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25 그리고 빌런은 마왕에게 반역한다(1)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애플에게 짜일 대로 짜인 뒤에 넋이 완전히 나가버렸던 나는,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가만히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나를 구해준 것이 도로시 특제 자양강장제.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데 의외로 뺏기지 않았던 덕에 마시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체력이라고 할까.
정력이지만.
체력이 조금 회복되는 걸 느끼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옆에 서있던 스페이드가 빠안~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잠시 묘한 느낌으로 정신이 돌아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시 인형 같은 상태다.
――‘돼, 돼지 씨, 부끄럽지 않나요.’
스페이드가 경멸과 조소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했었던 말을 기억하고, 나는 복수하는 겸 옷 위로 가슴을 조물조물 주물러줬다. 그러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스페이드는 반응이 없었다.
“...좀 씻을까.”
몸이 끈적끈적하고, 이런저런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입 안도... 신박한 경험이었어....
“어디 가십니까.”
깜짝 놀랐다.
별안간 인형처럼 가만히 서있던 스페이드가 입을 연 것이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스스로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세뇌가 깊어져, 기능이 많아졌나보다... 하고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애플님의 명령입니다. 13호님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도망가는 거라면, 두 다리를 부러뜨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명령을 내린 거냐 이 여자는.
“......잘만 말하잖아. 그리고 씻으러 가는 거야. 찝찝하잖아. 씻는 것도 못하게 하랬어?”
“제가 받은 명령은 ‘도망치지 말게 하라’ 뿐입니다. 씻으신다면 거기 욕실을 이용해주세요. 감시를 위해 동행하겠습니다.”
스페이드가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 스페이드의 껍데기를 쓴 인형이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현관 근처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스페이드도 선언한대로 착실히 따라 들어왔다.
“.......”
옷을 벗으려는 데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상당히 불편해, 나는 스페이드에게 뒤를 돌아보도록 지시했다. 듣지 않았다. 심지어 대답도 없다. 완벽히 무시당했다. 어쩌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하다 스페이드의 옷을 벗겼다. 나만 알몸이면 불편하지만 상대도 알몸이면 괜찮다. 그보다는 심술이지만.
스페이드는 아무래도 내가 깨어나기 전에 이미 몸을 씻은 모양이라, 깨끗했다.
애플이 거주지로 사용하는 스위트룸의 욕실은, 과연 고급 호텔이라는 느낌답게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아지트의 욕실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화려함을 중시하는 호텔의 욕조는 레벨이 달랐다.
“후우.......”
첨벙, 욕조에 찬 물에 몸을 담그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게 몸을 씻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아아, 기분이 좋았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떨어진 것 같은데.’
기억이 중간부터 날아가 있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뭔가 엄청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문제인 건, 잠깐이라도 애플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가기라도 하면 몸이 멋대로 반응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도 애플의 얼굴을 기억해냈을 뿐인데, 물 속에서 페니스가 단단해졌다.
이래도 있으면 몸도 마음도 철저히 애플에게 조교되어 버린다....
‘빠져나가려면 스페이드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참모가 전해준 계획에서도, 어느 것이나 첫 단계는 ‘스페이드를 어떻게든 할 것’이었다.
스페이드를 도로 세뇌하든지, 혹은 무력화시키든지.
나는 흘긋 옆에 선 스페이드를 쳐다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도 부끄러움 따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꼿꼿이 선 채 목욕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스페이드.”
불러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스페이드, 나의 사랑하는 스페이드」.”
세뇌의 열쇠가 되는 키워드를 말해봤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부질 없는 짓이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스페이드의 팔을 잡아당겨,
첨벙-
욕조 안으로 끌어들였다. 욕조는 무척 넓어서, 네다섯명이 들어와도 공간이 남는다. 둘 정도 들어와도 문제는 없다.
“.......”
갑자기 끌어당겨졌는데도, 스페이드는 동요한 눈치는 없었다. 끌려들어온 자세로 물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나는 그런 스페이드를 품에 뜰어안고, 욕조 벽에 기댔다.
“스페이드, 질문에 대답해줄래?”
“상관없습니다.”
“네가 애플한테 받은 명령은 뭐야?”
“‘애플님의 말에 절대 복종할 것’, 그리고 ‘13호님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작해야 그것밖에 지시를 안 내렸다고? 애플의 명령치고는 허술한데, 스페이드의 세뇌가 어려워서 그랬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스페이드는 내 ‘도망친다’는 행위에만 반응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한 밀착감시다.
그러나 명령 이외의 것, 즉, 자신을 지킨다는 행위에조차 반응하지 않는다. 조금 전 스페이드를 욕조 안으로 끌어당길 때, 스페이드는 저항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들어 왔다.
그렇다면.
스페이드를 뿌리치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무력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끈으로 묶거나 구속하는 건, 스페이드의 능력인 【신체강화】를 생각하면 불가능하겠지만――
‘죽이는, 거라면.’
예를 들어, 욕조 아래로 몸을 눌러서, 물 속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서 이 가녀린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방법이 있다.
나는 스페이드의 가는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깨에 닿는 붉은 단발을 손등으로 슬쩍 밀어내자, 여성스러운 가녀리고 흰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경동맥을 조금만 압박하면, 죽이는 건 손쉽다.
죽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기절시키는 것도 있다. 물론 아마추어의 손으로 콕 집어 기절시키는 건 은근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죽일 각오로하는 것보다 위험할 수 있다.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각오를 다졌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애플을 벗어나기 위해, 방법은 이것 뿐이다.
각오란 그것이다.
스페이드를 버리겠는가, 아니면 이대로 애플의 조교를 받아들어, 그녀에게만 반응하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꿀꿀대는 돼지가 되어버리겠는가.
솔직히 고민할 이유도 없다. 스페이드는 히어로. 나는 빌런.
빌런이 이익을 위해 히어로를 해하는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보스의 명령이 그게 아니었던가.
――‘생사는 묻지 않을테니.’
다만 7번대의 히어로들을 전멸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이대로 붙잡혀 있으면, 보스의 명령은 이룰 수 없다....
결심을 굳히고, 나는 눈을 떴다.
“......원망마라, 스페이드. 나는 빌런이고... 너는 히어로니까......”
스페이드의 귓가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른다. 상관은 없다. 용서하든 용서하지 않든, 내가 할 일은 변함이 없으니까. 나는 빌런이니 빌런다운 일을 할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원망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성불해라.”
나는 비장한 각오로, 천천히 손을 들어――그대로.
스페이드의 모양 좋은 가슴을, 양 손으로 쥐고 조물조물 주물렀다.
주물주물 주물렀다.
주물럭주물럭, 섬세한 손길로, 온 신경을 손바닥에 집중해, 손에 닿는 가슴의 탄력을 음미하며 정성껏 주물렀다!
“나는 빌런이고, 너는 히어로니까!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면 가슴을 주물러지는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세뇌 당한 네가 나쁜 거다. 알겠지? 나중에 원망하면 안 된다?”
변명거리도 되지 않는 말을 스페이드의 귓가에 대고 쏟아내며, 나는 열심히 스페이드의 가슴을 주물렀다. 밥그릇 사이즈의 모양 좋은 가슴은, 각각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쏙 들어오는 게 기분 좋았다.
품에 안긴 스페이드의 몸을 더욱 꼬옥 끌어안는다. 스페이드의 몸은 여자애답게 부드러우면서,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근육의 건강한 탄탄함도 느껴졌다. 무엇보다 품에 안고 있으면, just fit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내 몸에 꼭 맞았다. 어디를 만져도 지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황금율의 조형미를 가진 몸이다. 잠자리에 안고 자는 베개로 두고 싶다.
이런 여자애를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빌런 따위, 죽는 게 낫지.
혹시 모르니까 상처입히는 짓도 하고 싶지 않다.
이건, 음, 뭐랄까.
악의 미학이다.
악당의 미학이다.
고로, 다른 방법을 찾자.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물러터졌다니까.’
스페이드의 목덜미를 향해 입을 내밀어, 그녀의 목덜미를 잘근, 씹었다.
“흐읏......♥”
스페이드가 살짝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저번에도 봤지만, 이 녀석, 약점인 목덜미를 자극할 때만, 묘하게 반응이 돌아온다.
어쨌든.
스페이드가 있으면 도망을 못 치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스페이드를 어떻게 하더라도 그 뒤의 일도 생각을 해야한다. 어차피 이 방에서 도망쳐도, 애플의 마수가 사라지는 건 아닐테니.
그리고 보스라던가 보스라던가 보스라던가.
아, 진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이런 걸 생각할 게 참모가 할 일일 텐데, 이 자식, 아무리 【동조】로 교신하려 해도 응답이 없다. 완전히 돼지로 떨어져버렸나.
“하아.......”
‘이제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며, 욕조에 힘 없이 기댄 채 스페이드의 가슴을 주무를 때였다.
「13호. 살아있어?」
별안간, 그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보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만 스페이드의 가슴을 주무르던 손마저 놓쳐버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 자리에 없다. 클럽의 능력을 이용한 원거리 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살아있나보네. 다행이야.」
보스의 목소리다. 틀림 없다!
“보스! 보스! 보스으으으으으~~~~~~~~~~!”
「징그러우니까 그러지 마... 어쨌든, 수고 많았다. 나는 도로시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탈출했어.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네가 있어서, 덕분에 불안하지 않았네.」
“보스......!”
감격에 젖어 중얼거리는 데, 별안간 들려오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여, 멍청아. 이제 슬슬 죽겠다 싶어서 아지트에 너를 위한 묘석을 준비해뒀는데... 편안히 죽지 그랬어.」
“바꿔! 꺼져 도로시! 좀 더 보스의 목소리를 들려줘! 분위기도 못 읽냐 이 음침 판다 과학녀!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오케이. 너는 내 신병기로 원자 단위로 분쇄해버릴 줄 알아. 각오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허공에 굽신대며 사과했다.
「지금은 클럽의 능력으로 교신하는 거야. 이거 좋네. 기계가 없이도 교신이 된다니. 거리 문제만 어떻게 하면 통신기도 필요 없겠어. 우린 참모의 지시대로 보스를 구해냈어. 지키고 있는 히어로들이 있어서 우리끼리면 힘들었을 테지만, 【시궁쥐】의 두사람을 세뇌한 덕분에 전력도 충분했고.」
애초에 【동조】는 클럽의 능력이다. 클럽은 아지트에 도로시와 함께 있었을 테니, 클럽을 통해 교신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상한 게 아니다.
다만.
“거리 문제가 있을 텐데... 도로시, 너랑 보스, 설마 이 근처에 있는 거야...?”
「응? 그런데.」
“그렇구나. 오랜만에 목소리 들어서 좋았어. 그럼 도망 가.”
「뭐야, 할 말이 그것뿐이야? 연락도 끊기고, 분명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대강의 상황을 도로시에게 설명했다. 애플에게 붙잡혔다는 것도, 그녀가 자유자재로 세뇌기술을 사용해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도, 어떻게 해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것도.
“위험한 상황 맞아. 나도 참모도 애플한테 붙잡혀서 철저히 조교당하는 중. 근처에 있다가 너희까지 붙잡히면 답이 없어. 아, 하지만 아지트 위치도 들킨 것 같고... 어쩐다.......”
「아둔한 멍청이가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 네 얼굴에 생각 같은 건 안 어울리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생각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싸우자는 건냐, 요 녀석아.
「걱정 마. 귀가 솔깃해질 정보를 전해주지.」
“뭐.....?”
「애플 그 여자한테도 약점이 있거든.」
도로시는 그 ‘약점’을 설명해줬다.
듣는 내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도로시의 장황한 보충설명이 이어지자 조금씩 납득은 할 수 있었다.
「이 정보를 어떻게 쓸 건지는 그 아둔한 머리로 잘 생각하도록 해. 그러니까, 제대로 알아서 탈출해. 우린 그동안 숨어있을 테니까.」
“응. 알았어. 어떻게든 탈출할게.”
「대답 좋네. ......참모의 지시대로, 여기 필요한 도구들도 이 여자한테 맡겨 놓을 테니까 나중에 받아 가.」
“응? 여자? 누구?”
「보면 알아.」
도로시는 그 말을 끝으로 교신을 끊으려했다.
“야야야야야야! 잠깐만! 의욕 내게 마지막으로 보스 목소리 한번만 더 들려줘!”
「와서 들어.」
“야 이 판다녀야! 음침 과학자! 연구만하다가 한 번도 남친 사겨본 적 없는 평생 처녀! 그러니까 네가 남친이 없지!”
「.......」
뚝, 하고 뭔가 연결된 게 끊긴 느낌이었다. 【동조】가 끊긴 것이다.
.............................나, 도로시한테 터무니 없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어쩌지...... 돌아가기 싫어....
“어쨌든 다행이야.”
도로시는 무섭지만, 이 틈에 보스를 구출해냈다니 다행이다.
그럼 다음은 나다.
나만 여기서 탈출하면 된다. 겸사겸사 참모도 구출하고.
나는 스페이드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으며,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스페이드의 몸은 여전히 목덜미에는 반응하는지 움찔움찔 떨렸다. 이 반응이 재밌어서, 나는 가슴을 주무르는 한편 집요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더욱 괴롭혔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머리를 굴려서, 여기서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야. 13호.”
“응. 왜 그래, 스페이......드...................?”
스페이드는 여전히 내 품에 안긴 채,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눈에는 빛이 돌아와 있고, 다만, 백 년의 한기가 느껴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얼어붙은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스페이드의 가슴을 한 번 더 주물렀다.
“.......”
“.......”
팔을 꽉 붙드는 손. 우드득,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내 팔을 압박하고, 가슴에서 떨어뜨려놓았다.
“설명해줄래. 지금 상황.”
따뜻했을 욕조의 물이 단번에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로, 스페이드가 말했다.
* * *
‘이번엔 또 어떻게 조교해드리면 좋을까요.’
애플은 적당히 할 일을 끝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총총히 돌아오고 있었다.
요염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는 애플의 머릿속에는, 13호를 철저히 그녀에게만 욕정하는 돼지이자 신랑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 착착 쌓여갔다.
이미 그녀의 조교로 13호는 벼랑 끝에 서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툭, 떠밀기만 하면 음욕과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애플의 몸을 탐하는 것 말곤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겠지.
이제 곧 13호는 애플의 몸을 탐하는 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돼지가 되어버린다....
그 생각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하기도 했다.
13호는 세뇌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 반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평생 옆에 있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13호는 생각보다 완강했다.
바로 전에도, 아슬아슬하게 그녀에게 매료되어 떨어지려던 순간... 보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일정 선 이상을 벗어나려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력에는 감탄해버렸다. 더욱 더 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아닌, 그 바이올렛이라는 【어비스】의 수장을 향한 것에... 질투를 느꼈다.
‘당신은 제 거예요, 13호.’
결국 다 포기하기로 했다. 다 상관 없다.
정신을 망가뜨리든, 모든 걸 잊어버리고 그냥 돼지가 되어버리든... 그냥, 13호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할 것이다.
애플은 그렇게 결심하며, 카드키를 이용해 자신의 방의 문을 열었다.
‘......어? 불을 꺼놨던가?’
문을 열고 보니, 어두운 현관이 나타났다. 어둡다. 불을 킬 수 있도록 전원용 카드키는 꽂아놓고 갔을 터다.
애플은 한순간에 위기를 감지하고, 뒤로 뛰어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빨리, 옆에서 불쑥 팔이 뻗어나와 애플을 붙잡고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꺄악?!”
“잡았어, 애플.”
이 목소리는...... 스페이드 씨?!
애플은 팔을 뒤로 돌린 채 붙잡혔다. 스페이드가 발로 툭, 밀어 문이 닫히자, 방 안은 완전한 어둠으로 가득찼다.
곧 이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무드등이 켜지고,
“환영할게, 애플. 복수의 시간이야.”
소파에 걸터 앉아 능글능글 웃고 있는 13호의 모습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