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20 카지노에는 무시무시한 여자가 산다(1)
라헤에게 부탁을 받았다. 부탁의 내용은 ‘뒷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각성화 기술에 대해 알아볼 것’.
분명 이건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만한 중대한 안건임이 틀림없다. 본래 나와 그녀는 빌런과 히어로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적대관계지만 어느 그룹이든 ‘인류’라는 베이스가 깔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없으면 히어로는 의미가 없고, 사람이 없으면 빌런도 의미가 없다. 마치 야생에서 육식 동물끼리만 살아남는 게 의미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건 중요하다. 사람들이 더욱 풍요를 누릴수록, 우리 빌런들이 할 일은 늘어나고 빌런짓에는 더욱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돕는 것 뿐이지 별 다른 뜻은 없어.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찰칵!
“......저기, 왜 굳이 변명을 하려는 거야? 그냥 대장의 가슴에 낚였다고 하면 되잖아.”
찰칵!
“누가 그런 고깃덩어리에 낚였다고. 물론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해. 근데 그거에 낚여서 보스의 명령도 와작와작 씹어먹고 적대 조직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뭔가 빌런으로서 끝장 같은 기분이 들잖냐.”
찰칵!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넌 이미 인간으로서 끝장났으니까.”
찰칵!
7번대 기지, 스페이드의 방. 나는 스페이드의 한마디에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인간으로서 끝장났다니, 인정은 하는데 직접 말로 들으니 충격이 크다.
나는 슬픔에 잠겨 열심히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도대체 이건 뭔데...?”
스페이드는 부들부들 떨면서,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옷은 평소의 전투복이 아닌 경찰복인데,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짧은 것이 절대로 제대로 된 복장은 아니다.
스페이드는 미니스커트 경찰복을 입은 채, 다리를 살짝 벌리고 속옷이 보일락말락한 선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그녀 본인의 의지는 아니다. 지금 그녀는 포즈를 취한 채 움직이고 싶어도 얼굴 이외의 몸이 밀랍이 굳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13호가 만지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움직여졌다.
그녀 본인에게 ‘스스로의 몸을 조작한다’는 기능이 빠진 것만 같았다.
“좋아, 이 차림도 충분히 찍었으니까, 다음은 이거야. 간호사복.”
“야, 야! 그게 무슨 간호사복인데?! 그냥 천쪼가리잖아?!”
“무슨 소리야. 어엿한 간호사복이잖아. 이 색깔이라던가.”
“넌 옷을 색으로 구분하냐?!”
다음으로 13호가 꺼낸 것은 분홍색 간호사복. 다만 척보기에도 천의 면적이 굉장히 적다. 옷을 입고 있는 부분보다 드러난 부분이 훨씬 많은 건 명백했다.
‘시, 싫어~~~~~~! 13호... 죽일 거야. 진짜 죽이겠어!’
“자, 자. 힘을 빼고.”
13호는 움직이지 못하는 스페이드가 입고 있던 경찰복을 손수 벗겨주었다. 단추를 끄르고, 조심스레 팔을 꺼내고, 관절을 움직여가며 옷들을 벗겨내간다. 제복 상의도, 치마도 벗기자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스페이드는 가릴 수 조차 없었다.
지금 스페이드는 완전히 13호의 옷입히기 인형 같은 꼴이 되었다.
“가, 갑자기 아침 일찍 찾아오더니 이게 뭐야... 뭐냐고. 사, 사람을 가지고 놀고 싶은 거야?”
“어엿한 일이야. 【길드】에 제출할 헌상품이 필요하거든.”
“【길드】......?”
“앞뒷세계를 전부 아우르는 정보상 조직이야. 빌런 연합에도 발을 걸치고 있으니 우리는 동류라고 여기고 있지만. 자, 다리 올린다?”
13호는 분홍색의 착 달라붙는 치마에 스페이드의 매끈한 다리를 꿰어주었다.
“그거랑 지금 내 사진을 찍는 게 무슨 상관인데?”
“거기 보스가 취향이 별 나거든. 여자를 좋아하고. 네 지금 사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뭐, 뭐, 뭐...?! 잠깐, 이, 이 부끄러운 사진을 어디에 보여주는 거야?!”
“걱정 마. 귀여워, 스페이드. 그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일품이야.”
“싫어~~~~~~! 싫다고~~~~~~~~!”
“그렇게 말해도 이런저런 옷을 입어서 기쁘지?”
“아, 니, 거, 든~~~~~~!? 당장 혀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일단 너부터 사지를 찢어버린 다음에 죽을 거야~~!”
“어......? 사람은 누구나 코스프레 같은 거 해보고 싶어하지 않아...? 믿기지가 않는데.”
“나는 네 쓰레기 같은 사고방식을 믿을 수가 없어!”
“뭐, 어차피 지금 넌 움직이지 못하니까 상관 없지만.”
그 말대로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스페이드는 굴욕의 눈물을 삼키며 13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입게 된 간호사복은, 예상한 대로 배라던가 젖가슴 아래라던가, 치마도 짧아서 팬티까지 빼꼼히 드러나는 옷이었다. 옷의 의미가 없잖아.
13호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이것저것 포즈를 취하게 한 스페이드를 카메라에 담고,
“자, 그럼 다음은 이거.”
“또 있어?! 몇 개나 더 있는 거야?!”
“대충 27종. 어느게 상대 마음에 들지 모르니까.”
“싫어~~~~~~~~~~~!”
스페이드의 옷입히기 수난은 계속 이어졌다.
* * *
흐윽, 흑, 훌쩍....
“너무 울지 마 스페이드. 괜찮아. 사진 진짜 잘 뽑혔으니까. 도로시의 새 발명품인데――”
“네가 뭔데 괜찮다고 하는데!”
“그건 그렇네.”
“진짜...... 13호 넌 언젠가 반드시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열 갈래로 찢어서 죽일 거야. 와득와득 씹어 부숴버릴 거야.”
“기운이 넘치네. 그냥 우는 여자보다 그렇게 이를 가는 여자가 100배는 낫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가볍게 정장의 소매를 정리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스페이드는 자신의 차림새를 불안한 눈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저기, 근데 이 옷....”
“괜찮아. 여기 사람들은 다 그 정도로 입으니까. 이 정도는 되지 않으면 얕보인다고. 이상한 옷도 아니잖아?”
지금의 나는 새카만 정장에 회색 조끼를 입은 차림이다. 옆에 선 스페이드는 하늘하늘한 짧은 드레스 차림으로,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있다.
어린 대학생에겐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딱히 입어서 이상한 차림은 아니다.
“여기가 그 【길드】가 있는 곳이야?”
“있다고할까. 여기가 【길드】의 거점이야.”
스페이드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카지노는 처음이야....”
그 목소리엔 어렴풋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확실히 어지간하면 들를 일이 없는 곳이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카지노에 와있다.
카지노 ‘골든 파라다이스(Golden Paradise)’. 국내의 열 몇밖에 안 되는 허가 받은 카지노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 큰 규모의 카지노다.
딱, 따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소란스러움이 넘치지만, 그마저도 고급스러움에 감싸여 있었다.
“저기저기, 13호 너 이런데 자주 와봤어?”
“자주 올 리가 있냐. 게임도 블랙잭 밖에 못해.”
“호오. 쉬워서?”
“온라인 탈의 블랙잭 게임이 있었거든.”
“.......”
스페이드가 경멸스런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근처의 종업원을 불러서 말을 전한다. 평소에는 이 카지노의 지배인이지만, ‘정보상’으로서의 그녀를 만나려면 특별한 코드를 전달해야만한다. 이 코드는 참모가 알아준 덕분에 수월했다.
종업원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기다려달라며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한 김에, 드레스 아래로 스페이드의 엉덩이를 만지며 기다렸다. 미쳤나며 스페이드가 원망스런 눈길로 노려봤지만, 반항은 하지 못했다.
“바짝 긴장하도록 해. 정보상이란 것들은 제대로 된 놈들이 없으니까.”
“그, 그런 놈이랑 만나는데... 이런 맥빠지는 짓이나 하는 거야...?”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입하는 거야. 연료를 채워 넣는 느낌으로.”
“읏... 이럴려고 나도 데려온 거였어...? 심심할 때 성희롱 하려고...?”
“글쎄.”
나는 모호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이드가 의심쩍은 눈으로 올려다봤지만, 어쩔 수가 없다.
스페이드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만으로 만족 못 해, 슬쩍 속옷을 옆으로 밀고 따뜻한 음순을 살살 자극했다. 손에 닿은 음순이 희미하게 젖어들 때쯤 종업원이 돌아왔다. 이제야 희롱에서 해방되었다며, 스페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지배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카지노 안쪽 홀, 거기서 더 안쪽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 * *
‘난 왜 데려온 거야?’
안 그래도 팔랑팔랑한 드레스도 불편한데,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왜 데려온 걸까.
스페이드 안에 싹튼 그런 의문도, 안내된 집무실에 들어가자 쏙 들어가버렸다.
집무실도 넓다...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스페이드는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내며 집무실 안을 살폈다.
이런데 평범한 월급을 받는 평범한 히어로인 자신이 와도 되는지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런~ 기다리게 해버렸네에~ 오랜만~.”
얼마 지나지 않아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에 들어왔다. 폭신폭신해 보이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새카맣고 고급스런 정장이 어우러지자 마치 옛 귀족을 보는 듯한 감상이 들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어서 왔는데.”
“어머나~ 그 옆에 있는 귀여운 아이는 여자친구~? 어린 여자친구를 데려왔네~ 앙큼하긴~.”
아니얏.
스페이드는 당장 그렇게 외치려 했지만,
“흐~응. 진짜로 귀엽네~. 내 빌런명은 로아라고 해~ 잘 부탁해~.”
여성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뭔가 오싹한 것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 뭐야?
순간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앞의 여성이 두려워져, 몸이 달달달달 떨리려는 것 같다. 뭐지 이건? 압박감? 두려움? 거역해선 안 될 것 같은 녹슨 쇠고랑이 철그렁철그렁 온 몸을 옭아매는 것만 같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었다간 다음 순간 그녀가 커다란 입으로 꿀꺽 자신을 먹어치울 것만 같았다.
능력...? 능력인가? 눈을 마주치는 게 트리거가 되는...?
어느 순간 폐조차 활동을 멈췄다. 숨이 멈춘 것이다. 마치 딱딱한 돌덩이로 변해버린 것만 같다. 아아, 과연, 그러고 보면 그런 신화가 있었다. 어떤 괴물의 눈을 본 자는 모두 돌이 되어버렸다던 그――
“그만하시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올 때마다 장난치는 것 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
턱, 하고.
13호가 스페이드의 눈 앞을 손으로 가리자, 순간 그녀를 지배하던 모든 압박감이 사라졌다.
아아,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다. 늘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 손이다. 세뇌의 영향인지, 그 손이 닿는 것만으로 깊은 안도감이 온몸에 둥실둥실 퍼져나간다――
“어머나,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보란 듯이 데려와 놓고 그런 태도는 너무하지 않아? 행동 하나하나에 솔직함이 묻어나는 순진해보이는 성격에, 가슴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하고, 찰랑이는 머릿결에, 꾹 찌르면 바로 반응할 것 같고, 거기다 직전까지 뭔가 당했는지 색기가 있는 표정... 아아, 이봐, 13호~. 너 지금 이 아이를 데려온 거, 따먹어 달라고 헌상하러 온 거 아냐~? 그런 뜻이지~? 나한테 주겠다고 데려온 거 맞지~?”
어, 어, 어, 어???
스페이드는 당황스러웠다.
눈 앞에 있는, 로아라는 사람은 여자다. 13호에게 눈이 가려지기 전에 똑똑하게 봤다. 잔뜩 패인 드레스 사이로 엿보이던 커다란 가슴이, 여성스런 굴곡이, 그리고 들려오는 톤 높은 목소리가 그녀는 여성이라고 알려주는데, 말투도 여성스럽긴 한데, 어째 그 내용이....
“네 그 여자 취향은 여전하구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 네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똑같이 나도 여자를 좋아하는 것 뿐이고, 네가 취향이 바뀌어 남자를 좋아하게 되지 않는 한 나도 평생 여자를 좋아하겠지~. 당연한 거 아냐~?”
13호는 한숨을 내쉬며 스페이드의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스페이드가 불안한 눈으로 로아를 다시 바라봤지만, 조금 전과 같은 압박감은 없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했어~ 다시 한번 소개할게~ 내 이름은 로아고~ 이 카지노의 지배인이고~ 정보상 같은 걸 하고~ ......그리고 여자를 좋아해. 너 같은 여자애는 특히 더. 정말 무지무지하게. 미친 듯이. 세계의 절반과 맞바꿔도 좋을 정도로 좋아해. 그러니까 잘 부탁해~.”
스페이드는 등골을 훑는 오싹한 감각에, 무심코 몸을 떨었다. 무, 무서워....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자신이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13호의 팔을 꼭 안고 있었고, 그 가녀리고도 애처로운 모습이 로아의 마음에 질투와 욕망의 불꽃을 화르륵 불태웠다는 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