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막간 체크 후일담 & 시궁창 쥐 빌런과 사과 히어로 (85/271)



〈 85화 〉#막간 체크 후일담 & 시궁창 쥐 빌런과 사과 히어로

소파 위에서 정신을 차린 체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5층 플로어의 대부분을 차지할 거대한 사무실. 자신은 그 한 켠에 놓인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 애용하는 봉과 무기들이  백은 소파의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으며, 본인은 4층에서 입었던 파렴치한 치파오를 여전히 입고 있었다. 국부를 가까스로 가리는 새카만 치파오의 천을 잠깐 들어올렸다 내려놨다.

머리가 안개가 낀것처럼 멍하다. 이곳에 올라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매하기만 한 단편적인 기억만이 났다.

‘......온 몸에서, 뭔가 비릿한 냄새랑... 끈적......’

“아, 히어로 가시나들은....”

둘러보니, 붙잡혔던 두 히어로들은 소파 아래서 소파에 기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어딘가 구속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전투복 소매아래에, 얻어맞은 듯한 멍자국이 보여서... 체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복도로 나와 사무실과는 다른 작은 방에 들어가니, 대략 30명쯤 되는 험상궂어 보이는 남성들이 묶인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슨 약을 쓴 것인지,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넋이 나간 얼굴들이다.


체크는 그런 그들을 무심하게 내려보고는, 애용하는 봉이 아닌 시퍼런 날이  삼척도를 꼬나쥐고 그녀의 눈앞에 수직으로 세워 올렸다.


“후우.......”

【오의――낙화요란(落花搖亂)】

그대로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방 안에 있던 남자들의 몸에 금이 가나 싶더니, 단번에 조각조각나며 새빨간 피의 꽃을 흩뿌렸다.


혈해(血海)가 펼쳐진 방안을 체크는 한 번 무정하게 훑어보고는, 방을 나왔다.







빌런조직 【러비쉬】는 여자들을 납치하고 협박하거나 하며, 여성들의 몹쓸 동영상을 찍거나 하는  나쁜 조직이다. 그런 곳에 히어로라고 해도 묘령의 여성 둘이 붙잡혔다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하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가혹한 폭행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당했겠지.

그러나 두 사람을 데리고 기지로 돌아오니,  사람은 빌런조직에 들어온 이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마치 확신하듯 증언했다. 몸에 난 상처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오히려 가물가물하게 13호로 보이는 남성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내며,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던가, 애매모호한 말을 흘렸다. 아무튼  사람  기분은 좋아 보였다. 적인 빌런들은 전부 처벌했고, 임무는 완료했고  사람  무사히 돌아가게 되었으니――굳이  자세하게 사정을 파고 들 필요가 없었다.


‘......그 문디가.’

그러니 이후의 것들은, 정말로 의미 없는 고찰이며 어디까지나 체크 개인의 상상이다. 어디에 말해도 의미가 없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지레짐작이다.

――빌런 13호는 어쩌면 히어로가 붙잡히는 것을 알고,  심한 짓을 당하기 전에 구하러 갔던  아닐까.


――빌런 13호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짓을 당한 히어로들을 세뇌해, 그런 나쁜 기억들을 지워버린 건 아닐까.

――나쁜 빌런들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함으로써,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 것은 아닐까.

빌런을 냉정하게 죽여버린 히어로. 히어로를 동정하며 살리기 위해 애를 쓴 빌런.

“......머리 아프데이.”


체크는 조금, 아주 조금, 빌런과 히어로의 관계에 의문을 품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막간 – 시궁창의 똘마니 쥐는 독사과를 물어버렸습니다.]



“어라, 도로시. 조정은 끝났나요?”

빌런조직 【어비스】의 아지트,  다이닝룸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참모는, 흐느적흐느적 걸어 들어온 도로시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새하얀 실험용 가운을 입은 동안의 과학자 뒤에, 가지런한 흑발과 클로버 문양의 머리 리본이 눈에 띄는 소녀가 졸졸 따라 들어왔다.

“아직... 좀  해야해. 많이 나아졌지만.”

“그런가요?”


도로시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예의 없게 입을 대고 꼴깍꼴깍 마셨다.


참모가 눈을 돌리자, 흑발의 소녀――히어로 클럽이 공허한 눈으로 참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은 완전히 사라져, 마치 죽은 인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찮은 거 맞죠? 진짜로.”

“푸하. 못 믿는 거야? 이 천재님을? 그럼 보여줄게. 클럽, 「열려라 참깨」.”


도로시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클럽의 눈에 단숨에 빛이 돌아왔다.


클럽은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더니, 참모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버들나무가지 같은 모양 좋은 눈썹을 모으고는,


“Fuck. 죽어버리시죠.”


두 손을 들어, 중지를 세워보였다.

.......

.....................

...............................................?


“저기, 도로시?”


“완벽하지?”

“어디가 말입니까?!”

그토록이나 순종적이던 아이가! 무슨 짓을 햇길래 원래 모습으로 롤백된 거지!

거기다 아직도 중지를 내리지 않는 데다,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죽이려들지 않을 뿐이지, 완벽하게 세뇌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 편이 효율이 좋아서 그런 것뿐이야. 본래의 인격을 남겨두지 않으면 괴리감이 생겨서 한 번 삐끗하면 세뇌가 완전히 풀려버리니까.”

그런데, 라며 도로시는 체크의 모습을 살폈다.

“너, 완벽하게 미움받고 있네.”

“그건 오히려 기쁘지만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제 안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겠어요. 좀 더 욕해줬으면 좋겠고, 좀 더 차가운 눈으로 봐준다면... 하아, 하악, 하악.....!”


“Fuck.......”

클럽의 눈이 더더욱 차가워져 빙점 아래로 내려가고, 참모는 그에 따라 더욱 기뻐하며 군침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애플 양은 세뇌하면서 인격이 지나치게 바뀌었었지요. 이번에 세뇌가 풀린 것도 그 때문일까요.”

“......글쎄. 내가 보기엔  여자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무슨 뜻이죠?”

“......숨겨져 있던 본심이라던가... 그런게 이번 일로 새어나온 걸지도 몰라. 이성으로 억눌러온 본능 같은게... 뭐, 어차피 추측이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는 게 없는 이상, 손을 떠나버린 패가 아닌, 지금 손 안에 들어온 클럽을 신경 쓰는 편이 유익하겠지.


하지만 클럽의 상태에 관해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원래의 인격이라면 결국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반항하는  아닐까?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면 차라리 불안정하더라도 원래대로 두는 게 나을 것이다.


참모는 그러한 걱정을 입에 담았지만, 도로시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겉은 이래도, 한꺼풀 벗기면 네 입맛대로의 노예니까 걱정하지마. 조금만 자극해보면 알아.”

“그럼 지금 당장....”

“발정난 개새끼야? 아직 마무리 안 됐으니까 손대지 말라고.”

“맞아요, 손대지 마요, 더러운 fucking 쓰레기 놈아. 꿀, 하고 울면서 당장 거기 엎드려서 기다려, 역겨운 돼지새끼.”


“하윽......!”


클럽의 매도가 기쁘다. 심장을 두드리는 매도의 쾌감에 참모는 가슴을 부여잡고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서류 뭉치가 흩어졌다.

“그건 뭐야?”

“아...... 13호님이 부탁하셔서, 자료를 좀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시궁쥐】가 앞으로  할 건지,  바라는지....”


“그 녀석들이 바란  ‘비각성자의 각성화’였잖아. 실험 자체는 성공했다고 들었고, 그럼 이제 깽판칠 일만 남지 않았어?”


“글쎄요.......”


참모는 안경을 고쳐쓰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아본 바로, 【시궁쥐】는 비각성자를 부당하게 취급한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있는 집단이다.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대부분 단원들의 본래 목적은 사회복귀... 그렇다면 요란한 일은 벌여도, 지나친 일은 벌이지 않을  같다.


‘그것도 아니려나요.’


하지만 시위라는 명목으로 과격한 일도 여러 번 저지른 경력이 있으니... 확실하게 말하긴 어렵다.

바보들은 이게 문제다. 무슨 바보 같은 일을 벌일지 모르니,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다.

거기다 문제는 그 쥐새끼들만이 아니다.


통칭 닥터.


각성화 개발 실험을 주도하고, 【시궁쥐】의 빌런들에게 각성화 시술을 한 흑막 같은 과학자.


참모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남자의 속마음은  수가 없었다.  원하는 걸까.

...아직은 정보가 부족하다. 시간을 들이면 좀 더 판단할 재료가 늘어나려나.


참모는 곤란한 표정으로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시궁쥐】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닥터라는 남자가 뭘 하려는 건지도,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것 밖엔  수 있는  없다.


“지적인 척 하는 참모, 재수 없어요. 혀 깨물고 뒈져요, 참모. Fuck, fuck, fuck.”


“......후.”

자, 그럼.

생각해봤자 의미 없는 일은 잠시 킵해두고, 지금부턴 조정이 끝나고 난 클럽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 유익한 생각을 하기로 했다.



* * *


“너슈? 요즘 우리 아지트 주변을 알짱거린다는 년이.”


빌런조직 【시궁쥐】의 아지트, 그 심문실에서 똘마니 같은 얼굴의 남자가 한 여성을 다그치고 있었다.


와이드팬츠에 낙낙한 티를 입은, 어떻게 보아도 일반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은 의자에 두 팔을 뒤로  채 묶여있었으며, 겁을 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만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알맞게 부푼 가슴이 너무 매력적이라, 똘마니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유방을 옷 위로 붙잡은 채 양껏 주무르고 있다.  여자가 무슨 일로 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괘씸한 가슴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알아서 뭐하게? 아~~~~주 나쁜 놈들이라는 것만 알아둬.”

조심조심, 고개를 숙인 여성이 묻자 똘마니는 킬킬 웃으며 놀렸다.  너머로도 느껴지는 탄력 있는 유방을 주무르니, 엔돌핀이 팍팍 도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는 뉘슈? 왜 우리 아지트 주변을 쫄래쫄래 돌아다니는 거슈? 응? 제대로 말 안 하면 이 괘씸한 가슴을――”


“여기가 빌런조직 【시궁쥐】의 아지트라는  알고 왔습니다.”


“......? 너, 일반인이 아닌....”


“‘각성화’ 개발이 끝났다는 것도, 당신네들 전원이 그 시술을 받았다는 것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성이, 시선을 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빨려들어갈  같은 갈색 눈동자가, 똘마니의 눈과 마주친다.

“닥터가 이미 당신네들 조직을 떠난 것도, 지금 제 눈 앞의 당신이 누구인지도,  조직 전원의 이름과 프로필도, 자금 규모는 얼마이며 당신들이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도,”

마치 주문처럼, 여성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똘마니는 갑자기 입이 굳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말도   없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저 이 여성의 말을 흘러담을 뿐이다.

“이 조직이 이제 곧 히어로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당신네들이 바라는 ‘세상을 바꿀 시위’를 벌이려는 것도, 당신들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산하 조직이 얼마나 되며 각자의 취미나 습관도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때로는 무엇을 무서워하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지금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무엇이 취향이고 어떻게 살아가며 생각하는 바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평선에서 새로운 관점이  다른 플리에 적합한 회로를 따라 이어지고 생각하고 더해지고 나눠져서 그러고 보면 동방이라고 하는 것은 사방을 둘로 나눠서 그런데 아래에 있는 그건 무엇인지 어라 위에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고보니 그걸 아시나요 가끔은 아침에 의미가 없는 느낌으로 그렇지만 저녁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요 아하하하 역시 그건 의미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잠깐 한  눈을 감았다 떠보지 않겠나요 그러고 보면 뉴런 사고라고 하는 게 있는 데 말이죠 자 심호흡을 한 번 해보시고 눈을 떴다 감았다 좋아요 그대로 입을 한  벌려볼래요 아하하 바보 같은 얼굴 마음에 드네요 저를 보세요 저를  더 바라봐주세요 제 눈을 보시고 눈을 떼지 마세요 당신의 몸은 돌처럼 굳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하지만 제 목소리는 그대로 끝까지 당신의 마음에 파고들테죠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아하하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봐요 저 잘 알고 있죠 그쵸 어울리지 않네요 오히려 어울리나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줄래요 좋아요 잘했어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알겠지요――제 얘기, 듣고 있으신가요?”

똘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샌가 여성의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던 손은 떨어져 있었다.


여성은 뒤에 묶인 팔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거, 풀어주실래요?”


똘마니는  말대로 순순히 밧줄을 풀어주었다.

여성은 손목을 가볍게 문지르고는, 잘했다는 듯 미소지으며 똘마니의 톡을 고양이에게 하듯 가볍게 긁어주었다. 그것만으로 똘마니는 지고의 행복을 느낀 듯 황홀경에 젖었다.

아무런 약도 도구도 쓰지 않았건만, 완벽하게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예, 이대로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면 된답니다. 알겠죠?”

똘마니는 에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은――전(前)히어로 애플은 그런 그를 기특하다는 듯 올려다 보았다.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하는 편이 좀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와봤는데... 역시 좀  확실한게 좋겠죠? 그렇죠? 그렇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럼, 좀 도와주실래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착한 아이네요.”

똘마니의 귀에  이상 그 내용을 생각할 분별력은 없었다.


그저 눈 앞의 주인님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다는, 그런 열정만이 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