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17 말괄량이 히어로 스페이드는 괴롭힘 당한다(1)
“하아...... 으응...... 흑....”
애플이 사라진 지 꼬박 12시간이 지났다. 아직 애플의 소식은 깜깜무소식이다.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짐작도 안 갈뿐더러, 구속용 디바이스는 전부 무력화되었다. 단서가 될 것은커녕 애플이란 히어로의 대단함만 답습하는 꼴이 되었다.
히어로지부 제일의 서무계. 전자기기와 인터넷만 있으면 하루 안에 도시마저 장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천재 해커, 그게 바로 애플의 아이덴티티다.
뭐냐고, 천재 해커라니.
그런 거 현실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치만 진짜 있으니까 한숨 밖에 안 나온다.
――‘일단 어비스 쪽은 모른다고 하네요. 13호의 반응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구속 겸 추적용 디바이스도 옛적에 침묵했어요. 애플이 스스로 조정한 거겠죠.’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째서 스파이 짓이라는 중죄를 저질렀는데 단순히 근신이라는 선에서 멈췄었는지, 물리적인 구속이 아닌 전자기기로 그녀를 구속하려 했는지... 애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데....’
라헤 대장이 고뇌하며 말했었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최면에 걸린 것 같다고.
애플의 방에서 ‘최면’이니 ‘세뇌’에 관련된 책들이 잔뜩 있었고, 어쩐지 영 이해할 수 없는 그녀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치만 도구도 없이 가능한가...?’
13호랑 그 녀석들은 뭔가 필요한 거 같던데... 잘 모르겠네.
‘아니, 지금 생각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어....’
워낙 당황스런 일들이 많아서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밤이 되어 홀로 있게 되었더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자위를 금지 당한 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이 괴롭다. 하지만, 안 돼... 참아야 해.......
‘13호랑... 얘기도 못했어....’
그 녀석, 너무 늦게 돌아와 버린데다, 애플이 사라져서 워낙 정신이 없었어서....
스페이드는 이불을 꼭 끌어안고,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간신히 잠에 들었다.
* * *
하아... 후...... 하아아.......
이틀째. 여전히 13호에게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분명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을 텐데도, 그 자식, 아무런 말도 안 하고 휙 가버렸다. 가끔 내 모습을 보고 빙글빙글 웃을 때면 당장에라도 면상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오늘도 달아오른 몸을 필사적으로 가누며 잠에 들었다.
꿈을 꿨다.
야한 자세로 묶인 채 몸의 이곳저곳을 살살 간지럽혀졌다. 따뜻한 숨이 꽃잎의 민감한 부분에 닿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혀 갈 수 없고, 몸은 점차 달아오르기만 했다.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데, 이 역시 온 몸이 구속되어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13호의 암시가 꿈에까지 영향을 미친 거냐고, 그렇게 생각했을 땐 그냥 목 놓아 왕왕 울고 싶었다.
* * *
“안 돼... 제발.......”
사흘째. 애플의 건과 최근 출몰하는 빌런에 대해 라헤 대장이 뭔가 말했던 것 같은데, 보지가 욱신거려서 그만 멍하니 있고 말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라헤 대장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문제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실수 한 걸까.... 차라리 대장이 지금 내 상태를 알아차린다면.... 해방될까...?
그런데 최근 13호, 아리아랑 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늘도 어비스의 아지트에 다녀온다고 들었다. 참모의 능력을 이용하면 위치를 들킬 일은 없다면서 감시역으로 아리아를 데려갔는데... 어제도 같이 모여서 뭔가 속닥속닥 얘기했고....
‘왤까...?’
어째선지 상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다.
어째선지 13호가 원망스러웠다. 왜 아리아의 옆에 있는 걸까. 아리아만 신경 쓰는 거야? 나는......?
아마 이 꼴로 만든 주제에 방치해버린 그 녀석이 미운 거겠지.
* * *
나흘째. 온 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민감하다. 옷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가버릴 것 같았다.
왜지. 왤까. 그 사이에 뭔가 자극을 받은 것도 아니고, 13호가 나를 범하려고 몸을 주무른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계속해서 13호가 생각나고, 눈 앞에 어른거리고... 그 품에, 안기고 싶고....
‘아... 안 돼! 안 된다고! 정신 차려, 천유진!’
머리를 홰홰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이럴 수 없다. 이런 거 내가 아냐.
기지 안을 돌아다니다가, 벽에 걸린 대걸레라던가 계단 손잡이 같은 걸 볼 때면, 저것으로 음부를 비비고 잔뜩 쑤시고 자극해서 가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진짜 그대로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 *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하아... 후...... 하아....
‘꽤나 애가 타는 모양이네.’
아침 식사 자리, 스페이드는 아침부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로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는데, 본인은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거겠지.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스페이드? 괜찮아요?”
“......아, 예....”
“오늘 정도는 쉬는 게 어떨까~? 요 며칠 계속 안 좋아 보이던데.”
“그러니까. 여자애는 몸을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법이고?”
라헤를 비롯한 다른 두 대장들도 걱정하며 권유했지만, 스페이드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 반응하도록 암시를 걸어뒀으니까.
“그보다 두 사람은 대장씩이나 돼서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건가요?”
“그치만 여기 밥이 맛있는 걸~. 우리 일은 착실하게 메일로 날아오니까 충분하고, 유능한 애들이니까 뭔가 상황이 터져도 착실하게 잘 대응할 테고.”
“그리고 지금 이 근처에 위험한 빌런이 나타난다면서. 일손 부족하지 않아?”
“그거야말로 괜찮습니다. 여기 스페이드와 아리아 두 사람도 있고, 오늘이면 체크가 돌아올테니까요. 그렇죠, 13호?”
“어? 아, 응.”
휴전 협정을 맺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야, 우리들은 대강의 협상을 이뤄낼 수 있었다. 체크를 돌려주는 대신, 7번대에서도 우리측의 요구를 몇 가지 수용하게 되었다.
‘도로시가 직접 세뇌했다는 것 같은데.’
체크가 어느 정도로 세뇌됐는지는 전해들은 게 없어서 모르겠다. 일단 직접 보면 알려나. 세뇌당한 티가 팍팍 나서 오자마자 들킨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그보다 나, 그럼 오늘밤에 아지트로 돌아가도 되는 거겠지?”
“당신이 요구했으니까요. 이편이 밸런스가 맞아요.”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만큼 라헤는 ‘밸런스’와 ‘룰’을 중시하는 모양이다. 이 쪽은 이쪽대로 요구를 들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만.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수업이 있어서... 준비하러 가볼 게요.”
스페이드는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아무리 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모습에, 대장들이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성인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다 큰 우리 보스는, 왜 아직까지 안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부지런하게 삽시다 좀.
‘뜨거워......’
스페이드는 비척비척 캠퍼스 내를 걷고 있었다.
지금의 스페이드는 평소의 다홍색 눈과 단발이 아닌, 일반적인 한국인과 같은 검은 눈에 흑발이었다. 거기에 늘 그려져 있던 스페이드 문양도 없었다. 마력을 이용하면 마력으로 인해 두드러진 특징은 숨길 수 있다. 학교만큼은 평범하게 다니고 싶었고, 혹시나 빌런들이 얽히기라도 할까봐 평범하게 위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빌런들에 대한 억지력으로 평범하게 쇼핑을 다닐 때도 그런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케바케인 것이다.
멍하니 캠퍼스를 걷는 그녀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요염하게 숨을 내쉬는 것도 이따금 허벅지를 비비는 것도 보이기 민망한 모습이지만, 그나마 그녀가 다니는 곳이 여대인 것이 다행이었다. ......남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자....
“호오, 이렇게 생겼구나, 너네 학교. 그리고 흑발도 잘 어울리네.”
“응... 이렇게――뭐얏?!”
깜짝 놀라 돌아보았더니, 낯익은 13호의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따라왔는데? 몸이 안 좋아보여서. 쓰러졌을 때 부축해주면 점수 좀 따나?”
“빌런 따위 한테 줄 점수 없거든?!”
“슬픈 일이네. 슬픈 일이야. 요즘 보스가 푹 빠진 소설이 적과 사랑에 빠지는 히어로 얘기거든. 꿈과 로망이 있고 좋잖아. BL이지만.”
아아, 머리가 어지럽다. 안 그래도 한계에 몰려있는 정신이, 이딴 녀석이 나타나니까 더욱 더....
“근데 스페이드, 최근 몸 상태가 안 좋지 않아?”
“......! 다 네가 ‘자위금지’ 같은 걸 시켜서 그런 거잖아!”
“어~라? 고작해야 그 정도로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아진다고? 뭐야, 평소에 얼마나 자위를 했던 거야? 매일? 하루에 두 번?”
“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 내가 모를 줄 알아?!”
스페이드는 척, 하고 손가락으로 13호의 코 끝을 가리켰다.
“너, 매일 밤 내 방에 숨어들었지?! 그리고 이상한 암시를 걸었잖아!”
13호는 그 반응에 눈을 꿈벅꿈벅 감았다 뜨더니,
“에, 들켰어?”
순순히 인정했다.
스페이드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요 며칠 네가 찾아온 것 다 알고 있거든?! 흐릿하게 뭔가 암시를 들은 것도 기억하고!”
어라, 그런 것 까지.
실제로 13호는 매일 밤 스페이드의 방에 찾아갔고, 매일 밤 그녀에게 암시를 추가했다.
더욱 더 몸이 달아오르도록, 더욱 더 음란한 것을 바라도록, 꿈은 꾸되 절정에는 이르지 못할 답답한 꿈을 꾸도록, 혹여나 흥이 깨지지 않게 ‘절정금지’의 암시까지 걸어두었다.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효과가 더해져, 점점 민감해져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보다 어떻게 내 방에 들어온 거야?!”
“네가 나 간호하러 와줬던 때 있잖아, 그때 암시를 걸어뒀지. 「언제가 되었든 내가 찾아오면 맞아달라」고.”
스페이드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을 뒤져보니 확실히 어렴풋이, 흐릿하게 그런 것도 같다. 꿈인 줄 알았건만....
“그나저나 세뇌암시를 주입할 때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라. 도로시 말대로네.”
13호는 주머니에서 꺼낸 손바닥 만한 수첩에 뭔가를 휘릭휘릭 적었다. 도로시가 못 봐주겠다며 몇 가지 세뇌에 대한 팁을 주었고, 가르침 받은 대로 스페이드의 세뇌 상태를 확인하고 더 깊이 세뇌하기 위해 곧 바로 응용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세뇌 당할 때의 기억이 없어지는 게 1단계라는데... 아직 1단계도 제대로 클리어되지 않은 상황이란 거네.’
제대로 된 절차와 수순을 거치지 않으면, 어느 계기로 세뇌가 풀려버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순간 내 머리는 스페이드의 주먹에 으깨지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살아남기 위해 스페이드를 철저히 세뇌해야한다.
“......그래서, 진짜로 왜 온 거야? 심심해서? 놀러 온 거야? 아니면 빌런 짓하러?”
“휴전 협정 중이고 그동안엔 빌런 짓은 쉬어야지.”
“아니, 해. 당장 해. 그냥 해. 해준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히어로로서 세상에 해악밖에 안 되는 네 녀석을 죽여버릴 수 있게 되니까.”
“말도 안 되게 위험한 여자네. 그보다 너 「나한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암시 때문에 나 못 건드린다니까?”
“근성과 기합으로, 어떻게든.”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라면 진짜로 가능할 것 같아서 무섭다. 근성으로 세뇌를 푼다라....
어쨌든, 여기에 온 이유라... 잠시 고민하다, 나는 순순히 답해주기로 했다.
“아리아가 오늘 여기에 빌런이 출몰할 거라고 했거든.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와 봤지.”
스페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