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14 패배한 빌런이지만 오늘도 역시 포기란 없다(5)
‘일단 참모와 도로시에게 지시는 해뒀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도 전했으니 둘 다 안심할 수 있겠지. ......도로시는 애초에 걱정조차 안했을지도 모르지만. 맨날 나보고 ‘언제 죽을 거냐, 쓰레기’ 같은 말을 했으니까.
자, 일단 우리 어비스의 건은 됐다. 휴전 협정을 통해 보스도 무사하고, 나머지는 【시궁쥐】와의 싸움까지 이 히어로들을 함락할 계략을 짜내야만 할 텐데――
슉- 팍!
“어머나, 손이 미끄러질 뻔했네.”
“......야, 지금 건 안 피했으면 죽었거든?”
목 옆에 박힌 나이프를, 나는 떨리는 심장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단발머리에 흔들리는 큰 귀걸이가 인상적인 3번대의 대장, 메르가 즐겁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벽에 박혔던 나이프는, 누가 손댄 것도 아닌데 스스로 스르륵- 빠졌다.
7번대의 단련용 연무장에서, 나는 한쪽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잠깐 시간 좀 내주겠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고 와서는, 중력조작 능력을 이용해 내 사지를 벽에 붙였다. 그리고는 내게 나이프를 던지며 놀고 있는 것이다.
“중력조작은 강한 능력인 만큼 세밀한 작업을 하려면 연습이 필요하거든. 그냥 연습하는 것보다 돌이킬 수 없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훨씬 즐거우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발상인데.”
“어머나, 표적이 말을 하네?”
휙, 하고 다시 한 번 나이프가 날아왔다. 단순한 손목의 스냅으로 날린 나이프지만, 이상하게도 굉장한 속도로, 일직선으로 공중을 날았다.
“아~차, 죽겠네.”
정확히 내 이마를 노리고 날아오던 나이프를, 내 몸 전체가 벽 위에서 빙글 돌며 피했다.
퍼억-! 파르르르르.......
날의 반쯤 벽에 박힌 나이프의 손잡이가 전율하듯 떨렸다.
내가 피한 게 아니다. 메르가 능력을 조작해 멋대로 내 몸을 움직인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조금이라도 내 몸을 늦게 움직였다면 지금쯤 저 나이프는 내 이마를 꿰뚫고 있었겠지.
완전히 생사여탈권이 저 여자한테 쥐어져 있다.
벽에 박힌 나이프가 다시 멋대로 움직여, 메르의 손에 빨려나가듯 되돌아갔다.
“......우리, 휴전 상태이지 않아?”
“응~? 딱히, 적한테 이런 걸 시키진 않는데? 단순한 친목 다지기야. 남자들은 군대에서 다들 이 정돈 한다던데?”
“군대에서도 이런 부조리는 당한 적이 없어!”
“이상하네. 히어로 훈련소에선 이 정돈 약한 축에 드는데.”
뭔데 그거. 이상해. 이상하잖아. 무섭다고, 히어로들.
히어로 훈련소라면 그거지? 히어로들은 여자들 밖에 없잖아. 여자들만 모이면 저런 걸 하는 건가~ 하~ 무섭구나~.
“아니, 적어도 그건 선임들이 후임들한테 하는 거고, 휴전 관계인 우리는 적어도 대등한 입장일텐데?”
“하~아? 무슨 개소릴 하는 거니, 이 강아지는. 아, 강아지니까 개소리를 하는 걸까?”
슉- 하고, 다시금 날아든 나이프. 정확히 내 눈을 노리고 날아오는데도, 직전까지 내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메르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는 전혀 피할 수가 없다―!
“......하...!”
긴장해서 한껏 멈췄던 숨을 토해냈다. 온 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오른쪽 눈 바로 앞에는 날카로운 나이프의 날이 빛나고 있다. 내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대신 나를 향해 날아오던 나이프가 눈 앞에서 멈춘 것이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떨어진 위치에 선 메르가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요염하며, 색기가 넘치는 여성이지만, 품평하듯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은 사악한 독사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응, 역시 마음에 드는 강아지네. 그 놀란 표정 무척이나 귀여운 걸. 아, 반항하고 싶으면 반항해도 돼. 그 때는 휴전을 깬 걸로 알고 바로 처분해줄게. 먼저 그 여자부터... 어때?”
“......뱀 같은 여자. 반드시 내 앞에 무릎꿇리고 울고불고 하게 만들어주마.”
“하, 아하하하하하! 그 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 진짜 웃긴다~!”
스커트를 들치고 새로이 꺼낸 나이프를, 메르는 망설임 없이 내게 던졌다. 이번에 노린 것은 목. 이 나이프도 목젖 앞에서 멈췄다. 눈 앞에 하나, 목 앞에 하나....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살살 다가온 나이프의 끝이, 목젖을 콕콕 찌른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메르가, 여왕님 같은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흥분했는지, 뺨이 살짝 달아오른 상태다.
탱그랑, 탱-.
나를 괴롭히던 나이프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최고야, 강아지. 어젯밤에 찬성하길 잘했어. ......그 지저분한 쥐새끼들을 잡기 전까지, 최고의 장난감이 되줄 것 같아.”
메르는 요염한 한숨을 토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내 바지 벨트를 주섬주섬 풀고 바지를 살짝 내렸다.
“......뭐하냐, 너?”
“재밌는 놀이♥”
메르의 손이 속옷까지 끌어내리자, 내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진짜 뭐하냐, 이 여자.
“.......”
“.......뭔데. 왜 아무 말도 없는데.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
“아니, 막상 보고 나니 의외로... 아니,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할게.”
“뭐라고 해 줘! 갑자기 아무 말 없으면 무섭잖아!”
작은 거냐?! 작은 거야?!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않겠지?!
메르는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깔깔깔 웃으면서, 내 음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장갑을 낀 손이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 끝이 닿는 것만으로...... 단숨에 서버렸다.
......어?
“아하하하, 이렇게 나한테 기대하고 있던 거야? 진짜 발정난 강아지구나?”
“아, 아니... 뭐.......”
안 그래도 나이프로 인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심장도 100m 달리기를 전력으로 달린 것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고, 당연하지만 그에 따라 혈액도 미친 듯이 돌고 있었겠지.
그러던 와중에 메르의 갑작스런 변화구. 거기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상대로부터의...... 그러니까... 피학심 같은 게... 희미하게 솟아나서....
“응? 말해 봐, 강아지. 귀여워해줬으면 하는 거 아냐?”
“......윽...!”
장갑을 낀 손으로, 메르가 내 음경을 자극했다.
적당히 육봉을 주무르고, 손잡이 마냥 흔들어보고, 귀두를 자극하며 앞뒤로 손을 움직였다.
이쪽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배려심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녀의 가학적인 성향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손놀림.
그러나 어째선지.
‘......이, 거... 뭔가 눈 뜰 것 같아...?!’
이상하게...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쾌감이 있었다.
“읏......!”
“어머나?”
퓨퓻- 퓻-!
주무르는 방식이 또 바뀌고, 귀두를 자극하며 절정을 강요하는 듯한 손놀림에――나는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렸다. 일부러 옆에 서있던 그녀를 피하듯, 육봉의 끝에서 토해낸 흰 백탁액이 허공을 날고 연무장의 바닥을 더럽혔다.
그 모습을, 메르는 그저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아. 이 예의도 모르는 강아지가, 어디 감히 히어로들의 기지를 더럽히는 거야~?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걸까? 참을 수도 없었던 거야?”
“너...... 죽여버린다....”
“어머나, 아직도 입이 살았네.”
짜악-! 하고.
메르의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멍, 하고 짖으렴.”
“......멍.”
“옳지, 잘했다.”
그러자 내 사지를 벽에 딱 붙여놓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음경을 드러낸 채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듯 털썩 쓰러졌다.
“정했어. 그 더러운 시궁창의 쥐새끼들을 소탕하기 전에, 너부터 제대로 조교해줄게. 너도 더러운 빌런이지만, 잘 교육하면 뭐... 귀여워 해줄 수 있는 강아지 쯤은 되어주려나.”
그러니 기대하라구.
그 말을 끝으로, 메르는 연무장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
그리가 나는 그 등을, 말 없이 쳐다봤다. 검붉은 마그마 같은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걸 느끼면서.
* * *
‘아아, 기분 좋아.’
메르는 연무장에서 나가며,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팔 사이에 끼어 외국의 모델 같은 모양 좋고 큰 가슴이 강조되듯 모였다.
애초부터 약간 사디스틱 기질이 있는 그녀다. 빌런들을 상대할 때면 가장 기고만장한 순간에, 압도적인 힘으로 단번에 판을 뒤집고 절망하는 빌런들의 위에서 오만하게 비웃고 괴롭히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만큼 여자들에게, 특히나 자신의 부하를 아끼는 면도 있다.
‘포, 마치.’
그녀의 부하들은 일전 【시궁쥐】에게 붙잡혔고, 이래저래 수치를 당하는 등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각성자로서 강화된 멘탈과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금방 임무에 복귀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그녀들을 책임지는 대장인 메르는 깊은 책임감과 마그마 같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 쥐새끼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
더러운 빌런들은 온갖 수치와 고통을 주고, 다시는 얼굴을 못 들게 하겠다.
그런 어두운 일념이 원망과도 같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저 강아지는.’
저 강아지, 13호는 그런 빌런 중에 하나다. 그것도 전 최강최악이라 불린 빌런. 그것만으로도 한껏 괴롭힐 이유는 충분하지만.
――‘부탁이다... 보스는, 보스 만큼은 거칠게 대하지 말아줘....’
그 우직하면서도 신실한 모습에, 메르는 속에 뭔가가 걸린 듯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더럽다고 생각한 빌런이 보인, 깨끗한 충의.
단순히 분노를 쏟아내기 어려운, 상반된 그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뭐, 이유야 아무려면 어때.’
지금 그녀의 바람은 저 빌런이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바이올렛, 저 빌런의 보스 앞에서, 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하악하악 추잡한 숨을 내쉬면서 내 발가락을 핥는다면.......
“쿡.....................”
무심코 오싹한 쾌감이 들어, 메르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전율했다. 아, 아아, 상상만으로 기분 좋아. 저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자. 내 전속 강아지로 만들어버리고, 그 여자도 노예처럼 만들어서... 내 명령으로 그가 그녀를 범하게 만들어버리자.
그건 분명 재밌는 광경이 되리라.
“......메르 대장.”
이미 시간이 늦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복도 저편에 서있던 인물이 있었다. 낯익은 한복... 아니, 색은 차분하지만 머리에 쓴 꽃갓도 그렇고, 무당 쪽이 좀 더 어울리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표정과 분위기 때문에, 영 못 미더운 인상이다.
“어머나, 당신은 분명... 그렇네, 아리아였죠? 특수배속실 소속의.”
“네, 그렇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연무장을 이용하셨나요?”
“아하하, 특수배속실 소속에겐 항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실제 상황에선 대장보다도 명령권이 위니까 말야. 응. 일단 연무장을 이용했는데, 왜?”
“아뇨. ......13호도, 혹시 연무장에?”
“강아지 말이구나? 뭔가 일 있어? 아마 아직 거기 있을 거야. 바닥을 좀 더럽혀서 닦고 있을 걸?”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시지요.”
아리아는 가볍게 목례했다. 메르도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걸어나갔다.
홀로 걸어나가며, 생각한다.
‘......뭐지, 아까?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고, 잠깐 대화를 나눌 때의 인상은 나른함 그 자체였다.
역시 착각한 거겠지.
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단하게 결론 지었다.
그리고 복도 한 켠.
떠나가는 그녀의 등을, 아리아는 지옥에서 올라온 도깨비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