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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화 〉#29 그리고 빌런은 분노했습니다(1) (136/271)



〈 136화 〉#29 그리고 빌런은 분노했습니다(1)


“끄응... 13호 녀석.”


어비스의 보스, 바이올렛은 본인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한탄하고 있었다.

최근 자신의 부하가 너무하다. 적의 거물을 붙잡았으니 들뜬 건 이해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보스인 자신에게 소홀해지다니 너무하다. 놀아주지도 않고, 보고도 빼먹고, 저번에는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고 히어로네 기지에 가기도 하고... 결국 참모가 밥을 해줬지만.


‘......어라. 나 지금, 여자로서 상당히 끝장  있는 게...?’

큰일이다. 큰일. 큰일...인가?


‘남녀평등시대인걸. 굳이 여자가 집안일을 해야한다거나, 남자가 돈을 번다거나 그런 선입견에 잡힐 필요 없지, 암!’

【어비스】의 자금은 바이올렛의 수완으로 융통되고 있다. 도로시의 발명품을 시장이나 연구기관에 흘려서 자금을 벌어들이기도 하지만, 그 자금을 이용해 【어비스】의 자산을 늘리거나, 빌런 짓이 이익이 될 단체를 찾아 자금을 융자받기도 하는 등, 어쨌든 이 조직의 경제적인 면은 바이올렛이 온전히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참모의 조력은 받고 있지만. 대략 80% 정도.


‘어? 13호가 제일 무능한게....’


본인이 들으면 울 것 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어쨌든 13호도 없어서는 안 될 인재다. 13호야 말로 이 【어비스】를 빌런 조직 답게 하는 인원이니까.


어쨌든.

현재 【어비스】의 넷은 누구 하나 빠질 수 없는 소중한 인력이며, 당연하지만 보스인 자신이 있기 때문에 13호에게도 월급이 나가고 제대로  문화적인 생활을 할  있는 것인데....


“요즘, 13호 그 녀석...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바이올렛은 화가 나 침대를 베개로 팡팡 두드렸다.

그 자식, 자신에게 소홀한 것 뿐만이 아니다. 최근 자신을 향하는 눈빛이 미묘한 것이, 말 그대로 백조를 보는 듯한 눈이라 어째 대하기 묘하게 거북한 것이다.


물론 요즘 귀찮아서 밖에 나갈 일이 없었지만!

히어로 기지에 잡혀있던 반동으로 더 틀어박혀 있었지만!


가끔 13호를 시켜 BL 태피스트리나 한정 상품 등을 사오게 시킨 적도 있지만!


허구헌 날 빈둥거리다 씻지도 않아 떡진 머리로 식사 자리에 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보스인걸! 내가 그럴 수도 있지!”

암,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면  된다. 보스는 하늘이며 신처럼 여겨서, 늘 존경과 우러러보는 눈빛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미의 여신마냥 매료된 시선으로 봐도 좋다. 허락하겠다.


그런데 그... 최근 보이는, 굴러다니는 콩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은... 견디기 어렵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내가 틈만 보이면 발정난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보던 놈이.’

주변에 여자들이 많아져서인지, 여자에 대한 눈이 높아진 것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을 여자로 더 이상 보지 않는  같아서 마음이 굉장히 꾸물꾸물하다.

“괴롭혀주고 싶어졌어... 13호.”

역시 이대로 지내면 안 되려나. 생활에 혁신이 필요하려나.


한숨과 함께 바이올렛이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데, 부우웅-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BL 회차 업데이트 알림인가?

‘후, 성실하게 살아야지. ...그치만 궁금하니까, 일단 새로 나온 화만 보고!’

바이올렛은 희희낙락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그러나 소설 알림이 아닌 것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낙담했다.


온 것은 소설 업데이트 알림이 아닌, 발신인 불명의 메시지였다.

“............?”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하다.


바이올렛은 메시지를 터치해, 내용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거.......”

[빌런 조직의 보스 바이올렛님. 당신의 자매를 죽인 히어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메시지와 함께 보내진 것은 한 장의 사진. 사진을 확대해 확인하고, 메시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리고 바이올렛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떨어뜨렸다.




* *



“으~음. 개운한 걸.”


도로시에 의해 개조된 라헤를 요모조모 면밀하게 살펴보고  뒤, 나는 기지개를 쭉 펴며 방에서 나왔다. 안 그래도 완벽하다 생각했던 라헤의 몸은, 도로시의 손을 거쳐 한층 더 완벽한 성노리개로 진화했다. 무엇보다 대장다운 강인한 정신력으로 목석처럼 굳세게 버티던 눈빛이, 이제는 간단한 애무만으로 완전히 무너져, 쾌락에 젖은 암캐의 눈동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라헤와의 약속의 날까지는 사흘 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 상태를 보아하면 그만큼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라헤를 함락시킬 계획은 대강 다 짜놓은 상태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꼼수도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 라헤를 굴복시키는 건 확정적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문득 꼬르륵~ 하는 고전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출출하네.”

그러고보니 오늘 저녁을 먹었던가? 도로시의 실험을 준비한다고 아무 것도 안 먹었던 것 같다.  녀석도 배고프려나....


‘야식이라도 준비할까.’


어쩌면 참모가 뭔가 만들어뒀을지도 모른다. 애플에게 부탁해도 좋을 테고, 아리아나 스페이드는... 음. 둘은 그런 걸 맡겼다간 여러모로 불안하니까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비로 올라왔는데, 의외의 인물이 있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보스였다.

“보스?  이 시간에...?”

“어, 아아... 13호냐.”

보스가 최근 올빼미 인간이 되긴 했지만, 밤에 굳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늘 방에서 뒹굴거리며 BL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으니.

“배고파서 나오셨나요? 그럼 제가 야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배라... 아니,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13호, 찾고 있었다.”


“저를요?”


그래, 라며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피곤해보였다.

“무슨 일로....”

“이번에 7번대 전원을 붙잡은 것, 굉장히 잘해주었어, 13호. ...응. 제대로 칭찬해줬던가 싶어서.”

잘햇어, 잘했어, 라며 까치발을 들고 토닥인다.


보스가 칭찬을 해주다니....


“보스?! 머리는 괜찮습니까?! 아니면 죽을 병 걸리셨어요?!”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보다도 본론이다. 7번대 히어로들은 전부 세뇌되어 있는 거지?”


“라헤를 빼면... 그렇습니다만. 라헤도 앞으로 한발짝,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13호. 7번대의 그 여자들은, 전원 필요한 거야?”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나는 가볍게 눈썹을 모았다.


그러자 보스는 질문을 보충해주었다.


“한 명 정도, 없어도 될까 싶어서.”


“상관은 없습니다. 굳이 세뇌된 상태로 두는 건 저희의 전력으로 사용할 겸에, 다른 히어로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뿐이니....”


“......그래.”

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던졌다.


“그럼, 준비해 줘. ――내일, 스페이드를 처형한다.”

머리가,  순간에 공백이 되었다.




“..................보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닐텐데. 내일, 스페이드를 처형하겠다고 했어.”


스페이드? 처형? ......왜?


“보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스페이드는 분명 히어로지만, 확실하게 세뇌했고... 저희의 귀중한 전력이 될 수도....”

“뭐 문제 있어? 어차피 히어로도 빌런도 서로 죽이는 관계, 저쪽도 죽을 각오쯤은 하고 히어로 노릇을 하고 있겠지. 내 말 틀려?”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도 황당하고, 너무나도 당황스런 요구였다.

그러나 보스는 그런 내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멱살을 거칠게 붙잡아, 끄집어 당겼다.

“닥치고 명령대로 해. 보스 명령이다.”

“.......보, 스....”


“스페이드  여자는....”


보스는 뜸을 들이듯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고,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내 동생을 죽였어. ......죽일 이유로, 충분하잖아 그러면.”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보스는  몸을 밀어내고, 우울한 얼굴로 내 눈을  번 올려다본 후에,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가버렸다.

“......내일 밤 11시에, 처형식을  거야. 다른 녀석들은 필요 없고, 처형에 쓸만한 도구랑... 그렇지, 심문 준비를 해 줘. 마지막 자비로, 그 전까지는 먹고 싶어하는 거 먹여주고... 나머진, 알아서 해 줘.”

그 말을 끝으로, 보스는 계단 저편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그 뒤에 남은 나는, 망연하게 그런 보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 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시끄러워, 13호. 진정해.”

체크의 시술을 마치고 나온 도로시를, 나는 억지로 식당으로 끌고 와 앞에 앉힌 채 푸념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보스의 변화가 너무 당황스럽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고, 솔직히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못 참을 것 같았다.

“이봐, 나는 지금 내 손으로 24개나 되는 시약을 투약하거나 반응을 확인하거나 하는 바람에 피곤해 죽겠거든? 굳이 네 푸념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아.”

“왜 그렇게 매정한 거야 도로시....”

“참모라도 붙잡고 털어놓으라고. 둘이  잘 맞잖아. 보스의 소설 재료가 될 정도로.”


도로시는 내가 타준 달디 단 밀킅티를 홀짝 들이키며 킥킥 웃었다.


생각해보면 우울해진다. 나와 참모를 주인공으로 한 BL소설... 쏠린다.

“참모는 내 상관인 보스한테 절대 복종하긴 하지만... 너처럼 보스랑 마음을 터놓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나도 마음을 터놓는 느낌은 아닌데.”

“같은 여자니까 통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너도 생각이란 걸 하는 구나, 13호.”

“......넌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호모.”

“......호모 사피엔스를 잘못 말한거지? 그렇지?”


“사람이라 하기에는 좀 모자란 놈.”


나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다. 울고 싶어졌다.


도로시는 무심하게 밀크티를 홀짝이며 대화를 이었다.


“그치만 스페이드가 보스의 동생을 죽였다며. ...보스가 【어비스】를 설립한 이유를 생각하면, 말이  되는 반응은 아닌데.”

“여동생이 죽어서... 였지.”

나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보스, 바이올렛이라는 여자가 빌런 조직을 설립하고  수괴가 된 이유는, 그녀의 자매가 히어로들의 손에 살해당한  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보스는 꽤 불안정한 상태였다. 날이 선 면도칼 같았다고 할까, 지금이야 뒹굴거리는 백수 같은 느낌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때의 보스라면, 지금 같은 결정은... 전혀 이상할 게 아니다.

“하지만 이상한 게  두가지가 아니야. 그게 몇   일인데!”

“4년... 됐던가? 흠.”


이렇게나 갑자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의 범인을 알아챘다니. 거기다 그 범인으로 스페이드를 지목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군가 보스를 부추긴  아니라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멍텅구리야.”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며 입을 다물자니,  낌새를 눈치 챈 도로시가 핀잔을 주었다.

“입장을 생각해. 네가 누구인지 자각해. 13호  보스의 뭐지? 넌 이 조직의 무슨 위치지? 넌 단순한 병사야. 선봉장이라는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래봐야 보스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부하 직원. 알겠어?”


도로시는 탁자 너머로 몸을 귀엽게 쭉 뻗어, 밀크티가 담긴 머그컵으로 내 가슴팍을 툭, 쳤다.

“주제넘은 생각은 하지 마. 생각을 버려. 병사한테 생각은 어울리지 않아. 넌 그냥 보스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알겠어?”

“그렇, 지만....”

“애초부터 그래. 네 성격은 빌런에 안 어울려. 물론 네 사정을 알고 있으니 이해는 하지만, 지금만큼은  무른 성격을 집어넣어. 끄집어내지 마. 확실하게 민폐야.”

도로시는 걱정스럽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설마 싶지만 보스한테 세뇌도구를 쓰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윽!”

도로시는 나를 비난하듯 흘겨보았다.

“빌런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스는 옳아. 보스의 말에 거역한다면, 그 생각이야말로 틀렸지. ......빌런이라도 조직인 만큼 나름의 룰이 있는 법이야. 네가 그걸 거스르겠다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 따위 조직은 순식간에 붕괴하겠지.”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걸까....

“만약, 만약에....”

그 뒤의 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다만 도로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능청스런 표정으로 밀크티를 한 모금 더 홀짝이더니,

“나는 뭐, 재밌어 보이는 쪽에 붙겠지만.”

컵을 내려놓으며 귀엽게 웃었다.

......요 음침 다크서클녀가 귀엽다니, 오늘 내 머리는 어딘가 문제가 있나보다.





도로시와의 담화를 끝내고, 내 개인실에 돌아온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일, 스페이드를 처형한다.’

머릿속엔 보스의 말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도대체  갑자기 이런 일이... 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처형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까지 별에 별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내 목숨을 보스에게서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보스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내 목숨 따윈 생각도 안하고 제물로 바칠  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보스가 죽는다면,  날이 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그러니 고민할 것은 없다. 고민할 필요 없다.

보스가 바란다면, 히어로 한 둘쯤 죽이는 거야... 문제는 없다.

거기다 내 손으로 죽이는 것도 아니다. 준비만 해두면, 나머진 보스가 알아서 하겠지. 어쩌면 막상 죽일 상대를  앞에 두고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죽여버리겠다’니, 화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로 죽이는 사람은 적다.


그러니 고민할 필요 없다.

없......을 텐데.

“.........................................................하.”

나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르다...인가.”


도로시 안의  평가였다. 그 음침 과학자녀, 나에 대한 평가가 6화에서부터 바뀌질 않는다.

역시 스페이드가 죽게 둘 수는 없다. 지금 라헤는 함락까지 중요한 국면에 있으니만큼, 혹시나 부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라는 건 어쨌든 변명이다. 뭐라도 댈 만한 이유가 필요할 뿐이다.

‘그럼, 이제부터 어쩔까.’

거기에 대해선 생각할 것도 없었다.


능력을 잃은 내게 있어,  수 있는 일은 줄곧 하나 뿐이었으니까.

도로시에겐 미안하게 되겠지만... 들키지 않게 하면, 되겠지. 빌런이 순순히 말을 들어주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응. 오히려  편이 빌런답고 좋지 않겠어? ......그렇다고 쳐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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