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18 무술에 능한 히어로 체크는 OO에게 굴복한다(2)
“체크, 일을 좀 맡겨도 될까요?”
“문제 없습니더~ 무슨 일이라예? 팍팍 썰어버리는 일이면 환영이래~이.”
반갑게 말하는 체크에게 라헤가 몇 장의 서류를 건네주었다.
어떤 회사의 위치,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상세한 내용이 적혀진 서류였다.
빌런 조직 【러비쉬】. 단순히 육체를 강화개조한 빌런 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텐데, 사흘 전 토벌하러 간 C급 히어로 두 명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임무 랭크가 C에서 B+로 올랐다.
‘조직의 규모는 30명이 안 되는 숫자... 강화개조라곤 해도 C급 히어로 둘이면 충분하데이.’
그런데도 역으로 당했다고 한다면, 생각보다 숫자가 많거나, 불의한 함정에 걸렸거나...... 혹은, 정보에 나오지 않은 ‘강화된’ 능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B+라고는 하지만 정보가 부족하다. A급 히어로인 스페이드도 맡을 수 있는 임무지만, 경험이 많은 체크 쪽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체크는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근처 지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저희 쪽으로 넘어왔네요. 스페이드나 아리아라면 단독으로는 위험할지 모르는 임무입니다만... 체크에게 맡기겠습니다. 괜찮죠?”
“하모~ 전혀 문제 없으니 걱정 마이소, 대장.”
라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체크는 볼 때마다 사투리가 바뀌네요. 저번이랑 말투 또 바뀌지 않았나요.”
“.......”
“그냥 평범하게 말하면....”
“내한테 이상한 사투리 가르쳐준 오빠 언니들을 탓하라예.... 이제 와서 평범하게 말하는 거 부끄럽고....”
본인의 개성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라헤는 포기하기로 했다.
* * *
‘흐음...? 특필할 만한 건 없는 것 같데이?’
체크는 목표인 보험회사 건물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절반 정도의 빌런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뭔가 사고를 치려하는, 잘 포장해줘야 관종들 같은 집단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에 자신들이 있음을 어필하고, ‘각성자’를 우대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 빌런 조직 러비쉬는 특필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질이 나쁜 부류인가.’
강화개조까지 받은 빌런들이 조용히 있는 경우는 하나 뿐이다.
뒤가 구린 일을 하는 것.
뒷세계에 흘러든 기술을 이용해 어두운 일을 하는 것이다. 결국 질이 나쁜 부류의 녀석들이다.
전자의 빌런들이라면 EBS강의와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다시 사회로 돌리지만, 만약 도를 넘은 불법을 행하는 더러운 녀석들이라면.......
‘살해해도 된다.’
살해 허가는 떨어져있다. 일반인을 뛰어넘은 강화 빌런들은 구속할 방법이 없으니.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라 봉을 쓰지만....’
일단 철저하게 깨부숴고,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진짜 인간 이하로 떨어진 쓰레기들이라면 용서는 없다.
단단하게 각오하고, 체크는 보험회사로 가장한 빌런 조직의 아지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왔느냐, 체크!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샌드백 대신으로 쓴 거 제대로 복수해주겠어!”
근데 왜 저 바보가 여기 있는 걸까.
* * *
13호는 이곳이 보험회사로 위장한 【러비쉬】의 아지트라는 것도, 어떤 빌런들이 있는지도 아리아의 예지로 다 알 수 있었다. 또 얼마 안 있어 체크가 이곳을 제압하러 올 것도.
마침 상황이 좋았다. 도로시가 말한 ‘세뇌에 필요한 환경’과 아리아의 제안으로 이 아지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 느낌으로 이미 이 아지트는 제압해뒀어. 너도 임무 완료. 나쁘지 않지?”
“......하아....”
체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오랜만의 임무라 몸도 풀 겸 좋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저 치한테 빌런들을 제압할 힘은 없을 테니... 세뇌한 히어로들을 쓴 게 분명하다. 스페이드는 알고 있었지만, 아리아까지 넘어갔다는 점에서는 깜짝 놀랐다. 어쩌다 그 아이한테까지 손이 뻗친 걸까.
그걸 알아봤자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장에게 전하고 싶어도 ‘세뇌’와 관련된 건 어느 것 하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말하려고 하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그 과학자 가시나, 뭔가 한 게 분명하데이~.’
체크는 아지트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돌아간데이.”
“잠깐만. 아직 인질들이 남았어. 히어로가 버리고 갈 건 아니지?”
“인질?”
“여기 이 녀석들, 조직 이름대로 되게 나쁜 놈들이더라고. 여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납치하거나 협박하거나 해서 데려와서는, 이런 동영상도 찍고.”
그렇게 말하며 13호는 휴대폰을 들어 준비해놨던 영상을 재생시켰다. 거리가 멀지만 대강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불법... 거기다 폭력까지 동원해 여자들의 포르노 영상을 찍은 것이다.
쓰레기들.
체크는 빠득 이를 갈았다.
“이건 러비쉬 단원들한테서 뺏은 건데, 그 놈들 전부 꼭대기 층에 묶어놨어. 여성들은 아직 지하에 갇혀있는 상태고. 그 녀석들도 구하러 가야 될 텐데, 히어로?”
“그래, 좋다. 알겠데이, 문디야.”
체크는 손에 든 가방에서 막대를 꺼내어, 네 개를 단숨에 이어붙여 2m 상당의 기다란 봉으로 반들었다.
그리고 틈도 없이 단숨에――13호를 향해 투척했다.
“우오?!”
복부를 그대로 꿰뚫리며, 13호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러고도 봉 끝은 그대로 파고들어, 13호의 내장을 터뜨릴 기세로 꼿꼿이 섰다.
“니도 포함해서, 그 쓰레기 놈들꺼정, 다 쥑이 삘테니 마음 단디 묵으라이?”
“나, 나까지...?”
“거슬리는 빌런은 쥑여야지. 불만 있나?”
땡그랑, 봉이 떨어지는 동시에, 체크는 양 손에 단검을 꼬나쥔 채 13호에게 달려들었다. 서슬퍼런 흉흉한 기세는, 13호의 몸을 꿰뚫고 찢어버릴 생각으로 가득해보였다.
“자, 자, 자, 잠깐만! 우리 지금 휴전 상태라고?!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모른다, 문디야.”
13호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참격을 피했다. 그러나 연이어 이어진 체크의 발차기에, 조금 전 봉에 맞았던 복부를 똑같이 얻어맞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야, 야! 나 죽으면 시궁쥐도 어떻게 할 수 없거든?! 그런 예언이었잖아!”
“머라카노. 그 예언을 한 아리아도 니가 세뇌했담시, 그걸 어케 믿으라는 거가?”
뜨끔, 했다. 정곡이다. 세뇌한 상태에서 한 예언은 아니라지만 아리아가 거짓말을 한 건 맞으니까.
“마, 이래저래 죽이진 않는다. 팔이랑 다리 한짝씩만 가져가자. 내 분풀이로.”
“농담 아니라고 그거! 휴전의 의미가 없잖아! 그보다 히어로면 인질이랑 진짜 악당들을 우선해야지!”
“니도 악당이다. 이 꽉 다물고 눈 꼭 감고 있으면 금방 끝난데이!”
체크는 사납게 웃으며 13호의 몸을 콱, 짓밟더니, 양 손에 든 단검을 13호의 두 팔을 향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리쳤다.
콰직!
마력을 충분히 머금은 단검은 13호의 팔을 깔끔하게 베어버리고, 바닥에 파묻혔다. 무시무시한 예기(銳氣)다.
그러나.
정작 팔이 잘린 13호는,
“진짜 무식한 여자네... 무섭고.”
팔이 잘렸는데도 체크의 밑에 깔린채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피가 사라져간데이...?!’
사람의 그것처럼 피가 줄줄 흘러 웅덩이를 만들었지만, 흘러 떨어진 피는 천천히 먼지처럼 변해 사라져갔다.
“가짜였나...!”
“응. 그래. 그렇지. 재밌는 능력을 수집했거든. ――자, 체크. 게임을 하자. ‘본체’는 꼭대기 층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네가 여러 함정에도 굴하지 않고 찾아온다면 인질은 해방, 잡아 놓은 빌런들도 너한테 넘겨줄게.”
“니가 말 안해도 올라가서 전부 쳐죽일테니 걱정말그래이. 일단 아래의 가시나들부터 구하고 갈텡게 목 씻고 기다리래이.”
“댓츠노노. 그건 반칙이고. 일단 나부터 보러 와라. 그렇지 않으면 지하에 있는 무시무시한 폭탄을 터트릴 거야.”
“폭......?!”
“후하하하하! 듣고 두려워해라! 여자들이면 누구나가 이가 따닥따닥 부딪칠 정도로 공포스런 폭탄을 설치해뒀으니!”
13호(분신)의 몸은 이미 몸의 절반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외쳤다.
“폭탄의 이름은 ‘빈유폭탄’! 한 번 터지면 같은 방 안에 있는 여자들은 가슴이 AA컵으로 작아진다! 그 예전 도로시가 풍만한 가슴을 보고 질투하며 만들어 낸 폭탄이지!”
가하하하 호쾌하게 웃으며 선언하는 13호. 체크는 기고만장한 얼굴을 콱콱 짓밟아주었다.
“또 그런 시시한 짓을... 문디가.”
“헤헤... 무시할 수는 없을걸. 그럼 한번 잘 올라와보라고, 히어로.”
꼴사납게 코피를 흘리면서 마지막 말을 내뱉은 13호(분신)은, 결국 마력이 다해 머리끝까지 새하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체크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려나. 빌런들이 전부 붙잡혔으면 일단 임무의 절반은 마침 셈이다. 하나하나 처형하는 일만 남았다. 어쨌든 처형하기 위해서는 그 놈들이 붙잡힌 꼭대기 층에 올라가야하고,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13호는 제지해야한다.
결론은 13호의 바람대로 올라가주는 수 밖에 없다.
......뭔가 이 놈 뜻대로 하는 게 아니꼽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마음에 안 든단 말여, 문디 자슥... 일단 올라가 봐야 되겟데이.”
그리고 그곳에 ‘본체’가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사지를 찢어주겠데이~.
* * *
“죽일 생각 만만이잖아. 야, 도로시, 저 녀석 세뇌 제대로 된 거 맞지? 진짜 맞지? 아니면 나 죽는다? 죽는다고?”
[호들갑 떨기는. 좀 믿으라고 멍청아. 다시 한번 나를 못 믿는 듯한 그런 말 하면 아가리를 찢어버린다?]
“당사자가 되면 엄청 무섭다고! 네가 여기 와봐야 알지!”
13호는 CCTV 영상화면을 바라보며 투덜대고 있었다. 마력을 이용하면 만들어낸 분신과도 감각을 공유할 수는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 쓸데없는 마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다. 더불어 이 영상은 아지트에서 13호와 통화하고 있는 도로시에게도 실시간으로 송신되고 있다.
[아무튼 걱정말고 계속해. 세뇌 상태 확인 겸 심도 개발을 위해 꼭 필요하니까. 이 정도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야, 걔는.]
“혹시나 그런 여자인 만큼 만에 하나 제대로 세뇌가 안 되었다거나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부정은 못하겠네.]
“부정해줘! 제발 그 대목은 부정해주라! 차라리 날 바보취급 해줘!”
[걱정 마. 난 오래 전부터 넌 바보 그 이하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그런 부정은 필요없는데....”
[혹시나 이번 일로 네가 죽게 된다면... 그래, 명복을 빌어주며 너를 꼭 기억해줄게. 30분 정도는.]
“죽더라도 너는 꼭 저주하며 죽어주겠어.”
도로시와의 통화를 끊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체크를 바라보며 13호는 다시 한번 계획을 확인했다. 후우, 괜찮다. 참모까지 계획을 요약해가면서 도와줬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해봤으니 문제는 없다.
좋아, 이대로 계속하자. 그리고 얼마 전 샌드백 사건의 복수를 해주겠어. 완벽히 능욕해주마, 체크.
옆에서 묵묵히 서있던 아리아가 그런 나를 격려하듯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13호 오빠, 걱정마세요. 죽을 때는 이 아리아도 함께 죽어줄게요.”
“여기서 그런 감동적인 대사 치지 말라고! 아직 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