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22 그리고 저주받은 히어로들은(1)
그렇다. 그녀의 가슴, 말 그대로 마신 앞에서 나는 내 부족함을 통감했다.
지금껏 스페이드를 비롯한 수두룩한 히어로들의 육체를 마음껏 탐미했으니, 라헤의 그 가슴 정도야 손쉽게 손 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현실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그녀의 그 가슴을 앞에 뒀을 때 내가 느낀 감상이 뭐였는지 알아?
Lv.1짜리 캐릭터가 나뭇가지 하나 들고 만렙 마신에게 당돌하게 P.K.를 신청하는 기분이었다. 무과금 유저가 온갖 장비와 아이템 풀세트를 맞춘 금수저 유저에게 싸움을 거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야. 밸런스 따위 오래전에 파탄 났잖아.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그때의 나.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마신(라헤의 가슴)을 앞에 두고 당돌하게 만지려 했던 거지.
거기다 라헤는 라헤대로 문제다.
요염하게 옷을 벗던 그 모습부터 이미 내 정신에는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는데, 그대로 브라까지 벗어버리고, 그런 주제에 민소매 블라우스는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만 살짝 벗고....
씨... 뭐냐고 그거... 활활 불타오르는 남심에 장작을 쑤셔넣지 말라고....
그냥 막 벗어 재끼는 것보다 훨씬 야했다. 거기다 이 모든 행동에 뺨을 붉히고 부끄러워한다는 포인트가 추가되니 치트 급으로 파괴력이 뛰어올랐다. 장난하냐, 라헤. 너무 좋았습니다. 크흑.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라헤는 무자비한 여자가 틀림 없었다. 아니, 오늘 밤 그녀는 분명 나를 죽여없애려고 작정했던 게 분명하다. 뇌쇄라는 방식으로.
옷을 벗고, 민소매 블라우스의 벌어진 사이로 그 환상적인 과실을 드러낸 라헤는, 그대로 만지기 쉬우라는 듯 양팔을 등 뒤로 돌리고, 가슴을 살짝 내밀었던 것이다.
유방의 정점이 살짝 위를 향하고, 블라우스는 스르륵 흘러 떨어져 맨살을 더욱 드러내고....
그 압도적인 광경에 내 뇌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떻게 손을 내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샌가 손바닥에 닿았던 그 보물 같은 탄력은, 지금도 이 손안에 남아있다.
보라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끼익끼익 쥐는 것만으로, 지금 당장 라헤의 그 감촉을 기억할 수 있다고. 아, 코피 나온다.
나는 차분하게 휴지를 꼬아 코에 찔러넣고, 등받이에 편하게 기댄 채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었다.
그랬다. 라헤의 가슴. 그 감촉, 그 탄력... 그리고 수치스런 표정으로 “......어서”라고 말하던, 그 얼굴――
‘....................!’
일순 낙뢰가 친 것 같은 충격이 머리에 내달렸다. 마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뉴턴이 떨어진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내고,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본적인 지식의 근간을 뒤엎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이다.
미친...! 과연... 그랬던 건가.......!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거지...!
“깨달음을 얻었어...!”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막상 라헤의 가슴을 눈 앞에 뒀을 때는 과부하가 걸려서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제야 확신이 생겼다. 아니, 진리를 깨달았다.
라헤의 가슴을 만졌을 때의 그 기분. 그 때의 그 환상적인 기억.
그랬던 것이다.
나는.
나는... 13호는, 그 가슴을 만지기 위해 태어났다!
내 인생은... 내 목숨은... 오로지 그 가슴을, 아니, 가슴님을 위해 있던 거였군요... 신이시여어.......!
새로이 발견한 인생의 진리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우러러봤다.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정해졌다. 내가 갈 길은 그 환상의 가슴을 향한 외길 일직선이다. 말 그대로 도원향을 향한 골든 로드(Golden Road)를 걷는 거다. 오로지 그 뿐이다...!
타올라라, 내 인생!
빛나라, 내 삶의 진리!
“.........................................나는 왜 지금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라헤의 가슴을 상상하며 꼬물꼬물 손을 움직이며, 신성하고 경건한 기분에 휩싸여있다 싶더니, 갑자기 훅, 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뭔 소릴 하고 앉았냐, 나.
바보냐.
나는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한끝이라도 잘못되면 미래가 없는 중요한 작전 도중인데, 어쩌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걸까.
정신차리자. 내일은 중요한 날이다.
‘정보상’ 로아가 【시궁쥐】의 아지트를 알려줬으니, 히어로들도 내일 혹은 모레 정도면 출격해, 소탕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일단 작전이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다. 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어떤 준비를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될 수도 있다.
어서 잠이나 자자. 실수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자. 시험 전날엔 22시 전에 자는 남자고, 준비물은 다 있는지 일곱 번 확인하고 혹시 몰라 컴퓨터 사인펜에 2B펜슬에 시험용 연필을 각각 3종류 씩 구비해놓는 나다.
후후... 시험 따위, 얼마든지 와라....
......
..............
아니, 시험을 보려는 게 아니었지.
어쨌든 오늘 밤은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을 청하기 위해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눈꺼풀 아래에, 라헤의 가슴이 어른거려.’
잠에 들 수 있을까. 아니, 없을 것 같다.
나는 어쩌면 좋지.
* * *
스페이드는 새벽에 잠에서 깼다.
오늘은 여러 일들이 있어서 피곤한 날이었다. 자기 전에는 습격하러 온 빌런들을 물리치느라 힘을 쓰기도 했다.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더워.”
뭘까. 뭔가 답답했다. 가만히 있기에는 뭔가 불편했다.
방을 둘러본다. 창문 밖으로는 어두운 하늘이 펼쳐져있다. 평소에 늘 보던 풍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른 건 자신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뭔가가 이상하다.
스페이드는 스리슬금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비척비척, 무언가에 홀린 듯 걸어간다....
* * *
진짜 나는 어쩌면 좋을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나는, 눈꺼풀 아래에 어른거리는 출렁이는 가슴의 환상에 결국 잠들지 못하고 일어났다.
아아, 라헤의 그 죄 많은 가슴을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나는 왜 이토록이나 그 가슴에 끌리는 거지? 탄력도 모양도 풍만함도 본인도 완벽함의 정점을 찔렀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튼 채 가슴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계속했다. 가슴도(道)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그 길의 극의에 이를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은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만한다. 라니 무슨 미친 소릴 하고 앉았냐고 나는.
이상해.
라헤의 가슴이 나를 더럽혔어.
...아니, 더러운 건 나였고 오히려 정화된 걸까.
심오하다. 가슴.
생각한다, 가슴.
한 번 더 만져보고 싶다, 가슴.
그 신성한 가슴을 다시 한 번 목도하고 싶다!
과연 그 앞에서 나는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여러 고찰을 통해 라헤의 가슴을 신물(神物)에 가까이 여기게 된 지금 이전과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볼 수는 없다. 분명 똑같은 상황이 와서, 라헤가 스스로 옷을 벗고 가슴을 보여준다면 나는 그 앞에 무릎 꿇고 경건하게 기도드릴 자세가 되어이있다. 이럴 수가, 이미 나는 다시는 그 가슴을 만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 가슴이 내게는 너무 신성해져버렸다.
가슴가슴가슴가슴.
혹은 유방.
“오, 오오오오오오오옥...!”
양손으로 머리의 좌우를 감싼 채 무시무시한 신음을 흘린다.
뇌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각인된 기억이 내 머릿속을 침범하고 물들여간다. 이러다가 내 모든 생각은 라헤의 가슴에 지배당한다. 바보가 되어버릴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침을 질질 흘리며 “가스음... 가슴 보여주세여....”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안 돼... 이러다간 가슴의 미궁에서 헤매는 가슴의 미아가 되어버려...! 그런데 나는 가슴 얘기로 도대체 몇 페이지를 허비하고 있는 거지?
침대 위에서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나를 지배하려는 ‘가슴 세포’와 싸우고 있자니, 별안간 덜컥, 덜컥, 하는 소리가 났다.
“응?”
소리는 문 쪽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문을 열려하는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잠겨져 있어서 그냥은 들어올 수 없다. 나 말고는 여자 밖에 없는 히어로 기지에서 자는 것이다. 야밤에 어떤 무서운 여자가 찾아와서 나를 덮칠지 모르니 문단속은 늘 착실히 한다. 과연, 문이 잠겨져 있어서 나를 덮치러 오지 않았던 거군. 내일부터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야겠다. 언제든 마음 편하게 나를 덮치러 오세요.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문손잡이가 몇 번 더 덜걱덜걱 움직일 뿐이다. 진짜 누구지? 일단 열어줘야하나? 아니면 대답을 기다릴까? 좀 더 크게 물어볼까?
“누구세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우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득?
끼이이-
조금 전까지 굳건하게 닫혀있던 문이 손쉽게 열렸다. 손잡이는 부서진 상태다. 조금 전 그 소리는 손잡이가 부서지면서 난 소리였던 것 같다. 바닥에 떨어진 손잡이는, 무시무시한 악력에 산산히 조각난 채였다.
“...........스페이드?”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스페이드였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문손잡이든 문짝이든 깨부수는 건 쉽다.
아니, 그런데 왜?
“.......”
“저기, 왜 아무 말도 안 해?”
스페이드는 말이 없었다. 히어로들을 범하면서 착취한 마력을 눈에 집중해보았다. 커튼 틈새로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어둠 속을 뚫고 보이는 스페이드의 얼굴은, 멍해 보이는 데다 발갛게 붉어져 있었다.
비슷한 상태를, 몇 번 봤던 것도 같다.
“......13호... 왜... 여기?”
스페이드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긴 내 방인데... 네가 온 거거든?”
“어... 내가?”
스페이드는 의아한 듯 스스로에게 묻더니,
“과연. 그래... 그렇구나... 내가 온 거구나.......”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비칠비칠 내게 다가왔다.
전투복이 아니라 아침에 기어나올 때 자주 보던 낙낙한 반바지와 박스티 차림이다. 다만 반바지가 거의 흘러내려, 팬티가 슬쩍슬쩍 보이는 상황인데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얘 왜 이래?
잠이 덜 깼나?
“야, 스페이드. 여기 네 방 아니거든?”
“......그렇다며?”
“아니, 그러니까, 그렇다고....”
스페이드는 우뚝 내가 있는 침대 앞에 섰다.
침대에 어정쩡하게 앉은 자세다 보니, 나는 스페이드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스페이드는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스페이드...?”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다. 내 앞에 선 스페이드는 희미한 달빛 속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보다, 그대로 풀썩, 나를 덮치듯 엎어지며 쓰러졌다.
뭐야, 얘 왜이래?
이것저것 세뇌 암시를 주입시키긴 했어도, 이런 명령은 준 기억이 없다. 참모나 도로시가 뭔가 암시를 넣었나? 아니, 그랬다면 나한테도 전달을 했을 터다.
그렇다면 스페이드 본인 의지로 이러고 있다는 건데... 그토록 싫어하는 나를 상대로? 이대로 분노의 목꺾기라도 들어온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럴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요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처럼, 스페이드는 내게 몸을 맞대며 비벼왔다.
우, 우오오오오오?!
향기가 좋다, 그리고 부드러워...!
‘이 여자, 브래지어 안 했어...!’
티셔츠 아래에 가슴의 부드러운 탄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3호... 단단해....”
“뭐, 뭐야 너. 왜 이래?”
“글세...... 왜 이러지이... 몸이... 뜨거워셔....”
이 여자, 혀도 꼬였다.
술에 취했나? 잠에 취했나? 하지만 술 냄새는 안 나고, 눈은 풀려있긴 하지만 졸린 것 같은 눈치는 아니다.
“카지노... 로아 때의 후유증인가? 어이, 스페이드. 괜찮냐. 정신 차려.”
“우웅...... 모르겠셔....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막...... 여기가 욱신욱신 해서....”
“여기라니, 어디가.”
“부끄럽게... 보지가... 뭔가... 답답하단 마랴아.... 가슴도... 만져 줬음 좋겠구....”
스페이드는 내 몸 위에 올라타 몸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스스로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대었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유방의 감촉이, 티셔츠의 얇은 천 너머로 느껴졌다.
그 요염함에 나는 무심코 꿀꺽,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