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21 빌런과 히어로 사이에는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친다(4)
“꺼헉...!”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요.”
역시나다. 온 힘을 다해 라헤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주먹에 맞아 날아갔다.
저항은 소용없고, 의미도 없었다.
설령 이대로 벽을 뚫어버린다 해도, 보스에게 닿기도 전에 라헤의 순발력이면 그 전에 나를 날려버리든 팔을 잘라버리든 할 것이다.
“계속 하시겠다면 일단 얌전해지도록 사지를 잘라드리겠습니다. 팔? 다리? 그 정도는 고를 선택권은 드리죠. 5초 줄테니 빨리 결정해주세요.”
“태연하게 말하지마! 히어로잖아! 정의의 편이잖아! 좀 더 상냥하게 해 줘! 빼애애애애액!”
“빌런은 히어로가 지킬 대상이 아닌데요. 그보다 먼저 약속을 깨려는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1, 2....”
생생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아직 돌파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13호?! 13호! 나는 괜찮으니 가라! 괜찮아!』
보스가 문을 탕탕 두드리며 분한 듯 외쳤다.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에 끝까지 매달리는 걸 세간에선 자살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스한테 이런 소리까지 듣고, 포기하기에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3.”
라헤는 검조차 뽑지 않고 나를 내려보고 있다. 흰 전투복에 감싸인 모습은 어둠 속에서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다. 동시에 이렇게나 약한 나를 상대로도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은, 그녀다운 성실함을 드러내고 있다.
“4.”
나는 숨을 들이쉬고, 비장한 눈으로 라헤를 노려봤다. 죽음도 불사하고 목숨을 건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라헤의 손이 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다음 카운트로 그녀의 손은 휘둘러질테고, 내 팔이나 다리 어느 하나는 잘리겠지.
하지만 다음 액션을 안다는 건 크나큰 메리트다. 상대를 얕보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욱 더.
살을 주고 뼈를 깎을 각오를 다졌다.
“5... 이제 그만――”
“잠깐!”
라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나는 외쳤다.
“가슴 만지게 해 줘!”
* * *
라헤는 13호를 바보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고,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하고,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뭔가 오해한 게 아닐까 싶어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가슴을 만지게 해드리면, 얌전히 돌아가겠다, 이 말인가요?”
“그래! 네가 말했던 보상을 지금 받겠어!”
확실히 자신은 그런 말을 했었다. 적인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대신, 쓸만한 정보를 가져온다면 가슴을 만지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엔 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나 쿵쿵대며 13호를 걱정하듯 소리치던 바이올렛도 조용해져 버렸다. 침묵이 무겁다. 그런 주제에 흔들림 없는 13호의 눈을 보자니, 이것도 저것도 전부 바보 같아져서 라헤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걸로 얌전하게 있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다. 13호는 【시궁쥐】를 상대할 중요한 패라고, 부하인 아리아가 당부했으니, 가능한 멀쩡하게 두는 편이 가장 좋다. 만약 13호를 잃는다면 이번 항쟁으로 수많은 히어로들... 어쩌면 자신의 부하들까지도 헛되이 잃게 될 수도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아리아가 한 말이니, 틀림 없을 것이다.
물론 히어로로서 죽을 각오는 다들 되어있을 터다. 빌런을 죽이는 일을 허락받은 만큼, 자신의 목숨은 아깝다며 애지중지할 수준 떨어지는 대원은 자신이 지휘하는 7번대에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살릴 수 있는 목숨이 있다면 살리고 싶다. 특히나 가능성 있는 젊은이들의 미래는(몇 살 차이도 안 나지만) 지켜주고 싶다.
처녀도 아니고, 자신의 몸 정도로 부하들의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싸다.
“정말 괜찮은 거야?”
“몇 번이나 말하게 하고 싶은 건가요. 됐으니까, 하려면 빨리 끝내죠.”
13호는 경계하면서도 라헤에게 터벅터벅 다가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왔다. 이 간격이라면 이런 남자 2초도 안 돼서 완전 제압해버릴 수 있을테지만, 참기로 했다.
라헤는 각오하고 언제든 오라는 듯 팔짱을 끼고 자신의 가슴을 밀어올렸다. 옷 위에서도 알 수 있는 볼륨감 있는 살집이 강조되듯 밀려올라왔다.
마치 라헤 쪽에서 유혹하는 듯한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13호는 멀뚱히 서있을 뿐이었다.
“......뭔가요. 안 주물러요?”
“아니, 우리 계약 내용, 단순히 가슴 주무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
“무슨 소리를....”
“그치만, 떠올려 봐. 어디서 밑장 빼기를 하려 그래?”
이건 또 뭔 소리람, 이라며 라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몇 마디 덧붙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분명 많은 정보를 모아오면 모아올수록 더 많은 걸 해주기로 했다. 해주겠다고 하긴 했고, 확실히, 13호가 가져온 정보는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데다 보고서는 꼼꼼해서, 잘했다고 칭찬했었다. 뭔가 추가로 요구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상하지는 않은데.
......뭘 더 하라는 건데?
이제는 애처로워보이기까지 하는 라헤의 눈빛에, 13호는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벗어줘, 직접. 맨살 위에 만지고 싶어.”
그런 변태 같은 말을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 진지한 목소리로 하지 말아주세요, 진짜.
스륵, 라헤는 전투복 상의의 단추와 끈을 풀었다. 고급스런 자수가 들어간 흰색 상의를 벗자, 소매 없는 얇은 블라우스가 드러났다.
전투복 상의는 팔에 건 채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고작해야 스스로 옷을 벗는 것 뿐인데, 스페이드나 클럽에게선 볼 수 없었던 요염함과 색향에 13호는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반응에 라헤는 손을 잠시 우뚝 멈췄지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담담히 단추를 풀어나가길 계속했다.
블라우스의 앞섶이 벌어졌다. 드러난 것은 베이지색 브라에 감싸인 비칠 듯 투명한 피부의 과실. 어른스러운 살집의 두 덩어리는, 라헤가 브라의 후크를 끄르자 튕기듯 뛰쳐나왔다.
브라를 벗겨내고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유방은, 마치 보물상자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영롱한 보석 같았다.
“만져도, 돼?”
13호가 조심조심 묻자,
“......만져도, 돼요. 원하는 만큼 만지시죠.”
라헤가 새하얀 뺨을 붉히며,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13호가 만지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두 팔을 등 뒤로 돌렸다.
13호는 그런 라헤의 모습을 일단 눈으로 관찰했다. 반쯤 벗겨지다 시피한 블라우스 사이로 그러난 풍만한 유방은 핏줄이 비칠 듯 새하얗다. 그 정점에 선 돌기도, 그 주변을 감싼 유륜도 싱그러운 핑크빛이었다.
“......어서.”
『꿀꺽....』
어쩐지 벽 너머에서 눈치 없이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는데, 아무렴.
“잠깐, 이것으론 부족해.”
“네?”
“지금 이거, 어쩐지 내가 억지로 네 가슴을 주무르려는 것 같잖아.”
“'같잖아'가 아니라 딱 그런 건데요.”
“아니지, 지금 이건 계약의 결과로 하는 거고, 애초에 이건 네가 제안한 거잖아.”
라헤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가슴을 내보이는 이 수치스런 시간이 길어진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요.”
“네 쪽에서 말해줘. 주물러 달라고.”
“......미쳤어?”
라헤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13호는 한순간 쫄았지만, 그러나 대담하게 말을 이었다.
“해 줘, 라헤. '부탁드립니다, 라헤의 괘씸한 가슴을 맨살 위로 직접 만져주세요. 주물주물 해주세요'라고 말해 줘.”
죽을 각오를 하고, 눈을 딱 감고 부탁했다.
라헤는 새빨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에라도 죽여버릴까, 이 남자.
그러나 그럴 수도 없다. 하긴, 가슴을 주무르는 건 계약이었으니까. 하, 그렇다. 모든 일이 끝나면 당장에라도 죽여버릴 남자다. 죽기 전 소원 정도야, 들어줄 수 있다.
그래... 이 정도야... 들어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라, 라헤의 괘, 괘씸한 가슴을... 맨살 위로... 직접 만져... 주세요....... 원하는 만큼... 주물주물... 해주세요....”
죽고 싶었다. 정말.
그러나 13호는 만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는?”
“부, 부탁... 드립니다.......”
“흐음. 하지만 진심으로 보이지 않는데. 제3자가 보면 내가 널 성희롱 하려는 것처럼 보이잖아. 이러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나 고소될지도 모른다고?”
성희롱 맞잖아 변태야!
“좀 더 자신감 있게 말해줘! 본인의 의사라는 걸 보여줘!”
“부, 부탁드립니다! 라헤의 괘씸한 가슴을 주물주물... 에, 어... 만져주세요! 주물주물 해주세요!”
“잘했어! 이어서 '13호님이 가슴을 만져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시, 13호님이 만져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13호님께 만져지기 위해 이렇게 야하게 가슴을 키운 음란한 여자입니다!'”
“시, 13호님께 만져지기 위해 이렇게 야하게 가슴을 키운 음란한 여자입니다!”
수치와 굴욕으로 부들부들 떠는 라헤. 그리고 13호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식 웃었다.
“음란한 여자구나, 라헤.”
진짜 죽여버릴 뻔했다.
“응? 아니야? 그러면... 난 무서워서 가슴도 못 만지겠네....”
언제까지 가슴을 까보이게 할 생각이냐, 이 놈은!
“아, 아닙니다... 라, 라헤는 음란한 여자입니다... 음란한 여자니까 가슴을 만져주면 좋아합니다...... 어서 만져주세요....”
“진짜? 음란한 여자구나, 라헤는. ...좋아, 그럼 만져주마.”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죽고 싶다.
수치와 굴욕에 젖어 부들부들 떨면서 라헤가 재촉하자, 13호는 드디어 손을 내밀어 드러난 그녀의 유방을 매만졌다.
손바닥 아래, 믿을 수 없는 탄력과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체온이 섞인 감촉에 이대로 손목이 불타 끊어질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이, 이것이... 그토록 고대하던 대장의 가슴......!
라헤의 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리듯, 간단히 애무하듯 주무르며 감촉을 즐겼다. 슬슬 손가락을 기게 해, 미미한 자극을 주며 유륜과 유두를 자극하기도 했다.
라헤는 그 움직임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미처 다 참지 못하고 꼭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부하와 동기가 적들을 맞아 싸우고 있을 텐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묘한 배덕감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 반응해, 자신의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며 느껴버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헤픈 여자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오늘, 갑작스런 습격이잖아? 용케 그 짧은 시간에 전투복을 챙겨 입었네?”
“...일하던 중이었습니다.”
“이 시간까지? 자정을 넘었다고?”
“바쁜 일이 많습니다. 대장은 바쁘고요. ...뭐, 일은 일단락되고 평소하던 대로 티타임을 잠깐 즐기고 있었을 뿐입니다만. 메르와 함께요.”
“흐응... 평소대로 티타임인가.”
13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이상은 물을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주무를 생각인가요.”
라헤가 떨쳐내듯 말하자, 13호는 말 없이 주무르길 계속하더니, 별안간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가슴의 정점에 선 돌기를 혀로 굴리며 패인 곳을 자극했다. 유륜을 덮어내듯 핥아낸다.
라헤는 무심코 허리를 떨었다.
“다, 당신......!”
떨쳐내려면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라헤는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가슴을 주무르는 것을 허용했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있었으며.
그녀 스스로도 알 수는 없지만... 뭐랄까, 단호하게 거부할 수 없는 뭔가 기믹 같은 것이 머릿속에 끼릭끼릭 작동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춥... 추읍....
13호는 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라헤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고, 라헤는 그 혀놀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미미하게 허리는 떨고 있고, 새하얀 뺨은 붉게 물들었다. 유방의 정점에 선 돌기는 살짝 단단해져서, 좀 더 민감한 쾌감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이 이상은 안 돼요....
라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밀쳐내지도 못하고 생각만으로 그칠 무렵, 13호는 놀랍게도 순순히, 저쪽에서 멋대로 떨어져주었다.
“.....하....”
“음, 좋았어. 맛있어. 잘 먹었습니다.”
“......아, 네에....”
라헤는 멍한 눈으로, 그런 13호를 바라보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브라를 다시 착용하고,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고 전투복을 챙겨입었다.
“이걸로 만족하셨나요?”
“응. 역시 대장급이야. 가슴도 대장급이라고 해야하나. 기대한 것 이상으로 두근두근해.”
“성희롱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방에 돌아가세요.”
“그래, 마지막으로 인사만 좀 하고.”
13호는 보스가 있는 방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대답도 없었기에, 경쾌하게 수차례 더 두드리며 “잘 자요, 보스. 제 꿈에 나오시면 주라기 파크를 대접해드리죠.”라는 영문 모를 인사를 남기고는, 라헤가 보는 눈 앞에서 설렁설렁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13호가 있는 손님용 개인실은 라헤나 바이올렛의 방이 있는 이 층보다 두 층 위에 있기 때문에, 내려오려고 하면 금방 라헤에게 들키게 된다. 오늘 밤에는 이제 바이올렛을 탈출시킬 구멍이 더는 없을 것이다.
라헤는 천천히 떠나가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한숨과 함께 자신도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부하다. 보스인 자신을 구하러 와 놓고 되려 꼴사납게 당할 뻔하지 않나, 그러다가도 갑자기 적인 히어로에게 가슴을 만지게 해달라지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언젠가 도로시에게 저 녀석의 두개골을 쪼개서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달라고 해야겠다.
처음에는 그저 황당함 밖에는 느껴지지 않던 그녀였지만, 떠나갈 때 13호가 남긴 메시지에 그 마음도 금세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똑, 또독, 똑똑-
떠나가기 전 경쾌하게 들린 13호의 노크소리는, 바이올렛이 익히 아는 그녀와 13호만의 암호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읽던 어느 BL 소설의 한 장면을, 13호에게 억지로 시켰었다. 그 뒤로 자신이 불안할 때면, 가끔 농담 삼아 그 장면을 재현해 준다.
이 리듬감 있는 노크소리. 어느 하인이 불안에 떠는 주인에게 자기 전에 전해주었던 메시지.
「Don’t worry, no problem, my master.」
소설로 봤을 때는 코 끝이 찡-하고 울릴 정도로 감동이었는데, 13호가 하니까 그냥 오글거릴 뿐이다.
그렇긴 한데.
‘적어도 13호는 믿고 있으니까.’
그 바보의 자신을 향한 충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저 바보의 행동 하나하나는, 잘 뜯어보면 보스인 자신을 위해서인 것을 믿고 있다.
그런 자신의 부하가 이런 귀찮은 방식으로 ‘걱정말라’던가 ‘괜찮다’던가 전해줬으니, 보스인 자신은 태평하게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 기다리게 만들면 가만 안 둬, 13호.
혹시 다치더라도 가만 안 둘 거다, 13호.
바이올렛은 배게를 끌어안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 그럼. 나머진 부하들을 믿는 것으로 하고. 일단 오늘 밤은 읽던 BL을 마저 읽도록 할까. 현우의 방에 밧줄을 들고 찾아간 샘이 무슨 짓을 할지 너무 신경 쓰인다.
* * *
[그래서, 실패했다는 거야?]
“그래, 도로시. 실패했어.”
[한심해. 도대체 넌 할 수 있는 게 뭐야? 숨 쉬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참모가 아까 전에 사진 보내줬더라. 혹시나 내가 붙잡혀서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손톱 물어 뜯으면서 실험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며. 고마워, 걱정해줘서.”
[.......]
“어, 야, 잠깐만, 끊지마! 보고할 거 있다고!”
사정사정하며 당장에라도 전화를 끊으려 하던 도로시를 붙잡고, 나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로 했다.
[그래서 결과는?]
“일단 도로시 네가 말한대로 확인해봤는데...... 아무래도 빙고 같은 걸.”
지금 내 손에는 언젠가 봤던 도로시의 ‘세뇌 체크리스트’가 들려있다. 펜을 손 안에 빙글빙글 돌리며 몇가지 문항을 메워간다.
“라헤한테서도 세뇌의 영향이 보이는 것 같아. 세뇌가 전혀 통하지 않는 건 아닌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