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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화 〉#15 히어로 아리아는 누구인가(2) (66/271)



〈 66화 〉#15 히어로 아리아는 누구인가(2)

“옷을 사러 나간다고요?”

“응. 그리고 이것저것.”


“이것저것이라면?”

“......생리대?”

“.......”

“......부탁 받아서 사는 거야.”

7번대의 사무실, 나는 라헤에게 외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와 있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는 보스를 위해 옷과 이런저런 물품을 사와야 한다.

포로 취급받는 건 보스 뿐이므로, 지금의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어차피 보스가 붙잡혀 있다면 나도 큰일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겠지만, 굉장히 느슨하다고 아니 말할  없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보다 포로 건입니다만, 슬슬 저희 애들을 풀어줬으면 하는데요.”


“그러면 우리 쪽은 포로가 없어지잖아. 너무 뻔뻔한 요구 아니야? 우리 보스부터 풀어주고 그런 말을 하든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좋아요. 포로는  명만 있어도 되잖아요.”

“조직의 보스와 히어로 지부의 대원 한두 명이 가치가 같을 리 없잖아. 무엇보다 휴전이 끝나면 다시 전쟁이라고? 굳이 지금 패를 버려둘 이유가 없는데.”

휴전 협정이라곤 하지만 담보가 없으면 협정이 제대로 유지되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7번대는 보스를 포로로 잡았다. 혹여나 우리가 협정을 깨고 멋대로 사고를 친다면, 그대로 우리 보스를 고문하거나 처형하겠다며 압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붙잡은 7번대의 체크, 클럽, 코코를 협정의 담보로 삼았다. 혹여 7번대가 약속을 어기고 보스에게 손을 댄다면 붙잡아둔 히어로들을 죽이겠다고 선언해두었다.

이렇게 서로 약점을 쥐고 팽팽한 교섭 관계에 있는 상황이다. 나름대로는.


“그렇다면 적어도 체크나 클럽, 둘  한 사람이라도 돌려주세요. 전투원이 없어서 곤란해요. 일이 터지면 보낼 인력이 없어요.”


라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쩌지...  사람 정도는 풀어주는 게 좋을까. 클럽이라면 이미 세뇌가 되어 있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협상이라고 하니 우쭐해있긴 한데, 저쪽이 보스를 붙잡고 협박하기 시작하면 나는 피눈물 흘리고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살 라헤의 눈치를 보자니,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무슨 치사한 짓을 하려고! 이 사람의 마음을 잊은 여자! 얼음 마녀!”

“......뭐라는 건가요. 협상을 하자고 하려던 것 뿐입니다. 저희 대원을 한  풀어주는 대신, 그 쪽에서 제시하는 조건도 몇 가지 수용하겠습니다. 어떤가요?”

어......?

“뭔가요, 그 표정은.”

“아니... 뭐랄까, 너라면 보스를 붙잡고 협박하거나 할 줄 알았거든. 얼음마녀라는 이미지대로, 냉혹하고 무자비한 느낌으로.”


라헤는 이마를 짚고 “정말이지, 누가 얼음마녀라는 겁니까. 누가 마음이 메마른 마녀라는 거냐고요. 저도 냉혹하다는 말을 입으면 상처 입는다고요... 남자친구도 안 생기고....”라느니 홀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 여자, 이미지와 다르게 귀여운 아가씨가 내면에 사는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헤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미지인가요 그건! 하여간. 일단 제 부하들이 잡혀있잖아요. 아무리 저라도 부하들은 소중하거든요?”


“아, 뭐, 그렇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신네들을 힘으로 전부 때려눕히고 제 부하들을 데려오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제약이 있어서요.”


“제약이라면, 별자리의?”

라헤는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듯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 별자리인 천칭자리로 부터 강한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그만큼 제약도 많습니다. 스페이드나 체크 정도로 가벼이 쓸 수 없는 능력이에요. 간단한 행동 하나하나에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공평하고 합리적이고 룰에 맞게 행동해야하죠. 지금과 같은 협상에서도 제가 바라는 걸 얻으려면 상대방의 바람을 들어줘야 하고, 위에서의 명령이라면 설령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천칭을 수평으로 유지하는 겁니다.


라헤는 담담하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설명했다.

“어... 그런 걸 적인 나에게 알려줘도 되겠어?”

“알면 어쩔 건데요?”

라헤는 훗, 하고 오만하게 웃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이 밖에 나간다고 하니까요. 교섭 전에 제 패를 먼저 보여드린 것 뿐입니다.”

“응? 교섭?”

“당신 같은 빌런을 그냥  수도 없잖아요. 무슨 꿍꿍이를 부릴지 모르니. 그러니 외출 할 때는 히어로  명을 대동할 것. 히어로 없이 홀로 돌아다니면 협정 위반으로 간주, 사살한다는 내용을 제안할 생각인데요.”

“뭐야! 횡포야! 그런 거 들어줄 리가 없잖아!”


히어로랑 빌런 단 둘이 쇼핑이라니, 뭐야 그거. 엄청 어색할 거 같아! 절대로 싫다!

콱!

눈앞의 테이블에, 어느샌가 칼집에서 뽑힌 칼이 수직으로 꽂혔다.

“공평하죠? 전  비밀에 대해 말해줬고, 그에 따라 당신은  제안을 들어준다...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드,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는 마음 편하게 당신을 두동강 낼 수 있겠네요. 왜냐면 당신이 잘못했잖아요? 자기 이익만 쏙하니 챙겨가고 상대방의 제안은 거절하다니, 그걸 허락하면  천칭이 기울어버린다고요? ――자, 그래서 대답은?”


생글생글 웃으며 테이블에서 칼을 뽑는 라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누가  여자보고 ‘얼음마녀’라고 한 거냐.


존나 잘 어울리네.

* *


그렇게 해서 히어로와 함께 쇼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7번대에 남는 인력도 얼마 없겠다, 그렇다고 나 같은 떨거지 빌런을 감시한다고 대장급이 움직일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감시한다고 해도 스페이드가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스페이드라면 세뇌도 어느 정도 되어있고, 이미 같이 쇼핑 나와본 경험도 있고, 놀리는 재미도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근처의 백화점 같은 건 모르는데요.”


“......그러냐. 그런데 눈에 띄는 데 옷이라도  갈아입지 않을래?”


“싫어요.”

“......그래.”

왠일인지.

스페이드가 아닌 히어로 아리아가, 지금 내 옆에 있다.


“.......”


“.......”


“......그럼, 갈까?”

“그래요.”

꽃갓에 화려한 붉은 색과 남색의 한복을 입은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말수도 적고 속도 알  없어서, 솔직히 불편하다.

일단 지도 어플을 이용해 적당한 백화점을 찾아서 들어갔다. 시선을 느껴 돌아봤더니,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아리아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등에  묻었어?”


“아뇨.”

“...그럼  봐?”

“.......”


무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아니 그러니까, 뭐라도 말 좀 제대로 해줄래? 진짜 거북하거든?

일단 4, 5층이 여성  매장인  같아서 4층부터 돌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내내 이 아리아라는 히어로는 줄곧 나만 노려보고 있다.

내가  잘못했나?


 등에 뭔가 붙어있나?


아니면 이 여자는 사실 히어로협회 비장의 안드로이드고, 기계니까 명령을 수행하는  밖에 할 수 없고, 지금은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이러고 있는 걸까?

“저기, 아리아...라고 했지?”


“네.”

이런저런 매장을 둘러보며 옷을 둘러보던 나는,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라도 좀 대화를 하지 않을래?  분위기를 도저히 못 견디겠는데.”

“대화인가요.”


“응. 뭐든 좋아. 이 옷이 좋네, 저 옷이 좋네, 그런 것도 좋고. 아니면 빌런인 나를 엄청 싫어한다던가, 이래서 싫다던가 저래서 싫다던가. 그런 것도 좋아. 뭐든 좋아!”

“욕 먹는 걸 좋아하는 건가요.”

“.......”


적어도 딱딱한 침묵보다야 그 편이 훨씬 낫다. 말로 하긴  그렇지만.

아리아는 말을 찾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13호 오빠는――”

“잠깐.”


“뭐죠.”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


“13호 오빠는.”

“......이상하지 않아?”

아리아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싫으신가요.”

“.......”


아니, 싫은지 좋은지를 따지자면.


당근 좋은데.

오빠라는 울림을 싫어하는 남자 따위 세상에 없고.


문제는 히어로한테서 듣는다는  참 묘하다는 점일까.


“일단 그대로 불러줘.”

“예.”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하던 질문을 이어 했다.

“13호 오빠는 변태죠?”

“.......”

나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뭐지. 뭘까. 뭐냐.

고민과 시름에 빠진 나를, 아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빠~안히 바라보고 있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13호 오빠는 변태가 맞죠?”

자, 그럼.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혹시나 지금 내 상황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신이시여, 제게 올바른 대답을 알려주소서.


“아니, 내가 왜 변태라는....”

“아까 속옷 매장 지나갈 때, 시선이 3.7초 동안 간판에 있던 속옷 모델을 빤히 바라보던데요.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시선만 살짝. ...그런 13호 오빠는 변태가 아닌가요?”

......신이시여!


아리아는 내게 한 걸음 다가오더니, 얼굴을 바짝 가까이 가져왔다.

“13호 오빠는, 변태가, 아닌가요?”

변명을 허용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결국,

“......아아! 변태 맞아! 변태 맞다고! 변태가 맞지만 세상의 남자 98%는 변태거든?! 변태가 아닌 남자 따위 없거든?! 그러니까 남자의 그런 부분은 그냥 넘어가주라고! 잔인하잖아!”

아리아의 귓가에 대고 자포자기하듯 속닥였다. 그제서야 아리아는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13호 오빠는 변태가 맞군요. 변태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러지 말아줘....”

“그럼 저도 부탁이 있는데, 잠깐 따라와주실 수 있을까요.”


아리아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멍하니  뒤를 따라가자니, 어느샌가 탈의실에 들어와 있었다.


......탈의실?

옷도  들고?


“13호 오빠. 지금  탈의실에는 제 능력으로 주술을 걸어뒀어요. 여기서 들리는 소리는 바깥에 들리지 않고, 바깥에서는 이 탈의실을 인식할 수 없죠.”


아리아는 붙잡은  손을, 여성스럽게 부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럼 변태인 오빠는, 차려진 밥상이라는 지금 상황에 저를 범할 건가요? 어떤가요?”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여자가 맹렬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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