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막간 코코 에피소드 후일담 & 그리고 빌런은 가슴의 유혹에 져버렸습니다
철컹, 철그럭, 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코코를 구속하고 있던 구속구가 풀리는 소리라는 것을, 참모는 자유로워진 그녀의 양 팔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마, 맙소사?! 분명 제대로 세뇌됐을 텐데요...?!”
“솔직히 나도 이렇게 손쉽게 세뇌당해버릴 줄은 몰랐어. 정말이지 난감해. 난감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야.”
코코의 눈과 참모의 눈이 마주쳤다.
천이 벗겨져 드러난 눈빛엔, 체념 따위 보이지 않았다. 체념은커녕, 승리의 여신이 든 횃불과도 같은 불꽃이 그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있지 참모, 너는 네 스스로 완벽하게 나를 세뇌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그게 사실 ‘유도되었다’고 하면 어쩔래? 예를 들면 나를 구속할만한, 핵심적인 암시는 하지 못하도록... 애매하고 단락적인 암시만 걸도록.”
“그럴, 리가....”
온 몸의 땀샘이 열리고, 식은땀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녀가 참모를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고 생각한 순간,
“허, 헉?!”
눈을 깜박인 사이, 목마 위에 있었어야 할 코코는 이미 자신의 눈 앞에 서있었다. 자신의 복부에 새카만 무언가를 가져다 댄 채다.
아, 이건.
전기충격기......?
“여자를 우습게 보지마, 멍청 씨.”
코코는 웃었다.
다음 순간.
파직! 하는 소리. 눈 앞에 불똥이 튀고, 참모는 정신을 잃었다.
* * *
“어휴, 진짜 어제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13호는 투덜거리며 아지트에 도착했다. 보스의 심부름으로 【비밀의 방】에 들러야 하는 것이다.
‘거기 들어갈 때마다 머리 아픈데.’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가가기도 싫었지만, 보스의 명령이라니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오늘은 한 번 아지트에 들러야 되기도 했고. 코코라는 히어로 아가씨의 조교를 마무리하겠다고 들었다.
세뇌가 통하지 않는 그 아가씨가, 어떻게 바뀌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아지트에 들어서자니, 마침 로비에 어정거리던 참모와 딱 마주쳤다.
“참모? 여기서 뭐해?”
“아, 오셨습니까 13호님.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코코 그 아가씨가 생각보다 끈질겨서 지쳤거든요.”
참모가 곤란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쓰며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조교는 잘 되지 않았나 보다. 이 참모가 어려워하다니, 보기 드문 일이다.
“정말이지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면 반격 또 반격... rpg 게임의 무한 부활권의 용사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히어로랑 용사, 딱 맞네.”
“그러면서도 엄청 교활한 게, 용사가 아니라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학을 떼는 참모의 표정에 과연, 고생했구나, 싶었다.
“조교는 아직 하고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상태 보시겠습니까? 코코 양을 보러 온 거죠?”
“그리고 【비밀의 방】에서 보스한테 부탁받은 걸 좀.”
“보스한테서요? 어떤 겁니까? 제가 갔다 올 테니 그 참에 13호님은 코코 양을 보고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참 솔깃한 제안이다. 그 방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파오니까.
“그거 좋네. 부탁할게. ***번이랑 ***번 자료를 좀 가져와 줘.”
13호가 순순히 열쇠를 넘기자, 참모는 불평 한마디 없이 생긋 웃으며 받아들곤 총총히 위로 올라갔다.
참모를 배웅한 13호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심문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의 복도는 일부러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짠데다 검붉은 얼룩이 여기저기 그려져있다. 이거 참, 무서운 분위기다.
‘어디보자, 코코의 심문실은 여기던가?’
13호는 명패보드에 ‘코코’라고 적인 심문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 앞의 참상에 멍한 한숨을 내쉬었다.
“으우.... 웁........”
심문실의 한가운데에는 나무로 된 삼각목마가 있었으며, 기익- 기익-하는 소리와 함께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삼각목마의 끝, 가랑이에 닿는 부분은 고무로 되어 있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홈이 움직일 때마다 자극어쩌구저쩌구.
분명 훌륭한 고문도구이자, 아픔보다는 쾌감을 주는 성인용 장난감에 가깝다.
대상자가 여성일 경우에 한해서만.
“......참모, 왜 네가 여기 있냐.”
“웁....... 우우.......”
문제는 삼각목마 위에 구속된 것이 남자의 알몸이라는 것이다.
알몸의 참모가, 양 손을 뒤로 한 채,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입에는 볼개그를 물고, 온몸은 밧줄을 이용해 묘한 방식으로 묶이고, 가랑이는 삼각목마의 꼭대기에 닿아 고통받고 있다.
여성에겐 쾌감을 주는 용도였겠지만, 대상이 남성이 된 순간 삼각목마는 공포와 고통의 고문기구로 변모했다.
당했구나, 이 녀석.
13호는 참모의 입에 물린 볼개그를 빼주었다.
참모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뜨거운 숨을 토하며,
“하악... 흑... 코, 코코님... 감사합니다.... 기뻐요......♥”
기쁘게 외쳤다. 네가 조교 당하면 어쩌자는 거냐.
13호는 참모를 걷어차 목마에서 떨어뜨렸다.
* * *
능력을 이용해 참모로 변장한 코코는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나 쉽다니, 남자라는 것들은 역시 멍청한 것들 밖에 없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유능한 걸까.
첩보부 소속인 그녀에게 구속구를 해제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도 않다. 구식 구속구면 피부 아래에 숨겨놓은 침을 이용해 빼낼 수도 있고, 디지털식 구속구면 관절을 빼내어 풀어버릴 수도 있다. 유능한 그녀에게 불가능은 없다.
실제로 조교 기간 동안 그녀에게 적용되는 세뇌약이 개발되고, 세뇌까지 당한 것은 조금 오산이었지만, 교묘한 심리트릭을 이용해 상대방의 사고를 유도한다... 이 역시 유능한 첩보부의 소양이다.
13호에게 받은 키를 이용해 서류고 안의 비밀의 방에 들어간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긁어모아서, 나중을 위한 포석으로 삼자.
그렇게 방 안에 들어간 코코의 눈에 비친 것은,
작은 방 하나에 꽉꽉 들이찬 얇은 책이나 CD같은 물건들이었다. 거기다 한쪽 벽면에는 포스터가 몇 장 커다랗게 붙여져있는데, 알몸에 가까운 남성들이 서로 얽히거나 눈이 마주치거나 한 그림들이었다.
이 시점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뭘까? 일반적인 문서 같은 것으론 보이지 않는데.
“이거, 설마....”
책장을 하나하나 살피면 내용물을 확인한다. 그리고 탄식했다.
【비밀의 방】. 이곳에 있는 것은 기밀문서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보일 수 없는 온갖 하드한 취향의 BL물들을 모아놓은, 보여선 안 될 취향의 것들을 숨겨놓은 비밀의 방....
코코는 다시 한번 탄식하다, 별안간 머릿속에 벼락이 친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이 방, 참모나 13호의...?
BL을 좋아하는 남자들이었다...?
그러고보면 참모의 13호를 향한 충성심은 보통이 아니다. 그게 혹시 사랑에서 온 거라고 한다면.
“......마, 맙소사...!”
코코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그런 거.
매우 좋아하는 전개다...!
실제로는 보스의 취미일 뿐이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인 망상에 사고가 쇼트되어버린 코코는, 13호가 서둘러 올라올 때까지 멍하니 비밀의 방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막간 – 그리고 빌런은 가슴의 유혹에 져버렸습니다
“요 2주 동안, 빌런 범죄가 급증했어요... 이유를 아시나요?”
슬슬 7번대와의 휴전 생활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라헤가 뜬금 없이 그렇게 물어왔다.
오늘도 익숙하게 3번대의 대장 메르를 등에 태운 채 개처럼 바닥을 기던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그래?”
“......저번에 스페이드의 대학에 나타났던 빌런 포르치니도 그렇고, 체크가 소탕한 빌런 조직 【러비쉬】도 그렇고, 그 외에 다른 지부에서도 능력을 이용한 빌런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며 곤란한 상황이에요.”
그러고 보면 둘 다 나도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지.
“남자들인데도 능력을 쓰고 있었지. 우리처럼.”
“맞아요. 13호 당신은 옛날 개조 실험의 피해자로 능력자로 각성했었죠?”
그 말대로 나는 어느 연구시설에서 멋대로 납치해, 멋대로 개조 실험을 한 결과, 멋대로 능력에 각성해버렸다.
당시 실험체 번호는 300번대까지 있었지만, 각성한 건 결국 나와 참모 뿐이었다. 각성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각성한 빌런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어요. 그 말은 시궁쥐 쪽에서 한 각성 실험이 제대로 열매를 맺었다고 보면 되겠죠.”
“100프로 확를로 각성시킬 수 있다는 거야?”
“그것까진 모르지만, 어쨌든 높은 확률로 각성시킬 수 있는 기술이 생긴 건 분명해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하다.
나타난 빌런들은 딱히 시궁쥐의 빌런들이 아니었으니까.
“그 더러운 쥐새끼들이 기술을 유출한 게 아닐까 싶어요. 뒷세계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각성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어째서...?”
“그것까진 모르죠.”
라헤는 담백하게 인정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나한테 이걸 다 말해주는 거지? 의문스런 눈으로 올려다보자(메르는 재미없다는 듯 자꾸만 내 머리를 탁탁 두드렸다), 라헤는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에게 부탁할 게 생겨서 그래요. 일단 우리의 계획은 시궁쥐에 대항하기 위한 협정 상태니까... 일손이 부족한 지금 당신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되거든요.”
“우린 휴전 관계일 텐데? 도움을 주거나 할 수는 없어. 그게 보스의 방침이고. 애초에 왜 보스가 아니라 나한테 말하는 거야?”
“......쉬워보이니까. 당신네 보스, 허술한 것처럼 보여도 은근 깐깐하고.”
“내, 내, 내, 내가 어디가 쉽다는 건데! 그런 소릴 듣고 도와줄 거 같아? 절대 안 도와줄 거거든!”
“유치해라....”
라헤가 탄식하며 중얼거리고,
“어머나, 강아지.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등 뒤에 올라탄 메르는 즐겁다는 듯 내 종아리를 힐 끝으로 짓밟았다. 나쁜 년. 나 좀 그만 괴롭혀.
“아무튼 임무입니다.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만한 루트를 저는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루트로 좀 알아봐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없다니까. 우리가 하는 건 공투도 아닌 단순한 휴전. 난 보스한테 명령 받은 일만 할 거야.”
“......이것도 시궁쥐에 관련된 일인데도요? 가급적 도와줬으면 하는데요.”
“아직 보스의 명령이 안 떨어졌으니까. 내가 나서는 타이밍은 보스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뿐. 그렇게 손쉽게 이용해먹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라헤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르가 “강아지~ 말 안 들어~?”라며 나를 찰싹찰싹 두드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후후,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라고. 쉬운 남자로 보지 말란 말이다.
“이래도~?”
“으극?!”
갑자기 어마어마한 압박이 등을 짓눌렀다. 메르의 능력인 ‘중력조작’으로, 자신의 무게를 늘린 것이리라.
이 썩을년이!
“이, 이 정도로 굴복하지... 않아...!”
“흐응~ 그럼 이대로 10배 더....”
“메르, 그만해주세요. 협박은 제 별자리의 의사에 반하니까요.”
“......재미없어~.”
등 뒤를 짓누르는 무게가 사라지고, 가벼운 메르 본인의 무게만 남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나 했더니, 라헤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았다.
“애초에 그냥 부탁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거래를 하죠.”
“흥.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나를 움직일 수는 없을 걸.”
“만약 당신이 저희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면,”
후, 어떤 조건으로 나를 유혹할 생각인지, 들어나 주지 뭐.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귀를 기울였다.
“제 가슴을 주무르게 해드리죠.”
.........
..........................
.............................................................?
지금 뭐라고 했지?
나는 무심코 라헤를 올려다봤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에 필요한 곳에 충분히 가있는 싱그러운 살집이 있는 몸. 무엇보다 빙옥의 마녀라는 별명과 달리 천녀에도 비견할 법한 아름다운 이목구비.
꿀꺽, 침을 삼켰다.
......하.
물론 매력적인 건 인정한다. 라헤는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세뇌도 제대로 걸리지 않는 그녀만큼은 솔직히 손을 대는 것도 하늘에 별 따기 같은 기분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그녀와 나는 히어로와 빌런 사이. 고작해야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려서야 한심한 놈 밖에 더 되지 않는가. 얕보여선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귀중한 거래의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뭐랄까 훨씬 유익할만한 것을 제안하자. 좋아. 그렇게 결정했으면 고민해보자. 어떤 제안이야말로 유익하려나.
“성과에 따라 좀 더 좋은 것도 해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것들이에요. 궁금하지 않나요?”
“당신의 개라고 불러주십시오. 이 13호,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약 성립이네요.”
“아이~ 이 멍청한 강아지~.”
메르가 실망한 듯 내 뒷머리를 찰싹찰싹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