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18 무술에 능한 히어로 체크는 OO에게 굴복한다(1)
[네가 작성한 거 봤는데, 좀 더 성의 있게 작성할 수 없어? 해석해야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할 거 아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건데. 답변할 항목이 200개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자세하게 적을 의욕이 안 났어.”
[그렇게 대충대충하니까 사단이 나는 거 아냐. 쓰레기가 쓰레기 짓을 하려면 최소한 꼼꼼하기라도 해야지. 언젠가 네가 손 댄 여자들한테 뒤에서 칼 맞을 거야.]
잔소리는.
도로시의 부탁(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는)으로 스페이드의 세뇌 상태에 관한 십수 페이지에 걸친 조사서를 써넣어 보냈더니, 이런 소리만 들었다. 마음을 다루는 거니 섬세한 내용인 건 알겠는데... 쓰다보니 대충대충 하게 된 감이 없잖아 있다.
13호는 투덜대며 자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평범한 보험회사지만, 그 실상은 몰래 암약하는 빌런 조직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무튼 그 여자는 조정이 끝난 거 맞지? 삐끗하면 내가 죽는다고. 그 여자 엄청 무서워.”
[날 누구라고 아는 거야? 너처럼 허술하지 않아, 쓰레기.]
“......그 쓰레기 소리 좀 그만 해주라.”
[닥쳐. 내 맘이야. 그보다 말한 거나 제대로 준비해. 그 여자는 워낙 정신이 강고하니까, 이 이상 깊이 세뇌하려면 그게 꼭 필요해.]
그 말을 끝으로 뚝,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숨과 함께 옆에 선 아리아와 스페이드에게 손짓했다.
아리아는 무표정으로, 스페이드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네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오빠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명암의 차이가 극심하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있으라 하시니.
어쨌든 두 사람 다 단숨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저 두 사람이면 이 정도 빌런 조직이야 한 큐에 제압하겠지.
문제는 그 다음인데.
체크, 그 여자가 잘 걸려줄까...?
13호는 멍투성이인 오른팔을 문지르며 근심에 잠겼다.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
붕- 부-웅!
7번대 기지, 연무실 안, 한 여성이 키보다 큰 봉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다.
컬이 들어간 금발은 뒤로 질끈 묶었고, 연한 갈색의 건강한 피부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드러난 한쪽 귀에는 일곱 개나 되는 피어싱이 반짝이며 빛을 반사한다. 입고 있는 깊은 슬릿이 들어간 붉은 치파오의 천이 움직임에 맞춰 펄럭인다.
7번대의 히어로 체크. 빌런 조직 어비스에 붙잡혀있던 그녀는, 우리 측의 여러 가지 조건을 수락하는 것으로 간신히 해방되어 7번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부웅- 훙- 훙훙훙훙훙훙훙-!
원을 그리며 느릿한 박자로 휘두르던 봉은, 점차적으로 속도를 더해가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발의 움직임과 몸의 유연함이 더해져 이 이상 없을 화려하고 정교한 봉무(棒武)를 펼쳐나간다.
오오, 대단해.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이며, 강약이며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그려지는 선 등은 그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저 기술은, 흔들림 없는 유연하고 강인한 사지는 얼마나 긴 시간의 연습과 단련으로 이루어진 건지 짐작하는 것도 황송하다.
정말 대단하다. 짝짝짝 박수라도 쳤을 거다.
두 팔이, 정확히는 온 몸이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나는 지금 그녀가 봉무를 펼치는 앞에 꽁꽁 묶인 채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지 안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다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니 요 꼴이 되어있었다.
“저기.......”
훙훙훙훙-
“있잖아.......”
훙훙훙훙-
“너무 꽉 묶어서 피가 안 통하는데....”
훙훙훙훙-
“왜 굳이 내 앞에서....”
훙훙훙- 파앙!
내질러진 봉의 끝이, 정확히 내 코 앞에서 멈췄다.
아름다운 봉술의 미녀――체크는 흔들림 없이 봉을 쥔 채 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뭔가 오싹오싹해질 것 같은 눈빛이다.
“일주일만에 몸을 움직이니까, 좋구마.”
“다행이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누구누구씨에게 붙잡혀서 일주일동안 갇혀있었으니께.”
“이야, 푹 쉬다 왔고?”
“잡힐 때도, 잡히고 나서도 음흉하게 온 몸을 주물러지고.”
“그거 아냐? 혈액순환을 돕기 위한 마사지 같은.”
봉 끝이 내 뺨을 꾸욱꾸욱 찔렀다.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요 입이가? 요 입이냐고.”
체크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무섭다, 무서워.
“하모, 분풀이 겸 쪼께 어울려달라, 이 말이다. 괜찮지 않나?”
“일단 그 엉망진창인 사투리부터 그만 둬. 듣는 입장을 생각해달라고. 낯 부끄러워 뒈질 것 같으니까.”
“.......”
퍼억!
복부를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아프다. 존나 아퍼.
“횡포다! 휴전 상대한테 이러는 게 어딨어! 법의 정당한 처벌을 요구한다!”
“아따, 빌런이 법이니 정당이니 말은 잘 씨부리네...... 근데, 내 사투리가 그래 안 좋나...? 남사시런 정도가...?”
“미래의 너를 위해서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후회의 눈물로 이불을 적셔도 난 몰라.”
“.......”
“커헉! 또, 똑같은 데를! 물어봐서 답한 것 뿐인데! 횡포다! 변호사와 판사를 불러!”
“여자의 마음은 섬세하니께, 말은 잘 가려서 해라. ......아무튼, 휴전 상대인 니한테는 손대면 안 되니, 나름 조금 고심했다마는....”
체크가 봉을 붕붕 휘두르자, 봉끝이 내 양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야,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
“혼자 수련하면 심심하니께, 연습상대 겸 샌드백으로 사용 좀 한다카이. 괜찮지?”
“횡포다! 샌드백은 옆에 있는 걸 쓰라고!”
대롱대롱 매달린 내 옆에 이미 무거워 보이는 샌드백이 있다.
그런데 사람을 샌드백 대신으로 쓰겠다니, 정신이 이상한 거 아냐?!
“호이.”
퍼-엉!
체크는 별안간 봉을 휘둘러, 옆에 있는 샌드백을 푹 찔렀다. 그러자 샌드백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 안에서 터져나가며 내용물이 줄줄 흘렀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체크는 봉 끝에 침을 퉤퉤 뱉으며 싱긋 웃었다.
“이제 샌드백이 없어져 뿟다. 이제 너로 대신해도 되겠제?”
“아니, 잠깐, 죽어, 죽는다고. 야, 내가 잘못 했으니까.”
“그럼...... 마음 단디 묵으라카이!”
부-웅 훙훙훙훙훙훙훙!
그 뒤, 나는 체크가 휘두르는 봉에 엉망진창으로 얻어맞았다. 연무장에 내 비명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지만, 당연히 구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중간에 스페이드가 찾아와서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관전했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쁜 년. 나중에 복수해주마.
“으으으으.... 온 몸이 쑤셔....”
결국 약 한 시간 동안 처맞고서야 체크가 “목 마르데이”라면서 훌쩍 나가버린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다.
나가는 김에 내가 도망치는 걸 아쉬운 듯 지켜보던 스페이드에게서 팬티를 벗겨왔다. 아직 부족하다. 나중에 더 복수해줘야지. 일단 뺏은 팬티는 소중하게 간직해주마.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까지 세뇌가 된 거지?’
체크가 복귀한지 이틀째, 나는 도로시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세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도로시가 한 세뇌의 영향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처럼 나를 마구 패는 걸 보면 그다지 입맛대로 세뇌된 건 아닌 것 같다. 시험삼아 명령을 해봤는데도 듣지 않는다. 애초에 세뇌 ‘키워드’도 모르겠다.
도로시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나를 때리는 데엔 제한을 걸어두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혹여나 체크와 마주칠까 싶어 기지를 빙- 돌아서 부리나케 내 방으로 향하는데,
“어머, 강아지 그렇게 쫄랑쫄랑 어디 가니?”
“우오?!”
철푸덕!
갑작스레 짓누르는 압력에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엎어진 나를 향해 3번대의 대장, 메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또각또각 걸어왔다.
“바, 방에... 가는 데. 또 왜 그러시나.”
“그냥, 가는 길에 보여서 신경 쓰인 것 뿐이야.”
제발 좀 무시해줬으면 좋겠다. 관심 따위 뚝 끊어버리고 공기 취급해주라. 부탁이야.
“오늘도 참 멍청해보이는 얼굴이네. 강아지다워서 딱 좋아.”
그렇게 말하며 힐 끝으로 내 머리를 자근자근 밟는다.
이 여자, 처음 휴전을 맺은 날부터 시작해서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혀온다. 빌런이 싫다던가 그런 걸 떠나서 그냥 진성 사디스트가 분명하다.
“저기, 오늘은 무슨 일로 괴롭히는 거야...?”
“응? 무슨 일로?”
메르는 턱에 손을 짚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냥, 보여서!”
그냥 눈에 보여서 괴롭힘을 당하는 구나.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에게도 보이지도 들키지도 않아서 저 여자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마구 만지작거리고 희롱하고 괴롭혀주고 싶네, 임마.
메르는 내 뺨을 세게 꾸~욱 밟고는 “그럼 가볼게~.”라며 산뜻하게 걸어갔다.
“중력 좀 풀어줘......!”
이게 최근의 내 일상이다.
히어로들에게 매일 같이 괴롭힘 당하고, 요리나 청소하라고 혹사 당하고, 온갖 매도를 당하고 부하(도로시)에게선 “잘 좀 해, 쓰레기.”라고 욕을 먹고, 구하러 왔던 상사는 “보물이야, 이건 보물이야!”라면서 새로 발굴한 BL책을 읽느라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쓸쓸하다....
나는 스페이드에게서 뺏어온 팬티의 냄새를 킁킁 맡으며 외롭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랬다.
도로시에게서 새로이 연락이 온 것은 그 날 밤이었다.
[체크를 더 깊이 세뇌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산출해봤어. 이쪽에선 이 이상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머진 네게 맡길게. 만약 실패하면 네 앞으로 반경 1km를 터뜨리는 마력융해폭탄을 보낼테니까.]
그런 무시무시한 내용과 함께 장문의 계획서가 날아왔다. 이걸 다 읽으려면 눈이 빠질 것 같다.
이어서 휴대폰이 울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왔다. 참모다.
[도로시의 계획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다시 보냅니다. 13호님은 언제나 제가 존경하는 최고의 빌런이십니다. 파이팅입니다.]
응원의 말과 함께 도로시의 계획서를 심플하게 다듬은 내용물을 보내왔다.
이 각박한 환경에서 다독여주는 듯한 참모의 메시지는 마치 가뭄에 단비 같았다. 위로가 된다. 참모가 여자였으면 단번에 반할 자신이 있다.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 환경에서 내 마음을 치유해주는 건 남자 한 명 뿐이라니.
깊은 후회와 씁쓸함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