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26 빌런은 아름답고도 최강인 마녀를 사냥하고자 한다(3)
“히어로는 무서워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여요... 그런 건 싫어요. 다들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들일 텐데, 너무나도 쉽게 죽어가요... 너무나도 쉽게 죽여버려요.”
“걱정 마, 애플. 어차피 나는 상대를 죽일 일은――”
“라헤 대장님은, 망설임 없이 죽일 거예요. 그게 13호님이든, 아니면 저희가 되었든... 그게 ‘정의’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럴 것 같다. 그 여자라면. 아마도. 분명히.
빌런과도 터무니 없는 거래를 하던 여자다. 그게 ‘정의’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정의’를 위해서라면, 히어로를 상대로도 가차 없어질 수 있다. 아마 애플이 하는 말은 그런 의미겠지.
“.......”
그러고보면, 【시궁쥐】의 사태에서도 죽은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었다. 애초에 애플이 만들려던 세상도, 빌런도 히어로도 누구 하나 죽지 않을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었다.
애플은 누군가 죽는 게 무서운 것이다.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죽음 따위, 두려운 것이다.
그게 사실 정상적인 감성이고, 누구나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모럴이지만――히어로나 빌런에게는, ‘각성자’에게는 그런 게 지나치게 희박하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숨과 함께, 애플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싶었지만 팔이 묶여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턱을 들어 애플의 정수리를 쿡쿡 찌르듯 문질러주었다.
“바보야. 걱정하지 마. 이 빌런 13호는 ‘마왕’이 되려던 너를 무찌른 최강의 빌런님이시니까.”
“......그럼, 믿을게요. 남편님의 말씀이시니....”
“........”
남편이란 부분은, 조금....
“그럼 13호님. 조금 전에 하셨던 말씀인데요.”
“응?”
“많은 여자들을 사랑하시는 건 좋아요. 아내로서 관대히 넘어가드리겠어요.”
“응...?”
애플의 손이, 내 목덜미 부근에 닿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손톱이 내 살을 파고 들었다.
“?! 애플?! 아픈데?!”
“하지만 말이죠... 저보다 더 좋아하는 일은, 있어선 안 돼요. 누구도요. 그 누구라도 말이에요.”
“무, 무서워! 너 눈이 무서워!”
“아시겠죠? 이 애플이야말로 13호님의 1등 아내, 말하자면 본처... 나머지는 정부(情婦)일 뿐이에요. 단순한 애인. 하룻밤의 불장난 같은... 아시겠죠? 아시겠나요? 저를 향한 것은 진정한 사랑, 그 외에는 단순히 먹이를 주는 듯한... 만약 잊거나 그런다면... 혹여나 마음이 바뀐다면... 저도 모르겠네요... 제가 무슨 짓을 할지...... 후후, 우후후후, 우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웃음 소리가 무서웠다.
애플의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요염한 목소리가 무서웠다.
아니, 그냥 애플이 무서웠다!
애플은 우후후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보다 손톱이 아파. 경동맥 근처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너무 무서워!
도대체 뭐가 이 여자의 마음을 이토록 병들게 만든 거지!
“그러니 지금부터... 본처를 잊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봉사를 시작할게요...♥ 신랑님...♥ 마이 달링......♥”
애플은 천천히, 그러나 숙련된 창부처럼 능숙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아침까지 애플에 의해 쥐어짜이는 신세가 되었다.
* * *
【시궁쥐】 사건으로부터 이미 일주일이 지나갔다.
라헤는 산처럼 쌓여있던 서류가 거의 처리된 것을 보고, 기뻐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슬슬 끝이 보인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대, 대장...... 내... 진짜 죽을 거 같데이....”
“나... 나도...... 이 유능한 코코도 죽어버릴 거야... 이 이상하면....”
“......(아리아, 침묵)”
그러나 사무실의 참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체크는 뒤로 쓰러질 듯이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떨고 있고, 애플은 서류더미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죽어가고 있다. 아리아는 말할 기력도 없는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입을 헤-벌리고 있다.
일주일에 달하는 강행군은 7번대 부하들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넣어버린 모양이다.
“......자자, 다들 퇴근입니다. 오늘은 쉬도록 해요.”
짝짝 손뼉을 치며 모두를 깨워 돌려보낸 후, 라헤는 간단한 뒷정리를 마쳤다.
자, 그러면....
“――라헤 대장.”
마침 빼꼼, 아리아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자그마한 종이상자가 들려있었다.
“아, 아리아. 오늘도 어떤가요. 지금부터 티타임을 가지려는데.”
“예... 케이크도... 준비해뒀어요....”
“어머나. 좋네요.”
라헤는 단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케이크라고 한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여느 때처럼 라헤가 차며 접시를 준비하는 동안, 아리아는 초에 불을 붙이고 세뇌약이 포함된 에센셜 오일을 불에 떨어뜨렸다.
사무실은 금방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워져 갔다.
“......라헤 대장? 라헤 대장... 잠 들었나요....”
잠든 라헤의 어깨를 아리아는 살짝 흔들어보았다. 대답은 없다.
“라헤 대장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마음에, 영혼에 깊이 새기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대로만 하시면, 분명 기분이 엄청엄첨 좋아질 거예요....”
라헤에게서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리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은 도입부였다. 지금부터 아리아가 하는 말을 마음에, 영혼에 새기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속삭인다.
‘약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겠죠....’
그러한 아리아의 말을, 라헤는 오늘도 세뇌당한 척 연기하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리아는 라헤가 세뇌향의 영향으로 잠들어 있는 줄 알고 있겠지만, 라헤는 또렷한 정신으로 깨어있었다. 그저 그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잠든 척을 했을 뿐이다.
이 일주일. 순순히 세뇌에 걸린 척 한다는 라헤의 책략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리아도 슬슬 경계를 풀고, 차츰 대담한 암시를 라헤에게 주입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 말은 즉, 13호의 경계도 풀어졌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아마 그 일환인지, 오늘은 아리아의 암시 내용이 명백하게 바뀌었다.
“자... 천천히 눈을 뜨시고... 의식은 잠든 채... 제 눈을 바라봐주세요....”
아리아의 지시대로, 라헤는 눈꺼풀을 반쯤 떴다. 아리아의 두 눈이, 그런 라헤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 본다.
“라헤 대장님... 조금 후에 라헤 대장님에게 전화가 올 거예요... 빌런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지만, 라헤 대장은 걸려오는 전화를 반드시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내용이든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리아는 조용히, 그리고 일정한 톤을 의식하듯 라헤의 귓가에 암시를 속삭였다.
‘전화?’
“라헤 대장은 대장이죠... 그렇죠...?”
“.......”
“라헤 대장...?”
“아, 응. 응.... 네...... 대장입니다....”
무슨 뜻인지 생각하느라 반응이 늦었다. 아리아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흠. 괜찮겠죠.”
다행히 그냥 넘어가는 모양이다.
“라헤 대장은 대장이니까...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렇죠...?”
“네... 대장이니까....”
“맞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대장이니까,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명령이든 따를 수 있어요... 육노예든, 고기인형이든 될 수 있어요... 아셨죠...?”
라헤는 멍한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에 아리아는 의심을 완전히 풀어버린 모양이었다. 라헤의 귓가에 대고 이런저런 암시를 추가로 속삭이고, 때론 라헤의 몸을 애무하며... 에센셜 오일의 향기가 옅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라헤에게 세뇌 암시를 주입했다.
‘오늘의 암시는 조금 달랐어....’
이번에도 지겨운 세뇌의 시간을 마치고, 아리아가 떠나간 사무실에서 라헤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의 아리아가 남긴 암시는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전화, 라고 했지.’
전화가 걸려온다면, 당연히 13호일 것이다. 전화로 걸려온 13호의 말대로 따른다... 대충 그런 암시였다.
거기에 추가로 주입된 암시는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부하들에 대한 암시가 많았다.
......대강, 13호가 하려는 짓이 짐작은 갔다.
13호의 손에 들어간 7번대의 부하들. 그들을 인질로 잡고 라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지금 13호는 자신을 세뇌한 것으로 알고 있을 터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질 같은 걸 사용하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딱 한 가지 짐작가는 게 있긴 했다.
“......보험, 같은 걸까....”
확실히, 그거라면 말이 되려나.
만에 하나 자신이 세뇌되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부하들을 방패로 삼아 도망치려한다... 그런 일이라면 납득이 되었다.
어쩌면 이미 세뇌를 마친 자신의 부하들을 이용해 요격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대장인 자신이 부하들을 상처 입히지 못하리란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정말 곤란한데요.’
어느 쪽이든 교활하고 야비한 전술이지만, 확실히 효과적이기도 하고, 참으로 빌런 다운 방법이기도 하다.
라헤는 가능하면 자신의 부하들을, 젊고 앞날이 창창한 그녀들을 구해주고 싶었다.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7번대의 모두는 자신의 부하이면서, 동시에 귀여운 동생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헤는 한 명의 히어로이며, 대장이다.
만약의 사태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부하의 심장을 꿰뚫을 각오도 하고 있다.
다만 그럴 경우... 13호에게는, 그 이상 없을 정도의 지옥을 보여주겠지만.
라헤는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 정말 만일의 경우겠지만요. 가능하면 두 사람 다 무사히 구출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여야겠죠.’
13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뒤의 일이었다.
* * *
라헤가 자신의 미니쿠퍼를 몰아 도착한 곳은 한 건물 앞이었다.
전 과격파 빌런 조직의 아지트로, 일전에 체크가 단독으로 이곳의 빌런들을 전부 숙청한 바 있었다. 직접 와보기는 처음이지만, 보고서를 통해 인지는 하고 있던 곳이다. 분명 어느 부유한 기업체에서 인수했다고 들었는데, 13호가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기업체라는 곳이 【어비스】와 관련이 있는 건지... 나중에 돌아가면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이제는 어쩐다... 하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차 거치대에 꽂아둔 휴대폰이 부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번호 제한>이라고 떠있었지만, 상대는 짐작이 갔다. 라헤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라헤, 그래서 어디쯤이지? 지금 건물 앞에 차가 한 대 서있긴 한데.]
“......도착했어요.”
[말한 대로 혼자 왔겠지?]
“혼자예요. 제가 보인다면 알텐데요.”
[좋아. 확실하군. 그대로 정문으로 들어오도록 해. 사람을 보내뒀으니까. 전화는 끊지 말고.]
라헤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능청스런 목소리에 가볍게 혀를 찼다. 통화 중인 상대는 틀림 없는 13호였다.
티타임을 마치고,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던 라헤에게 최초로 <발신번호 제한>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 대략 20분 전이다.
짐작할 것도 없이 전화를 건 상대는 13호였고, 부하들을 구하고 싶다면 지정한 장소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제가 세뇌에 걸리지는 않았다지만... 애초에 거절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죠.’
세뇌에 걸렸든 걸리지 않았든 이런 내용이면 안 올 수가 없다.
짐작한 대로 부하를 인질로 잡힌 셈이니 기분은 언짢았지만,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조금 전 통화내용으로 봤을 때, 13호 본인이 이 건물에 있는 모양이니까. 라헤의 목적은 13호의 숙청이니, 바라마지 않았던 기회이기도 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 라헤는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13호가 굳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분명 충분히 자신을 세뇌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손쉽게 자신을 이겨낼 승산이 보였기에, 이제야 얌체같이 쏙 얼굴을 비출 심산인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라헤 자신이 완전히 세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면....
‘도망가겠죠. 저번처럼.’
13호는 그림자를 통해 전이할 수 있다. 라헤 본인도 직접 이 눈으로 확인한 바다. 그림자가 매개인 것을 봐선 분명 참모의 능력이겠지.
라헤의 눈으로 본 13호는 영리하고 교활한 남자였다. 어렴풋이나마 세뇌가 완전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전이 능력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했다.
결국 할 일은 하나뿐이다.
철저하게 세뇌당한 척을 할 것.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성노예든 고기인형이든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후우....”
라헤는 각오를 다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안녕하세요, 라헤 대장. 13호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문을 지나서 걸어 들어온 라헤를 맞아준 것은, 멍한 눈의 스페이드였다.
부츠며 스커트는 히어로 제복의 것이었지만, 두꺼운 상의는 온데간데 없고 안이 다 비쳐 보이는 지나치게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도 기장이 짧아서 배나 배꼽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배 부근에 매직으로 <육변기 1호>라고 적혀져 있는 것이 열 받았다.
스커트는 틀림없는 제복 스커트였지만, 기장이 무척이나 짧아져서 조금만 움직이면 안쪽의 속옷이 다 보일 것만 같았다. 타이츠에 이어진 가터벨트 끈도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히어로의 상징을 멋대로 개조하다니... 거기다 자신의 부하에게 이딴 짓을... 13호 그 인간....
[들어왔구나. 오랜만에 부하를 본 소감은 어때? 반가워서 끌어안고 싶어지지 않아?]
귀에 꽂아둔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로는 여차할 때 불편할 수 있기 때문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 둔 것이다.
“......스페이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자신은 13호가 세뇌기술을 쓴다는 것은 모르고 있어야한다.
[조금 머리를 손 본 것 뿐이야. 그 왜, 여기 마침 애플도 있으니까. 어떤 건지 알겠지?]
“세뇌라는 건가요. 당신, 제 부하에게...! 당장 풀어주세요!”
[이런, 너무 화내지 마. 그리고 빌런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너도 뭔가를 해줘야지 않겠어?]
“그것, 은....”
[그럴 맘이 있으니까 굳이 내 말에 낚여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어쨌든 부하들을 구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할 거야. 안 그럼 영영 그 상태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해. ...그럼 스페이드가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오도록.]
13호의 말에 라헤는 적당히 분한 척을 해주었다. ‘척’이라기엔 본심이 많이 섞여있었지만.
‘들키진 않은 것 같네요.’
일단 자신에게 세뇌가 걸리지 않았단 것을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아리아는 ‘세뇌당한 걸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평소의 자신을 연기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스페이드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기 전 간단하게 자료를 살피기로, 뒤가 구린 빌런조직의 건물이었던 만큼 안쪽의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다고 나와 있었다.
‘분명 계단끼리의 거리도 멀고... 복도 이곳저곳에 언제든 내릴 수 있는 격벽이 있다고 했죠. 편리한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이쪽은 카드키가 없으면 쓸 수 없고....’
즉, 침입자는 침입해 들어오기 어렵고, 관계자들은 손쉽게 도망칠 수 있는 구조다.
‘정말이지, 용의주도한 쥐새끼 같은 남자.’
라헤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스페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의 계단이 나타났다. 13호는 위층에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꼭대기 층에 있는 걸까.
스페이드는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듯 계단 앞에서 멈춰서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줄자였다.
“그럼, 위로 올라가 주시기 전에... 신체 측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13호님의 명령입니다.”
[라헤 너는 부하들을 구하러 온 거지? 하도록 해.]
라헤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어서, 해주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라헤가 무방비하게 몸을 대자, 멍한 눈의 스페이드가 줄자를 대고 라헤의 몸을 하나하나 측정해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