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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화 〉#19 히어로 코코는 유능하지만 짜증난다(1) (86/271)



〈 86화 〉#19 히어로 코코는 유능하지만 짜증난다(1)

조금 시간을 되돌려보기로 한다.


* * *


[참모 정기 보고서]

[20XX년 모월 모일 XX:XX


빌런조직 【어비스】의 참모로서 저는 일어나는 각종 일이나 상황에 대해 직접 볼  있는 기록을 남겨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일단 기록하고 본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13호님이 처음으로 히어로 스페이드에게 당했었던 그 날의 일도, 13호님의 뼈가 몇 대나 부러졌고 13호님의 의식이 얼마나 날아갔었는지 그 당시 제 안의 충격과 13호님을 향한 애절함과 히어로에 향한 원망과 슬픔을 대략 137페이제 달하는 레포트를 써서 남겨뒀던 것도 있었죠.

이와 같이 붙잡아왔던 히어로들에 대한 레포트도 각각 상세하게 작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신체측정수치나  사람마다의 잘 느끼는 포인트, 어디를 누르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괴롭히면 벌레를 보는 눈으로 저를 깔봐주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전부 기록해두었습니다.

아아, 이것만큼은 자랑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행동을 x라는 수치로 정한 후, 제 행동에 따라 사랑스런 히어로들께서 저를 얼마만큼의 오물로 보는지 그 수치를 임의계수 o로 표현하며 갖가지 요소들을 집어넣어 완성한  오리지널 ‘마조 수식’을 응용해 만들어낸 데이터 분석 페이지는 노벨능욕상을 받아 마땅한 연구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뭐.

도로시 양이 그걸 보고서는  뇌를 갈라 연구해보려 했을 때는 진짜 죽을 뻔 했습니다만, 사소한 일이니 넘어가겠습니다.

덤이지만, 세뇌개발에 관한 레포트도 쓰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은 히어로들의 세뇌 경과 및 상태에 관한 보고서 및 레포트를 시간 단위로 작성하고 있습니다만, 덤으로 작성하는  뿐이라 요점만 추린 결과 각각 약 40~5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레포트가 완성되었습니다.


저야   ‘마조 수식 데이터 분석 레포트’에 집중하고 싶은 기분입니다만, 이것도 필요한 거니까요.


자, 그럼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히어로 코코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데  이런 쓸데없는 서두가 달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녀에 관한 보고서도 레포트도 조금 쓸게 없어서요.

쓸게 없다고할까, 굉장히 난감합니다. 절대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히어로 코코에 대해 지금까지 이뤄진 간단한 분석 결과를 요점만 뽑아서 종합하자면――



존나 귀찮은 여자입니다, 썅.]



* * *



“......참모? 이 보고서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예......? 그렇습니까...?”


7번대와 우리 빌런조직 【어비스】가 휴전협정을 맺고 1주일하고 이틀 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지트에 돌아와 있었다. 혼자는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아리아를 대동한 채다.

지금까지는 7번대의 감시가 엄격한데다 혹여나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할까 의심하는 바람에 아지트에 돌아오는  제한되었지만, 라헤 대장 쪽에서 체크를 해방해달라며 요구해 준 덕에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 참모가 날 봤을 때는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울면서 매달렸지만, 남자의 울음 따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긴 했지만.

“일단 해방하기 전에 체크 양의 세뇌 상태를 확인하셔야 겠죠. 일단 간단한 상태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되겠지. 네가 쓴 리포트, 보여 줘.”


이렇게 되어서 체크의 세뇌 레포트를, 겸사겸사 코코의 레포트도 보게 된 것인데....


“아니, 그러니까 이거....”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13호님?”


“그게, 이 귀찮다던가, 뭐야, 이걸로 끝인데?”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13호님?”

“.......”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13호님?”

 되겠다.  녀석 고장난 레코더처럼 변해버렸다.  보니 눈가도 거무죽죽하게 다크서클이 내려와있고....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도대체?

“13호가 돌아왔다고?!”

참모에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때마침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도로시가 나타났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범접할 수 없는 다크서클과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백의까지. 어디 하나 바뀐데 없어보이는 건강한 모습이 반가웠다.


아니, 다크서클이 조금 더 진해지긴 햇나?


내가 손을 흔들어주자, 도로시는 이를 꽉 다물고 분노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퍽!


“이 멍청이가!!!”

자그마한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쾅쾅 두드려대며, 도로시는 같은 단어를 연발했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사이사이로 찰진 육두문자들이 끼어들었지만, 도저히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륵또륵 흘러내렸다.


“내가, 내가 어떤 맘이었는지 알아?! 보스도 너도... 주, 죽는 줄 알고....”

“미안해, 미안. 그치만 다친 곳도 없어. 무사히 돌아왔다니까.”

“닥쳐 멍청아! 맞기나 해! 맞아! ......좀 아파하라고! 왜 기분나쁘게 웃고 있는데!!”

원없이 나를 퍽퍽 때리던 도로시는, 결국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는지 왕왕 거리며 울어버렸다.


항상 건방진 그녀가 이리 반응해주니, 난감하면서도 은근히 기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여워보여서 큰일이었다.



“......치욕이야. 울어버리다니.”

“우후후후, 도로시 양의 귀중한 장면은 확실하게 찍어뒀으니까요. 오늘 밤만 1000번 정도 돌려보겠습니다. 아깝긴 하지만 홍보용으로 SNS에도 올리도록 하죠. 도로시 양의 코어팬들이 은근 많은 모양이라 분명 좋아요가 폭등할 겁니다.”


능글거리며 웃는 참모의 말에, 도로시는 눈가를 닦아내며 주머니에서 새카만 외장하드를 꺼냈다.

“그 데이터 당장 지우지 않으면 참모  방에서 훔쳐온 5테라짜리 AV 외장 하드, 부숴버린다?”

“어떻게 제 보물을?! 지, 지울게요! 지우겠습니다! 그거 만드느냐고 깨진 돈과 시간이 얼만데! 이제 하나 밖에 안 남았단 말입니다!”

“지웠어?”


“네! 지웠습니다!”

“잘했어.”

휙, 뽀작!

“내 보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도로시는 가차 없이 하드를 바닥에 내던져 부숴버렸다.  위로도 발로 콱콱 짓밟아 철저하게 분지르고 있다.


“일단 오늘은 체크를 확인하러 온 거라 오래 있을 순 없어. 대신 해방해주고 나면 교환조건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있게 될 거야.”

“......상관 없어, 오든 오지 않든. 너 따위 걱정도 안 하고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보다 보스는 무사해?”

쿨한 목소리로 말하긴 하는데 언제적 츤데레냐, 넌. 일단 고개는 끄덕여주었다. 보스도 건강하게 잘 있다.


...너무 건강하다 못해 이 아지트에서와 똑같은 칠칠 맞은 BL 사랑 백조로 되돌아간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제발 아침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올빼미 생활은 그만해줫으면 좋겠다. 새벽에 머리도 안 감고 주방에 굴러 나와 먹을  없나 찾아보거나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히어로 기지에 있으니 할 일도 없어서 완벽한 방콕 니트  자체가 되어버렸다. 마음이 아프다.

어쨌든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아리아는 도로시와 함께 회의실에 남겨 두고, 나는 참모와 함께 심문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왔다.


일단 체크를 확인해야하긴 하는데,


“......그런데 코코 있잖아. 뭔가 문제라도 있어?”

궁금함을 이기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음흉한 참모가 이런 보고서를 쓸 정도가  걸까.


질문하자마자 참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보시면 알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참모는  심문실 앞에 섰다. ‘코코’라고 심문실 명패 밑에 붙여져 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고 생체인증을 통해 도어락을 연다. 자동으로 열린 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 참모는,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입니까.”


뭐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심문실은 생각 외로 제대로 물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각종 고문도구들과 그러면서도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침대가 같이 있는 것이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있어야  사람이 없다.


심문실은 우리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에 사람 없는 구속도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나는 눈으로 참모에게 물었다.


참모는 쓰게 웃으며 심문실을 손으로 가리켰다.

“도망치는 겁니다. 맨날.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터무니 없는 강적의 예감 같은 것이 들었다.

* * *



헷, 지금쯤 나를 찾고 있으려나.

“아~아. 역시 나는 완벽한 여자라니까. 빌런 조직에 붙잡혀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나, 완전 멋져. 완정 사랑해. 이제 멋지고 돈도 잘 벌고 미래가 밝고 상냥하고 지적인 남자친구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언젠간 생기겠지! 난 완벽한 여자니까!”

코코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서류고 안을 뒤졌다.

코코는 잠입이나 탈출, 은밀 임무에 특화된 히어로다. 괜히 【첩보부】 소속인 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각종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도 그녀의 특기  하나다. 참모의 피학선호(즉, 매저키스트) 성향을 알아보고 적절한 매도와 가학으로 참모를 농락하기도 했고, 참모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보고 몰래 그의 방에 잠입해 그가 소중히 아끼는 AV 컬렉션 외장 하드 하나를 그의 눈앞에서 부숴주기도 했다(두 개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누가 가져간 걸까? 아쉽네).

“나를 잡다니, 후회하게 해주겠어. 유능한 여자를 얕보지 말라구.”


참모의 능력 때문에 아지트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항상 도망친 걸 들키면 금방 도로 잡혀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처형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자고.


그렇게 해서 참모를 괴롭히거나, 【어비스】의 비밀에 속할 중요한 자료를 몰래 열람하거나, 참모를 괴롭히거나, 참모를 괴롭히거나, 참모를 괴롭히고 있다. 이후로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참모를 괴롭힐 거다. 우후후후.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네... 완전 짜증.”


코코는 서류함을 다시 정리하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가 참모를 괴롭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몰래 【어비스】의 기밀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다. 눈을 돌린달까, 바보 같은 짓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뒤로는 몰래 진정 유익한 이득을 챙기는  완전 천재!

‘......하지만 유익한 내용은 별로 없었어.’

체크는 사고를 전환하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끈을 꽉 조이며 생각에 잠겼다.

서류고 안의 서류들은 그녀로썬 별 의미 없는 보고서나 레포트 같은 게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7번대 히어로들의 가슴이나 허리 사이즈의 정확한 측정 수치나 성감대,  그에 관한 레포트가 각각 30장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질려버렸다. 더불어 ‘마조 수치 대입 응용 분석――마조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것’이라는 정신 나간 내용의 레포트를 봤을 때는 진짜로 머리가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필요한 내용은  안쪽.’


코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서류고의 안쪽에는 엄중한 보안 장치가 걸린 또 다른 방이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거나 [I급 비밀!]이라거나 적힌 팻말이 붙어있는 걸 보면 아무 것도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생체인증이라거나, 저런 기계적인 보안장치는 아무래도... 전자세계의 엑스퍼트인 애플이라도 있다면 이런  한 큐에 끝낼 수 있을 텐데.......

‘발소리?!’

문득 서류고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코코는 서둘러 몸을 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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