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21 빌런과 히어로 사이에는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친다(1)
“나 말이야... 요즘 이래저래 엄~청 고민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강아지?”
“그래? 네가 생각이란 걸 한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는데.”
“어머나~ 이 강아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할까~.”
“아흐윽. 히, 힐은... 위험해...!”
7번대의 기지, 내게 배정된 개인실.
그곳에서 나는 차가운 맨바닥에 눕혀진 채, 고간을 메르에게 밟히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항하고 싶어도 이 여자의 능력인 ‘중력조작’으로 온몸이 짓눌려서,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다.
이 나쁜 년은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나를 괴롭히며 즐기고 있는데, 언젠가는 복수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언제 복수할지는 요원하다.
“고민하는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매너가 없지 않니?”
“고민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괴롭힐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라는 점에서 넌 이미 최악이라고 이 년아!”
“이 년?”
“아흐흐흑.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메르님!”
꾸욱꾹 힐 끝으로 고간을 밟히니, 고통과 동시에 말로 할 수 없는 쾌감이 밀어닥쳤다. 맙소사. 난 이제 어찌할 수 없는 변태의 길에 들어선 걸까.
“그런데 참, 아무리 괴롭혀도 강아지는 전혀 풀이 죽질 않으니까... 왜 이렇게 나를 고민하게 하는 거니? 괴롭힐 거리가 부족할 지경이야.”
“메르님의 고민거리가 되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어머나, 정말 응석받이라니깐. 여기가 좋은 거니? 여기가?”
“흐그그그그극... 거, 거긴 섬세한 부분이니 좀...!”
메르에게 실컷 괴롭힘 당하던 나는, 슬슬 그녀가 질려갈 때쯤 ‘정보상’에 대해 물어졌다.
정확히는 이번에 알아낸 일에 대해서지만.
“‘각성화’하는데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약이면 된다고?”
“그렇대... 근데 보고서로 써서 라헤한테 넘겼으니까 그걸 보면 되잖아.”
“네 입으로 직접 들을래~. 읽기 귀찮은걸~.”
바닥에 네 발로 엎드린 내 위에, 메르가 승마용 채찍을 손에 든 채 거만하게 올라탔다.
“약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은 모양이야.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고, 달라고만 하면 얼마든지 주려고 한다던데.”
“필요한 건 약을 받을 인맥 뿐이란거네~.”
‘정보상’을 찾아갔던 것도 어제의 일이다.
‘정보상’ 로아는 세뇌되고 나니 순순히 그녀가 아는 정보를 말해주었다. 【시궁쥐】의 아지트부터 시작해 그들의 규모라던가, 하고 있던 실험의 내용, ‘각성화’에 대한 것, ‘각성화 약’의 유통경로까지 그녀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주었다.
그렇게 들은 대강의 내용은 7번대에 돌아오자마자 라헤에게 구두로 전했고, 나머지는 보고서로 정리해서 제출했다.
아주 꼼꼼하게.
그도 그럴게 내가 얻어온 정보가 자세하면 자세할 수록, 라헤 그 여자에게서 받을 수 있는 포상이...... 그 괘씸한 가슴이.......
짝! 메르가 재촉하듯 채찍으로 나를 때렸다.
“강아지. 열심히 했네? 그래서, 라헤한테 뭘 받아먹으려고?”
“......하, 하. 그냥 열심히 일한 것 뿐인데?”
“내가 모를 줄 알아?”
짝!
다시 한 번 채찍이 나를 때렸다. 아파 이 년아.
“라헤는 별자리 때문에도 성격 때문에도 이런건 확실하게 하는 편이니까. 강아지 한테 뭔가 부탁했으면, 분명 거기에 맞는 대가도 확실하게 제시했을 거야. 그렇지?”
“그, 그, 그런가?”
짝!
채찍이 또다시 나를 때린다. 제발 그만해.
“있잖아, 강아지. 그거 나 주라.”
“뭐......?”
“네가 일한 보상, 라헤한테 요구할 권리, 나한테 달라고.”
메르는 황홀한 표정으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나를 괴롭히는 걸로 모자라서 내 기쁨까지 뺏겠다고? 거기다 내가 열심히 수고 들여 얻어온 정보의 대가를?
개소리마! 라고 외치며 메르를 떨쳐내려 했지만,
“대신에 이 누나가 좋·은·거♥ 해줄게.”
별안간 메르의 손이 부드럽게 내 턱을 쓰다듬으며, 얽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뭘까. 스페이드나 클럽 같은 애들에게는 느낄 수 없던, 벌꿀 같은 달콤함과 성숙한 색향이 코와 머리를 어지럽혔다.
“어때? 강아지. 라헤보다 기분 좋게 해줄 자신 있어... 응? 누나한테 맡기렴....”
마치 악마의 속삭임. 속지마라. 이 여자 나보다 연하다. 연하의 테크닉에 농락당할만큼 호락호락한 남자는...!
“왜, 왜 그러는데! 네가 그 여자한테 요구할 게 뭐 있어!”
“많지. 적어도 너보다는.”
또 다시 채찍으로 찰싹! 때려졌다.
“굳이 너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지만... 나는 굴복시키는 걸 좋아하거든. 그게 적이든, 동기든, 친구든 상관 없어... 거기다 라헤는 그 고고한 모습이, 정말 더럽혀주고 싶고... 하아아... 상상으로 젖어버릴 것 같아.......”
혼자 황홀경에 빠지는 건 좋은데 그러면서 채찍으로 연신 두들기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아프다. 아프다고.
“어쨌든 강아지, 좋은 말로 할 때 라헤를 내게 넘겨!”
“닥쳐! 그 가슴은 내 거야! 절대 안 넘겨!”
결국 메르에게 중력조작+채찍+힐+매도 세트로 고문과도 같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라헤의 가슴을 주무를 권리는 빼앗기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장하다.
* * *
“하여간 그 여자는 언제까지 날 괴롭혀 먹을 런지....”
메르가 질려서 떠나가고 난 후에야, 나는 허리를 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 여자는 너무 날 괴롭힌다. 언젠가 밑에 깔고서 앙앙거리게 만들어주겠어.
일단 거울을 보며 확인한 결과 눈에 띄는 상처는 나지 않았고, 옷에 가려지는 부분만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걸 알았다. 용의주도하긴.
문득 뒤에 스윽- 하고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13호 오빠, 괜찮아요? 그 여자, 역시 죽여둘까요.”
“......흉흉하네. 근데 아리아 너, 언제 들어왔냐.”
“오빠가 계신 곳에 저는 항상 있을 거예요. 후후후후....”
귀신보다 무서운 여자다.
아리아. 늘상 입는 짧은 한복차림에 꽃갓을 쓴, 야한 무당 같은 복장은 여전하다. 게슴츠레한 눈은 졸려 보이지만, 안에서 빛나는 금빛 눈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세뇌가 너무 잘 되어서 그런 건지, 그녀는 틈만 나면 나와 붙어있으려고 한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생각 없이 스윽 옆을 보면 어느샌가 방구석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하기도 한다. 진짜 소름 돋는다니끼? 요즘 세상에 여기만 납량특집이다.
애초에 아리아를 세뇌한 건 ‘또 다른 미래의 나’라는데, 나라고는 해도 도대체 어떻게 저 여자를 세뇌한 건지 감도 안 잡힌다. 하여간 신기한 놈이야, 나란 녀석.
“아리아.”
“네......웁.”
아리아를 끌어당겨 가볍게 키스를 즐겼다. 혀를 밀어넣자, 아리아 또한 적극적으로 혀를 받아들이며, 황홀한 표정으로 타액을 삼켰다.
아리아에게선 복숭아 같은 향기가 났다.
츄웁..... 춥....
“......후아....”
키스를 끝내고 얼굴을 떼자, 아리아는 가볍게 휘청이더니 내 몸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올바로 섰다.
“맛있었어, 아리아.”
“헤에... 고맙습니다...... 오빠....”
아리아는 기쁨에 겨워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내 목께를, 쇄골을 할짝할짝 핥았다. 핑크빛의 보드라운 혀가 닿아, 따뜻하고, 달콤하다.
그런 아리아의 정수리를 툭툭 쳐주고는,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보상’ 로아에게서 들은 정보는 구두로도, 보고서로도 라헤에게 전달했다. 조금 전 메르에게도, 라헤에게 전달한 내용 그대로 다시 한 번 말해준 것 뿐이다.
나는 분명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로아가 말해줬던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을 뿐이다.
나를 추궁하던 메르의 눈빛에는 의심이 담겨있었다. 그야 협정 중이라곤 해도 원래는 적이니까, 그런 내가 전한 보고에 거짓은 없는지 의심하는 거야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메르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그녀의 태도에서, 눈빛에서, 이따금 보이는 분위기에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하다. 우리는 적이다.
4번대 대장인 실도, 7번대 대장인 라헤도 마찬가지로 의심은 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만큼 직접적으로 나를 몰아세우지는 않을 뿐이다. 열심히 나를 관찰하고 언젠가 꼬리를 내밀면 붙잡으려는 심정일 것이다.
우리는 적이다.
휴전 따위를 맺고 있지만, 【시궁쥐】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협정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적으로 돌아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아리아, 원래 네 예지대로라면 【시궁쥐】의 다음 행동은 사흘 뒤에 일어나. 맞지?”
아리아는 내 목에 코를 박은 채 습하습하 내 체취를 깊이 맡으면서도, 견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의 예지대로라면 이 7번대는 사흘 뒤에 습격당한다. 【시궁쥐】 측에서 손실을 각오한 선제공격으로 S시를 담당하는 몇 개의 히어로 지부를 일제히 습격하고, 경고와 함께 자폭, 주요 구성원들에게 타격을 입힌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일반인들까지 끌어들이는 대규모 테러 작전이 시작된다.
폭탄과 환각을 이용해 사회의 기능을 거진 마비로 이끌고,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하는 히어로들을 저격하며 숫자를 줄이고, 대장급들은 천칭자리의 능력을 구사하는 똘마니에 의해 한 명 한 명 무력화 당하고....
그렇게 전란의 불길이 커지고, 이 빌런 조직이 일으킨 테러의 불길은 전국에 퍼져나가게 된다.
“하지만 미래는 바뀌었어.”
예지한 미래가 반드시 올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아리아가 한 예지를 뒤집기 위해 라헤는 빌런인 나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본래 아리아의 예지대로면 죽었어야 했을 【어비스】의 멤버들은 전원 살아남았다.
이처럼 아리아의 예지 덕분에 우리의 미래가 바뀌었으니,
마찬가지로 【시궁쥐】도 아리아의 예지만 안다면 얼마든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시궁쥐】 쪽에 애플로 보이는 여자가 새로 들어왔다는 모양이야~.’
――‘잠입시켜둔 아가 말로는, 홀린 것처럼 그 여자를 따른다던데~.’
――‘본래 짜두었던 계획도 뒤집어 엎을 정도로 바뀌었다나 봐~.’
지금 현재, 아리아의 예언과 달라진 부분은 세가지.
우리 【어비스】가 7번대와 휴전 관계에 있다는 것, 아리아에 의해 【시궁쥐】의 계획이 예지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그런 아리아의 예지를 아는 애플이 도망쳤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래는 불확정 요소 투성이의 블랙박스로 변해버렸다. 아리아의 예지는 컨디션에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새로 바뀐 미래의 예지를 바라기는 어려운 상태다.
히어로 측은 여전히 정보가 부족하고, 결국 아리아가 미리 내놓았던 예지를 토대로 대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틈을 찌를 작정이다.
가진 패를 모두 이용해서, 이 삼파전 같은 상황이 일단락 되었을 때, 다른 히어로들을 배제하고, 최종적으로 라헤를 세뇌하는 것으로... 7번대를 완전 함락한다.
――‘우리 아가한테서 연락이 끊겨서, 【시궁쥐】 녀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이제는 몰라~. 하지만 언제 일을 벌일지는 알아~.’
라헤에게도, 메르에게도 말하지 않은 한가지 정보. 모든 일을 내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하나의 열쇠.
나는 내게 달라 붙은 아리아의 머리를 토닥이며, 로아의 말을 담담히 반추했다.
――‘내일 밤. 【시궁쥐】는 계획을 앞당겨서 히어로 지부들을 습격할 거야.’
오늘 밤, 이 7번대 지부가 습격당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7번대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자...... 그럼 난 어떻게 움직여볼까.
* * *
“애플님...♥ 당신의 충실한 노예 준비 완료입니다...♥”
“하아아...... 저도 준비 됐어요오...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 아직 밤 특유의 번잡스러움이 남아있는 거리에서, 일전 13호가 화물차로 들이박아 여전히 너덜너덜한 모습의 7번대 지부를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헐렁한 옷을 입은 여자, 국부나 중요한 부위만 간신히 가린 옷차림의 여자, 옷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를 천쪼가리로 몸을 덮은 여자... 전부 가지각색. 이들에게 공통점은 그들 전부 여자라는 것과, 각자 타투나 옷의 문양으로 ‘해골 쥐’가 그려져 있다는 점뿐이다.
‘해골 쥐’, 빌런 조직 【시궁쥐】의 전용 마크다.
“7번대 요격부대, 준비 완료 했습니다...♥ 애플님의 명령대로... 엉망진창, 유린해줄게요...♥ 하으으으......!”
* * *
“예, 그럼 잘 해주시길 빌게요. 사랑스런 당신들이 있어서 저도 너무 기쁩니다. 우리 함께 즐겁게 해봐요.”
【시궁쥐】의 아지트.
애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지에서 오는 연락에 일일이 대응하고 있었다. 계획해두었던 히어로 지부들을 습격할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다.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서무계 히어로로서 각지의 상황을 전해 듣고 조립하는 건 충분히 익숙해져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움직이면, 즐거워질까.
어떻게 하면 7번대도, 빌런 조직 【어비스】도 마음껏 유린하며 자신의 노리개로 만들 수 있을까.
그녀는 오매불망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는, 최면에 빠진 【시궁쥐】 단원들을 훑어보며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