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16 히어로 애플은 어떠한가(1)
‘......그 인간, 왜 아직도 안 와!’
스페이드는 복도의 벽에 이마를 비비며 이를 갈았다.
13호 그 자식, 남의 몸을 멋대로 희롱하고, ‘자위 금지’ 따위 말 같지도 않은 암시를 걸은 데다, 끝도 보지 않고 방치해버렸다!
정말 사람도 아냐! 인간말종이다! 돌아오는 대로 믹서기에 넣어서 갈아버리겠어!
“크윽...... 흐윽...!”
스페이드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13호에게 희롱당했던 보지가 욱신거린다. 당장에라도 가고 싶어서 몸이 열기를 띠고, 머릿속에는 13호가 떠오른다. 그의 물건, 그에게 안길 때의 감촉... 끝까지 닿지 못했던 열락이, 절정을 바라며 13호를 미친 듯이 갈망하고 있었다. 이미 유두도 잔뜩 발기해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이렇게나 머릿속에 아른거리다니.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한 시간... 아니, 최초로 세뇌된 것으로 치면 아마 2주, 13호와의 농밀한 접촉이 이렇게 만든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세뇌된 영향일까. ......아마 둘 다려나.
고작해야 몇 시간, 달아오른 채 방치된 것만으로 이렇게나 초조해지다니... 말도 안 돼.
“하아... 후.......”
쿵쿵 이마를 벽에 박으며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이런 모습 대장들에게 보일 수는 없다.
그보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참자, 참아. 모든 울분은 13호가 돌아오면 잔뜩 풀어주자. 그래, 참을 수 있다.
스페이드는 목적한 방문 앞에서, 똑똑 노크했다.
“애플, 스페이드야. 들어가도 될까?”
안에서 “네~.”하는 천진한 목소리와 함께 금방 문이 열렸다.
편한 복장의 애플이 열린 문 틈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점심이야. ...괜찮아? 혼자 있는거.”
“오늘도 감사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후후, 그리고 괜찮답니다. 이 참에 묵혀놨던 책을 읽고 있어요.”
혼자 있으면서도 최소한의 몸치장은 잊지 않고, 간단한 대화에서도 차분함이 느껴지는데다,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 거기다 요리도 잘하고, 가슴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잠깐 들어오실래요? 말동무 좀 해주세요.”라는 애플의 권유에,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잃을 것 같던 스페이드는 순순히 따라서 안에 들어갔다.
“그, 애플. 징계 건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어비스랑은 휴전한 상태고, 13호가 이것저것 말해줬거든. 애플은 협박당한 것 뿐이라느니, 전~부 그 멍청한 놈 잘못이니까 애플은 괜찮다거나. 라헤 대장도 분명 고려해 줄 거라고 생각해.”
스페이드는 위로하고자 필사적으로 말을 짜냈다.
애플은 현재 스파이 혐의로 근신 상태이며, 중징계가 예정되어있다. 그도 그럴게 단순히 정보를 빼돌린 것만이 아니라 대장에게도 뭔가 하려고 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클럽이 납치된 일도 애플의 손이 닿은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플은 라헤의 추궁에도 별다른 증언은 하지 않았지만....
스페이드는 애플의 다리를 흘끗 살폈다. 애플의 발목에는 무거워보이는 발찌가 채워져있다. 족쇄 같은 발찌에는 GPS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전자처리가 되어 있어, 애플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다.
“후후, 고마워요, 스페이드 씨. 하지만 괜찮아요. 이후의 일은 어떻게든 되겠죠.”
애플은 근심 없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으음, 이렇게나 태평하면 할 말이 없네.
그리고 애플은 가능하면 그대로 있어줬으면 좋겠다... 애플의 서무 작업 능력은 7번대만이 아니라 히어로협회를 통틀어서도 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 그녀가 없으면 일하기 힘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니까....
“하아....”
“스페이드 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조금 좋지 못한데요.”
“응? 아냐아냐. 괜찮아.”
스페이드는 손사레를 쳤지만, 애플은 그런 스페이드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바싹 가져왔다.
으와, 이거,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모공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별빛을 담은 듯한 애플의 맑은 두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였다.
무엇보다 요염한 색기가 느껴져서... 뭐지... 거기가 조금씩... 욱신거리기도....
“그, 그보다 애플은 책이 진짜 많네! 나는 전공서적 읽는 것도 지루해서 싫은데!”
스페이드는 다급하게 뒤로 몸을 빼며 화제를 전환했다.
애플의 방은 방 한면이 책장과 책으로 빼곡하게 차있어서, 솔직히 방에 들어오면서도 크게 감탄하기도 했다.
“후후, 전 호기심이 많거든요. 관심을 가지게 되면 철저히 알고 싶어지는 타입이라... 성지식이나 섹스에 대해 궁금해졌을 때는 참 큰일이었죠~. 지금은 새로운 세계, 생각도 못했던 쾌락이라던가 알게 되어서 기쁠 따름이지만요.”
어, 뭐야. 뭔가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운데.
스페이드는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걸 느끼며 딴청을 피우듯 애플의 책장을 기웃거렸다.
“헤에, 정치학, 경제학, 별자리와 각성에 대한 논문도 있네... 음? 오? 심리학? 이것도 엄청 많네.”
“네.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최근 푹 빠져서 읽고 있어요.”
“으와...... 엄청 어려워보이는데. 이렇게 책이 많은데 다 읽으려면 1년은 걸리겠다.”
“어제 하루 동안에 17권을 읽었는걸요.”
“미친?!”
도저히 그 외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심리학 관련의 서적들은 이것도 저것도 사전처럼 굵어 보이는 것들뿐인데, 설마하니 그걸 17권이나?! 하루에?!
......여, 역시 히어로협회 제일의 서무계 히어로.
여자로서만이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흐응. 그래서 뭐가 그렇게 흥미로웠어?”
“많은데요, 굳이 꼽자면――‘최면’이랑 ‘세뇌’일까요.”
“......................응?”
스페이드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바로 뒤에는, 어느샌가 다가온 애플이 생긋 웃으며,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된 거 같네요. 「스페이드, 사랑하는 나의 스페이드」, 잠시 잠들어주시겠어요?”
순간 애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암시 때문에 ‘키워드’가 필터링에 걸린 것처럼 전혀 들리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갑작스런 애플의 변화에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따라갈 일도 없이.
애플이 입에 담은 ‘키워드’에 의해――스페이드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정신이 어둠 속에 떨어졌다.
애플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스페이드를 지긋이 바라본다....
* * *
“으...... 다, 다 했습니다, 도로시 양....”
어비스의 지하실.
참모는 비척비척 문을 열고, 도로시가 있는 ‘조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끝났어? 느려터졌잖아, 굼벵아!”
“이 정도면 빨리한 겁니다, 이래봬도! 몇 십 장이나 되는 거라고요...?!”
“흥.”
도로시는 콧방귀를 뀌며 턱 끝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참모는 순순히 테이블 위에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도로시는 지금 어떤 약품을 조합해 주사기에 주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체크 양은 어떤가요?”
“대충 보면 몰라?”
보면 아는 건가요?
참모는 의뭉스런 눈으로 천장에서 늘어진 사슬에 걸린 체크를 바라보았다.
체크는 손을 위로 한 채 알몸으로 묶여있다. 발은 땅에 닿지만, 발목에도 무거워보이는 족쇄가 걸려있어 옴짝달싹 못한다. 눈은 새카만 천을 둘러 가려놨고, 입에는 볼개그를 물려놨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씌워진 커다란 헤드폰. 일전 스페이드에게 썼던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재생되는 내용물은 도로시가 이래저래 어레인지한 음원이다.
잘은 모르지만, 뇌를 직접 자극하는 음파와 함께 도로시가 직접 녹음한 암시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겠지.
우...... 후...... 후우.......
눈에 확 띄는 굴곡진 육체가 파들파들 떨리고, 입에서는 물고 있는 볼개그의 틈새로 침이 흘러나오고 있다. 얼굴은 흥분한 듯 상기되어 있고, 연신 격한 숨을 들이내쉰다.
진한 암컷의 향기가 풍긴다.... 참모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호... 이것 참. 저도 이렇게 당하고 싶어질 정도로 부러운 광경이네요.”
“그러고 보면 너 그런 취향이었지. ...역겹지만 굳히 말로 할 것도 아니지.”
도로시는 주사기의 피스톤을 살짝 밀어, 내용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체크에게 척척 걸어가, 그녀의 작은 손으로는 다 잡히지 않는 커다란 유방을 들어올리고, 유방의 정점에 선 돌기에 주사기를 찔러넣었다.
피스톤을 밀자, 쭈우욱- 내용물이 흘러 들어간다. 충혈된 유방이 푸들, 떨린다. 다른 한쪽의 유두에도 똑같은 내용물을 주사했다.
체크는 절정에 이른 듯 몸을 꼿꼿이 세웠다. 뻐끔거리는 꽃잎에서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줄 흘러내렸다.
“그건...?”
“실험 겸 세뇌개발을 위한 약. 이 여자, 안쪽이 견고해서 완전히 떨어뜨리기가 어렵거든.”
“그런가요?”
“그런 거야. 애초에 세뇌라고 하는 건 엄청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거라고. 내가 준 세뇌도구들은 단순한 열쇠. 제대로 세뇌하려면 테크닉이 필요해. 애초에 그 클럽이란 계집도 세뇌 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손 볼 필요가 있어.”
“그래서 이런 복잡한 설문을 시킨 겁니까....”
도로시가 숙제로 내준 것은 몇백개나 되는 문항의 ‘평가지’였다. 지금까지 세뇌했던 스페이드, 클럽, 애플에 대해 같은 평가지를 제각각 작성했다.
세뇌심도를 알아보기 위한 평가지라나.
“그런 거야. 잘 좀 하라고, 멍청이들.”
“최선을 다한 건데요.”
참모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도로시는 그런 참모를 찌릿 노려봐주고는, 사용한 주사기를 대충 던져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뭉치를 들어, 팔락팔락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천재인 그녀에게 내용을 파악하는덴 한 장에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조금 쉬게 해주고는 있는 거죠? 저 자세 아플 거 같은데.”
“그래서 무르다는 거야, 멍청이. 세뇌를 하려면 기초는 극한 상황에 떨어뜨리는 거야. 안 그래도 네가 우기는 바람에 식사시간에는 풀어주고 있다고?”
“......좀 더 인도적인 대우를 해주시죠.”
“여자를 우습게 보지 마. 거기다 이 녀석은 전사야. 이 정도로 망가지지 않고,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독하게 하라고, 멍청아.”
참모는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여자란 무섭다고 새삼 느꼈다.
“그, 그래도 착실하게 시간을 들인다면... 일단 저랑 13호님의 방식으로도 나름 세뇌가 잘 되는 것도 확인했고요... 괜찮지 않나요?”
스스로도 지리멸렬한 변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사흘, 도로시가 체크에게 행한 고문 수준의 행위를 보면... 어우, 도저히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제가 당하는 거라면 또 다르겠지만요.’
그러면서 스스로 당하는 상상을 하자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떨어졌다. 도로시에게 부탁해볼까. 아아, 상상만으로도 짜릿짜릿.......
“도로시?”
망상에 젖어 부들부들 떨던 참모는, 어쩐지 도로시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역겨워하며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도로시는 어느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다급하게 앞 뒤의 종이를 자세하게 다시 훑었다.
“야, 참모... 기억대로 제대로 서술한 거 맞지?”
“예... 일단 기억한 그대로인데요. ...뭔가 문제가 있나요?”
“있어.”
도로시는 종이뭉치를 내려놓고, 참모를 진지하게 올려다봤다,
“여기 이 애플이라는 히어로...... 이 계집, 이상해. 절대로 제대로 세뇌된 상태가 아니야....”
* * *
‘흐음, 어떤 암시를 하면 좋을까요. 이래저래 고민은 많이 해봤는데요.’
‘후, 후후... 그래요. 이렇게하면 좀 더 재밌어질 것 같네요.’
‘스페이드 씨를 포함해서, 7번대 여러분들도, 히어로 분들도 전 너무 좋아한답니다.’
‘그러니까, 다 같이 좀 더 즐거워져봐요.’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몽롱한 머리로 생각하던 스페이드는, 어느 순간 수면 위로 건져오르듯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익숙하지 않은 방에 있었다. 아니, 아는 방이다. 한쪽 면을 책이 빼곡 메운 방. 여긴 애플의 방이다. 다만 방 주인인 애플은 방에 없다.
‘아아, 맞아, 그렇지.’
――애플은 도망갔다.
자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이미 애플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째선지 잠깐 정신을 잃었지만, 자신은 사라진 애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개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스페이드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