에 쳐들어가고도 남았다.


상대의 정확한 능력을 모르는 이상, 적당히 상대의 주의를 끌만한 화려한 사고를 치고, 그리고 능숙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장기말.


마침  좋은 인재가 있었다.


‘【시궁쥐】의 두 사람.’

에이와 씨씨. 한쪽은 폭발물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능력, 한쪽은 투명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도로시의 입회 하에 철저히 세뇌해 【어비스】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있다.

그런  사람이 슬금슬금 4번대 히어로들, 특히 메이벨을 자극해서 아슬아슬하게 전투를 하고, 우리는 옆에서 몰래 훔쳐보며, 만약의 사태에는 두 사람의 탈출을 돕는, 그런 계획이었다.

그랬을 텐데――



* * *



펑! 퍼버벙! 콰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악!』


『포, 폭발했어?! 무슨 일이야?!』


『저기 지나가던 커플을 저주했더니 터져버렸어! 능력에 눈을 떠버렸나! 솔로천국! 커플지옥!』

『야, 야! 히어로! 히어로는 어딨어?!』

“무슨 일이...! 앗, 잠깐 기다리랑께!”


갑작스런 폭발에 메이벨이 당황한 틈을 타, 13호와 체크는 단숨에 당황한 인파 틈새를 뚫고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인파에 묻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그리고 조금 전 폭발이 일어난 곳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윽...! 응답! 응답하랑께! 여기는 메이벨!”

귀에 꽂은 단말기에 손을 댄 채 다급하게 외치며 폭발이 일어난 장소를 향해 달려나갔다.


인파 너머에서 메이벨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슬쩍 훔쳐보면서, 체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그야~ 들킬 뻔 했으야. 어쨌든 타이밍 좋게 터져서 다행이구마. 자칫했으면 들켜버렸다카이.”

당연하지만 체크는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렇게 일이 벌어지리란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줄곧 체내시간으로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으니, 지정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일어난 폭발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정도야 자신이 시간을 재는 걸 틀렸거나, 저 쪽에서 부득이한 일이 생겨 계획을 앞당겼거나 들고 있는 시계가 조금 빠르다거나 하는, 그 정도 오차범위로 생각해도  정도였다.


그렇기에 체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13호? 야, 13호! 문디야!  그래  보고, 자빠졌... 노.......”

반응이 이상한 13호의 얼굴을 보고, 그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고 체크 또한 할 말을 잃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파! 뜨거워!!』


『아, 아아아... 다리, 다리가.....!』

『히어로!!! 히어로는 어딨어?! 살려줘어어어어!!! 건물 밑에!  딸이! 아내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대로, 아비규환.


축제로 한껏 들떠있었던 이 국제거리는, 지금 곳곳에서 일어난 폭발과 불꽃, 연기와 비명소리로, 완연한 지옥도의 풍경으로 변해버렸다.

“말도 안 돼....”


13호가  광경을 쳐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걸 13호가 계획했을 리가 없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소심하고 무른 13호가,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을 잔뜩 다치게 하는, 이런 저급하고 유머 없는 테러 따위 용납할 리가 없다.


아니, 안 된다. 넋을 잃을 새도 없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일단 사태를 파악해야한다.

13호는 손목에 매어둔 도로시 특제 통신용 단말기를 꾹꾹 눌렀다. 누구부터 교신해야하지? 참모? 도로시? 보스인가? 현장에 직접 와 있을 에이나 씨씨?

아니, 그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분명 사람들은 다치지 않도록 지시했을텐데. 에이와 씨씨가 폭주했나? 하지만 단둘의 범행으로 치기에 규모가 너무 크지 않나?


물론 에이라면 자유자재로 폭발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지금 한 눈에 보기에도 이 국제거리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단 한순간에.

에이의 능력으로 시한폭탄을 잔뜩 만들어냈나? 아니면....

‘그 녀석들과는 별개로, 혹은 함께... 같은 타이밍을 노리고 테러 범죄를 일으키는 빌런이 있었다거나...?’


최근 빌런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각국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인 이 축제는, 사회에 별에 별 불만을 잔뜩 가지고 있는 빌런들에게는 절호의 먹잇감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하고 생각하니 13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계획이고 뭐고, 완전히 파탄나버렸다.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설상가상으로, 아무리 교신을 시도해도 받지 않았다. 에이나 씨씨는 그렇다치더라도, 아지트에서 대기 중일 참모마저도.


초조함을 숨기지 않고 손목의 통신 단말을 조작하는 13호는, 소매를 꾹꾹 당겨지는 느낌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13호... 저기, 사람들.......”

체크가 소매를 당기며,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체크는 지금 13호...를 넘어서, 【어비스】의 노예이도록 세뇌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그 외의 인격은 죽이지 않았다. 단순한 인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히어로 체크’라는 인격에 ‘【어비스】의 노예’라는 속성을 새로 부과했을 뿐이다.

즉,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체크는 히어로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단 것이고,

“아아... 그래.”


체크의 시선은, 아비규환인 사람들에겐 걱정스런 눈빛을, 그리고 주인이 되는 13호에게는 호소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후우.


침착하자.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이 하나도 파악이  된다. 이런 불의의 사태에도 넓은 시야로 사태를 파악해 줄 참모 등의 후방 대기 인원들에게는 연락이 하나도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쓸데 없이 고민하지 말자.


“체크. 움직이자.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구해.”

“...느그마는 빌런인데, 그래도 괜찮은기가.”


“빌런도 빌런의 미학이 있어. 이 13호님의 빌런론(論)에 반하는 이딴 아름답지도 재밌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빌런 범죄 따위에 내 소중한 관객을 한 사람이라도 잃을 수는 없어.”

“뭔 개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쨌든 느그가 내 주인님이라 다행이라고는 생각한데이.”


체크는 털털하게 웃고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13호도 그 뒤를 따랐다.

여전히 교신이 되지 않는 통신 단말에 불안함을 느끼면서....




* * *

철퍽!

먹물과도 같은, 그러나 먹물과는 다른 새카만 액체가, 메이벨이 벽에 대고 찍어누르는 커다란 붓끝에서 배어 나왔다.

“【푸른 산에 왜 사느냐고 내게 묻기에, 아무 대답 않고 한가로이 웃을 수 밖에. 복사꽃 띄운 물은 아득히 흘러가는 곳, 분명 여기는 인간세상이 아닌――별천지인 것을】.”

폭발로 인해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녀는 조곤조곤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며 좌아아아아아―― 기다란 선을 그었다.


그녀의 뒤에 남은 것은 기다랗고, 그러면서도  수 없는 미(美)가 언뜻 보이는 묵흔(墨痕). 그리고 질척일 정도로 잔뜩 묻은 먹물의 흔적에서, 마치 먹물이 제멋대로 기어나오듯 각종 형상의 짐승이며 도깨비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전부 형상은 다르지만 이것도 저것도 새카만 먹물로 이루어진, 마치 조선시대의 수묵화 족자에서 튀어나온 듯한 몸을 하고 있었다.

먹물 골렘.

메이벨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먹물로 이루어진 사역마들이자, 그녀의 명령대로 마음껏 움직여주는 간이 수족이기도 하다.

“빨리 빨리 움직이랑께, 골렘들!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하고! 빌런처럼 보이는 놈들은 전부 제압해! C구역에 치료계 능력자인 마리아랑 에노가 있을테니까 크게 다친 사람들은 그 쪽으로 빨리 이송해 주고! 새 타입들은 하늘을 날아서 상황을 파악해주고, 다른 멤버들도 찾아 주도록! 이상!”

일갈하듯 크게 명령하고는, 메이벨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빌런이 안 보여. 그리고 다른 멤버들과 통신도 안 돼.’


무슨 일인지, 통신용 단말기가 완전히 먹통이 되어 있었다. 다급하게 스마트폰으로나마 연락하려 했더니, 전파도 터지지 않았다. 여기가 전파가 터지지 않을만한 산골 깊은 곳도 아니고, 거리 한복판에서 요모양이 되었단 건 분명 전파 쪽으로 뭔가 수작을 부린  틀림 없었다. 이딴 짓을 저지른 빌런 놈들이 무언가  것이 틀림 없었다.

이래서는 다른 멤버들과 합류할 수가 없다.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전파도 터지지 않는다. 대장에게 보고도   없다. 지시를 받을 수도 없다.

“――읏! 정신 차리랑께!”

메이벨은 스스로의  뺨을 짝짝 때리며 혼란에 떨어질 것 같은 정신을 돌려놓았다.
자신은 히어로다. 그리고 여기에 곤란해 하는 시민들이 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도 시민들의 행복과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히어로인 자신의 본질이자 의무다.

그것만 생각하자.


사람들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하려면 어떻게 움직이는 게 최선일지 재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이자. 직감에 따라서 움직이자. 혼란스러워할 틈은 없다.

‘그보다, 뭔가 꾸물꾸물 이상한 느낌이 듬시롱~....’


머리가 냉정해지고 나니, 지금껏 눈치 못 챈 ‘직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뭐랄까, 감이  좋다고 할까.

단순한 시위를 위한 빌런 테러...는 아닌 것 같달까.

좀  복잡하게 얽힌 사정이 있는 것 같달까.

‘이런 걸 명확히 검증하는 게 엔데가 할 일인데.’


자신의 ‘직감’은 확실히 쓸만하지만, 그래봤자 그냥 감이다. 예지도, 예언도, 그렇다고 주어진 근거들을 가지고 연산하여 예측하는 것도 아니다. 두루뭉술한 감만으로는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럼 엔데는 어딨으려나~. 일단 그 아이랑 만나면 통신 쪽도 어떻게 되지 않으려나~.”


침착해짐에 따라 원래의 털털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메이벨은 골렘들을 지시하며 직감에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몇이나 되는 수상한 인물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조용히 따라붙고 있었다.




* * *



“으음... 터졌나.”


그리고 어느 실험실.


과학자 다운 무수한 최신예 기기에 둘러 싸인 채, 백의를 입은 한 남성이 실험대 같은 의자에 깊게 눌러 앉은 채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인 ‘닥터’였다.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서는 ‘현장’의 상황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현장’의 소동은 애초에 그가 계획한 것이므로, 소리만으로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계획이 성공했는지 아닌지 짐작할  있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비명과 절망, 혹은 사회의 혼란 등을 즐기는 일류의 빌런이라면 온갖 촬영기기들을 사용해 국제거리의 테러 소동을 직접 그의 눈에 담으려 했겠지만, 그는 단순한 과학자다. 빌런이 아니다. 그냥 그가 바라는 대로 일이 벌어지면 충분하지, 그걸 굳이 눈으로 담고 즐기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필요성도 없었다.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지극한 효율주의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기에 그의 목적을 위해, 국제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을, 평화로운 가정들을 재앙애 빠뜨렸어도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부탁 받은 게 있으니, 아무도 죽지는 않았으면 하네.”

――‘아무도 죽게 하지는 말아 줘.’

닥터는 그가 받은 ‘부탁’을 떠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어려운 요구지만 사랑스런 ‘그 사람’의 말은 꼭 들어주고 싶다. 그렇기에 일단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로는 계산해서 테러를 일으키도록 했다. 부상자는 나와도 그 정도는 치료계 히어로들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하지만 테러도 범죄도 얽히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축제에서도, 매년 압사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망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계산에 실패해서  명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야 그가 자주하는 실험에서도 오차범위다. 1+1=2, 같은 논리로 실험을 시작하더라도 막상 해보면 3이나 4, 혹은 0이 나오기도 하는  과학의 세계다. 짐작과 계산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즉,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계산이 실수해서 아쉽네.


그 정도 감상 밖에는 가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즐기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혐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관심이 없다. 흥미도 없다.

인간미가 없다.


사람에게 흥미가 없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관심있는 사람 외에는 흥미가 없다.

그게 바로 ‘닥터’라는 사람이다.


그렇다.

“응――그래도 사랑하는 ‘누나’의 부탁이니까, 꼭 좀 들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되려나.”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닥터’는 홀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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