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14 패배한 빌런이지만 오늘도 역시 포기란 없다(4)
“그래서 이 녀석이 필요하단 거구나? 약골이니까.”
만약 상대가 강할수록 강해지는 능력이라면, 최약체인 내가 상대하면 상대도 최약이 된다 이거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이길 수는 없는 거 아냐?
마치 밸런스를 맞추고 수평을 이루는 천칭처럼, 약한 놈을 가져가도 강한 놈을 가져가도 결국 무승부만 나오는 게 아닐까.
“솔직히 예언에 구멍이 많아서, 저희도 온전히 상황을 파악한 건 아닙니다. 다만 아리아의 말대로면 당신들이 없을 시에 손해가 막대할 것이라 하더군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번만큼은 협력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라헤가 내용을 일단락지었다. 결국 자세한 건 그 때가 되어야 알게 될테니, 지금은 닥치고 협력하라는 걸로 밖에 안 들린다. 내가 너무 삐딱한 걸까.
하지만 시간이 생긴다는 점에서 불만은 없었다.
대장이 셋이나 모인 이 자리에서 나나 보스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순순히 붙잡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것이다.
이대로 협력하는 척 하면서, 등 뒤에서 뒤통수를 칠 방법을 찾아보자.
“......보스?”
그러나 보스는 어딘지 언짢은 표정으로 히어로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러고보면 보스는 히어로들과 협력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싫어.”
단호하게 말하는 보스. 의외인 답변에 라헤의 눈썹이 찌푸려졌고, 메르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새겨졌다.
“빌런과 히어로가 손을 잡는다니, 그런 구역질 나는 일이 어딨어?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휴전’이야. 협력 따위가 아니야. 너희가 뭘 하든 나는 상관 안 해. 하지만 우리가 뭘 하든 그 쪽도 상관하지 마. 다만 【시궁쥐】를 소탕할 때까지 거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약속은 할게.”
“......당신,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요.”
“이해? 장난해? 이해하지 못한 건 그 쪽이겠지. 애초에 빌런과 히어로가 손을 잡는다니, 그 뒤에 있을 일은 생각 안 해? 히어로들은 머리가 굳었어? 머리에 돌덩어리만 꽉꽉 들어차 있는 거야?”
“어머어머, 저 천박한 말투하고는.”
메르가 조소하며 보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찬성이야. 버러지 같은 빌런들과 협력이라니 말도 안 되지. ......뭐, 여기 있는 강아지를 ‘사육’하는 거라면 상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내 등 뒤로 돌아, 목을 감고 내 머리 위에 가슴을 얹었다.
“어때, 강아지? 빌런 같은 거 그만두고 내 강아지가 될래? 개목걸이를 차고 헥헥 거리면 소중히 키워줄 수도 있는데.”
“내 부하한테서 떨어져 이 천박한 창녀야!”
또 다시 시작되는 기 싸움. 절 사이에 끼고 이러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입니다.
라헤도 실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스페이드는 그 대단하신 대장들의 실체가 이런 것인가... 하는 눈으로 놀랍게 보고 있고.
“둘 다 싸우지 마~! 그보다 얘기를 정리하자고! 그리고 두 사람 다 일리가 있으니까. 빌런과 협력했다고 하면 히어로로서도 평판이 좋지 않고, 빌런이 히어로에게 협력하면 나중에 빌런 연합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 뜻이었지?”
실이 견디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짝짝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보스와 메르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면서,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협력이 아닌 휴전. 좋아. 하지만 몇 가지, 알아야 할 게 있어. 첫째로는 【시궁쥐】들을 그대로 두면, 너희들 빌런들한테도 좋지 않다는 것.”
어째서, 라고 생각했다. 보스에게도 듣긴 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고.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실은 말을 고르며 찬찬히 설명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그들의 행동은 최종적으로 도시를 통째로 전복시킬 것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적지 않은 인원이 모인 【시궁쥐】들이 각성자가 된다면 분명 앞뒤 생각 없이 폭주할 테고, 각성자의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히어로협회 측에서 드문드문 일어난 예지나 연구자료 등을 종합해 그 결과를 예측해봤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예측이 주요 도시 기능의 마비 및 총 경제활동의 57%하락. 거기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손해는 더욱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 정말이지 어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가?’
“확실히, 【시궁쥐】는 특히 과격한 사상을 가진 집단이니까. 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에 깊은 반감을 가진 녀석들이라, 힘을 가진 시점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 애초에 이렇게 대놓고 히어로 납치 같은 미친 짓을 한 것만 봐도 말이지.”
“보스, 잘 아시네요.”
“그 쪽의 장(長)이 마음에 엄청 마음에 안 들었거든.”
보스가 새침하게 말했다.
“아무튼 좋아. 우리도 그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어. 빌런 짓을 할 사회가 없어지면 빌런의 의미가 없으니까. 휴전 중인 동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시궁쥐】를 노릴 거야.”
그 뿐이야, 라며 보스는 일축했다.
정말이지 협력 같은 건 하기 싫은 모양이다.
실은 한숨을 내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음 이야리를 시작했다.
“그럼 두 번째로, ‘휴전’에 관한 건데...... ‘협력’이 아니라 ‘휴전’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지거든――”
* * *
갸흣...... 앗....... 윽......!
“도로시, 들어가겠습니다.”
참모가 실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방향제 냄새에 섞여 익숙하고 음란한 냄새가 풍겨왔다.
“............................꺼져.”
“이런, 매몰차기도 하셔라. 제대로 쉬시긴 하셨나요? 아침도 점심도 기껏 만들어뒀더니 전혀 손대지 않으셨고――”
“꺼져!”
도로시는 거칠게 말하며 움직이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실험실에 울리는 헐떡임이 한층 커져갔다.
실험실의 중앙에 있는 실험대에는, 현재 클럽이 온갖 기계팔로 구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험대 위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나신을 드러낸 클럽의 꽃잎에, 도로시는 부우우웅- 진동하는 딜도를 연신 쑤셔넣고 있었다.
“히윽, 핫, 힛, 휴윽......!”
클럽은 하복부에서 밀려오는 감각에 파들파들 떨면서도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다.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고,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러나 도로시는 그와 대조적으로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저 기계적으로 딜도를 앞뒤로 운동시키고 있었다. 별다른 감흥도 없어보였고, 손은 움직이고 있으나 생각은 딴데로 가 있는 것만 같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평소보다도 훨씬 짙었고, 얼굴 전체에 피로가 만연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눈은 깊고 깊은 빙옥의 냉기 같은 것이 낮게 깔려 있었다.
‘......맨날 티격태격하는 거 같더니.’
참모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잠도 안 잔 모양이다. 그럴 겨를이 없는 거야 할지만 서도....
어젯밤, 도로시의 눈 앞에서 보스가 히어로들에게 끌려갔다. 안 그래도 그게 마음의 짐이 되었을 텐데, 추가타를 날리듯 13호까지, 그것도 혼자 7번대의 기지로 쳐들어가 버렸다.
전 토벌지정등급 S급인 13호는 이미 ‘살해허가’가 나있는 빌런이다. 거기에 지금의 그는 제대로 된 힘도 못 쓰는 상태. 그대로 적진에 쳐들어가면, 결과는 하나뿐이다.
도로시 자신의 발명품 중에서 폭탄이 사라진 것도 알게되었다. 그 바보가 가져갔다면, 정말 살아 돌아올 생각이란 게 없는 거겠지, 하고 바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똑똑한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격정하는 도로시 양의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가.’
――‘놔! 죽여버리겠어. 히어로들... 다 죽여버리겠어. 그 녀석들 죽이고, 나도 죽겠어...!’
결국 참지 못했는지, 새벽에는 붙잡아둔 히어로들을 전부 죽이려 했을 정도였다. 클럽이 그녀에게 ‘그렇다면 자신부터 죽여달라’며 두 히어로들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도로시는 앞 뒤 생각 없이 전부 죽였을지도 모른다.
세뇌를 했다곤 해도 개조가 아닌 이상 인격의 근간은 바뀌지 않는다. 클럽은 어비스의 노예이면서도, 여전히 히어로다. 히어로로서, 동료들을 버릴 수는 없었던 거겠지.
클럽의 말에 독기가 빠져버렸는지, 죽이는 건 포기한 도로시는, 얼마 안 가 무표정으로 클럽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죽인다니 뭐니 하는 것보다야 훨씬 건전하다만, 역시 건전하지 않다.
“......!”
촤아-
클럽이 찌르르르 진동하며 조수를 뿜어냈다. 또 다시 가버린 모양이다.
도로시는 높이 솟은 조수를 얼굴과 가운으로 받으며, 멍한 눈으로 펄떡이는 클럽의 보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흐.... 이제... 그마안.......”
클럽은 힘이 다한 듯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헐떡였다. 그러나 그녀가 억지로 쥐어짜낸 목소리도, 지금의 도로시에겐 전혀 닿지 앟았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무튼 어딘가에 화낼 곳이 필요했다. 자신이 없었다면 보스가 도망칠 수 있지 않았을까? 보스의 능력이 강력한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보스가 순순히 항복한 건 오로지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천재 과학자의 천재 기술을 사용했으니 분명 아지트는 안전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시큐리티도 파수 프로그램도 너무나 쉽게 돌파됐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아직 버틸만 했을 것이다. 그 뒤로 돌아온 13호와 참모에게 잔뜩 화풀이를 했으니. 한 사람은 전 최강이었고, 한 사람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천재적인 지모(智謀)의 책략가다.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있다.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속 한 켠에, 어렴풋이 그리 바랬던 것 같다.
――‘좀, 가보도록 할게. 바이바이.’
그리고 그 결과, 13호는 홀로 떠나버렸다. 보스를 구하기 위해 혼자 뛰어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면, 자신이 그 등을 떠민게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벼랑 끝에 억지로 밀어넣은 것만 같아서, 죄책감으로 마음이 짓눌릴 것 같았다.
13호도 참모도, 살아남기 위해, 이 조직을 지키기 위해 치졸하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히어로들을 납치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책략을 짜내고....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뭘.............
“이제 그만하시죠. 그러다 죽겠습니다.”
참모가 걱정스럽다는 듯 도로시의 손목을 붙잡고 말렸다. 클럽은 어느샌가 완전히 탈진했는지, 실험대 위에 죽은 동물처럼 추욱 늘어져있었다. 달아오른 몸이 살짝살짝 떨리긴 하지만, 절대로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다.
“......아직, 더 할 거야. 죽으면 죽으라지. 아니면, 너가 대신 괴롭힘 당할래?”
도로시가 대충 던져놓았던 리모컨의 스위치를 누르자, 철컹,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실험실의 벽, 바닥, 천장, 실험대에서 각종 도구들이 튀어나왔다. 파직파직 불꽃이 튀는 전기 충격기, 날카로운 가시를 빛내는 철구 같은 물건....
그 광경을 본 참모는 흥분하며 콧김을 뿜었다.
“얼마든지요! 부디 얼마든지 저를 괴롭혀주세요! 아, 대신 도로시 양의 복장은 제가 지정하게 해주십시오! 분명 도로시 양의 체형에도 잘 어울리는 복장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도로시 양의 그 차가운 매도와 욕설을 들으면서 온갖 방식으록 고문을 당할 수 있다니, 여자애 만세, 도로시 양 만세! 자아! 준비 되었으니 얼마든지 와주시지요! 얼마든지 저를 괴롭혀 주세요!”
“......옷 벗지마, 징그러워. 그리고 안 해.”
“어째서요?!”
“역겨우니까.”
도로시는 포기하고 손을 홰홰저었다. 역시 이 바보랑은 엮이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또 다른 바보(13호)가 통제해 주지 않으면 이쪽 바보(참모)의 바보짓은 끝을 모른다.
한탄하듯 혀를 차며 실험실을 나가려는데, 부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제 휴대폰이네요. ......13호님?!”
“뭐?!”
도로시는 단숨에 참모에게 달려갔다.
확실히 액정에 떠오른 건 [천하제일쓰레기 13호님]이라는 글자였다. 그런데 이 녀석, 맨날 13호를 동경한다니 뭐니 말하면서 제일 깔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 아니야, 히어로들이 13호의 시체에서 뺏은 폰으로 전화한 걸지도 모르고... 통신 반응으로 역추절 할 생각일지도....”
“아닙니다, 이건 13호님이에요.”
“어떻게 알아?”
참모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감입니다. 쓰레기를 판별하고 쓰레기를 느끼며 쓰레기의 흐름을 읽는 쓰레기 레이더가 반응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전율하면서까지 반응하는 건 13호님 정도의 쓰레기 밖에 없습니다.”
정말이지 굉장히 말이 심하다. 그냥 이 녀석도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참모가 조심조심 통화버튼을 누르자,
[여, 잘 살아있어? 나 13혼데. 저기, 지금 되게 중요하게 물어볼 게 있거든?]
익숙한 13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사한 목소리를 들은 것 만으로, 그토록 굳어있던 도로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13호다!
살아있는 거야?! 무사한 거지?!
도로시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저기, 도로시 지금 무슨 팬티 입었어?]
“도로시 양, 그렇게 됐으니 제게 팬티를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안도감이고 뭐고 단숨에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