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14 패배한 빌런이지만 오늘도 역시 포기란 없다(2)
스페이드의 꽃잎을, 두 손가락이 왕복하며 자극한다. 이미 안은 애액으로 질척하게 젖어있어, 뜨거웠다.
음부를 찔걱일 때마다 쾌락에 허덕이는 스페이드의 귓가에, 나는 조소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쿠큭..... 어때, 스페이드? 갈 것 같아?”
“히읏... 읏... 하앙...! 응... 가, 가아... 나, 나 갈 것 같아...... 히읏......!”
“좋아...... 그럼 그대로 가라, 스페이드...!”
“후, 후왓, 앗, 앗, 앗, 으응~~~~~~~~~~!”
스페이드의 신체가 활처럼 휘더니, 그대로 탈진한 듯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스페이드의 몸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손가락은 그녀의 엑기스로 번들번들해져 있었다. 번들번들한 손가락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자, 스페이드는 반사적으로 츄릅 츄릅 빨기 시작했다.
“..............고맙다, 스페이드.”
“츄읍, 츄읍...... 응...?”
걱정해준 것도 그렇고, 치료해준 것도 그렇고, 마음이 꺾일 것 같은 이 타이밍에 왠지 힘이 되어준 것도 그렇고. 분명 그녀 본인은 그럴 생각은 없었을 테지만.
그냥 어쩐지 고마워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녀는 여전히 히어로고 나는 빌런이다. 아무리 고마워도 우린 전쟁 중에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제부터는 휴전에 대한 일, 그리고 목표를 달성한 후 휴전이 끝났을 때를 생각해야한다.
“스페이드, 스페이드.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줘.”
손가락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그녀의 귓가에, 나는 세뇌의 ‘키워드’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단숨에,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자, 그럼 그녀에게 어떤 암시를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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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패배한 빌런이지만 오늘도 역시 포기란 없다
‘히어로 녀석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바이올렛은 눈살을 찌푸리며 7번대 숙소 층의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창문 아래로 슬쩍 내려다보면, 어제 13호가 끌고 와서 박아놓은 화물차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렇게 히어로의 기지에 있으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다. 그렇게나 미워하는 히어로들의 본거지를 거닐고 있으니....
적진 한 가운데 있으니 희미한 불안감이 솟아오르기도 했지만,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따스해지고 안도감이 들었다.
――‘부탁한다... 염치 없지만 보스를, 보스만은... 거칠게 대하지 마.’
13호 그 녀석.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진인 이곳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왔다.
거기에 엉망진창, 망신창이가 되어서도,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그렇게나 자신을 생각해준 걸까. 그렇게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준 걸까. 소중히 생각해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진에 사로잡혀 불안감 뿐이던 그녀에게 그 모습은 히어로보다 히어로로 보였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엉망진창에 꼴사나운 모습으로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던 안쓰러운 모습은, 방심하면 눈물 흘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을 울렸다....
‘아리아 그 여자도 수상하고...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은 해야하지만.’
13호는 단순한 부하일 텐데, 조금 이러저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긴, 내가 가장 의지하는 부하이기도 하고, 다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부하들 중에서 13호는 뭐든 믿고 맡길 수 있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너무 막 대한 건 아닐까. 항상 청소도 식사 준비도 13호에게 전부 맡기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13호한테 맡기고... 귀찮은 일이 있으면 13호에게 맡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바이올렛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기, 설마 싶은데, 나 13호를 너무 막 대했었나?
그런데 13호는 왜 이 나쁜 년을 이렇게나 도와주는 거지? 충성심이냐. 상사를 향한 충성심인 거냐. 아아, 너무 눈부셔서 더럽고 게으른 나는 도무지 직시할 수가 없겠는 걸...!
‘일단 어제 그렇게 당했으니까, 위로를 좀 해주고... 어제 상처도 제대로 치료 못 받았다고 하니까....’
어제의 일로 다들 피곤했는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몰래 기지 안을 뒤져서 구급상자를 찾아올 수 있었다.
‘거울... 좀 보고올 걸 그랬나.’
그래봤자 부하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조금 부스스한 머리만 손가락으로 가볍게 정리하고, 13호에게 배정된 방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열려있다. 문 단속 좀 하라고, 히어로들 사이에 있는 거잖아 너.
“13호, 들어간다~.”
어쨌든 열려있다니 낭보다. 바이올렛은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13호는 방에 있었다. 아직 자고 있다. 어제 결국 두 사람이 잠에 든 시간은 새벽 3시쯤이었다. 아직 잘 만했다.
그런데.
“......왜 이 여자도 여기 있는 거지?”
왠지 다홍색 머리의 히어로도 그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다. 단순한 곁잠도 아니고, 죽부인 마냥 13호가 품에 안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같이 잔 거야? 보스인 내가 적진 한복판에서 불안해하며 제대로 잠도 못자고 있던 사이에?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생겼는데?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13호 녀석, 그렇게 필사적으로 쳐들어 온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이 히어로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소중한 노예인데다 7번대를 함락시키기 위한 중요한 말이다. 그걸 속수무책으로 히어로들에게 빼앗겼으니 되찾기 위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남자란 지배욕으로 가득한 생물이라, 뭔가를(특히 여자를) 뺏기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들었다.
거기다 이 히어로... 스페이드 랬나. 예쁘고.
‘나도 나름 예쁘다고는... 생각하는데, 취향이란 게 있는 법이고....’
그래. 생각해보니 자신은 집안일도 안 하고 일이 없으면 대낮까지 자고 최근엔 BL에 빠져 사는 썩은 여자다. BL 무시하지 마, 임마. BL은 소중하다. 세상의 보물이다. 이런 말을 하는 동안에 남자들에게선 정나미가 떨어지겠지만. 고간이 터져서 다 죽어버려라, 돼지들.
“응.......”
13호가 잠결에 스페이드의 몸을 더욱 꼭 껴안았다. 이쯤 되면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다.
13호 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13호 따윈 단순한 부하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흠.”
그래서 바이올렛은 손에 든 구급상자를 위로 높이 쳐들고.
그대로 13호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쳤다.
* * *
“......아파.”
“그, 뭐냐. 그럴 수도 있지. 손이 미끄러졌어.”
“네, 보스. 그럴 수도 있죠. 보스는 자는 사람을 일부러 전력으로 때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13호는 아침 준비를 위해 후라이팬을 불에 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믿고 있다는 게 말투에서 느껴져서, 바이올렛은 가슴이 묘하게 따끔거렸다. 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제발 이 나쁜 년의 말을 믿지 말아줘 13호... 차라리 책망해줘어.......
'어휴, 큰일 날 뻔 했네.'
13호의 입장으로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비해 스페이드에게 암시를 주다가,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이다.
스페이드와 함께 자는 걸 다른 히어로들에게 걸렸으면 관계를 의심 받는다. 결국 애플처럼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바이올렛이 깨워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접시, 다 놨어...요.”
스페이드가 머뭇머뭇 말했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약간 서먹한 분위기다. 제대로 13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아침 준비에 집중한다. 요리는 13호가 하고 있으니 접시나 수저를 놓는 등 주변 준비 밖에 못하지만.
“어라...? 어째서 당신이 요리를 하고 있는 건가요?”
의아해하는 목소리와 함께, 7번대의 대장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대장님도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려. 우리 보스가 배고프다고 찡찡대서 만들고 있다만, 이왕 만드는 거 많이 만드는 게 좋잖아?”
“누가 찡찡 댔다는 거야....”
“......빌런의 밥을 누가 먹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싶습니다만... 애플도 근신시켜둬서 제대로 요리할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행이네요.”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실력을 다 아는 7번대의 멤버들이라면 몰라도 빌런인 그나 다른 대장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요리를 잘하는 게 애플이지만, 그녀는 스파이 노릇을 한 게 들켜서 근신 중이다. ‘어비스와 한패이니 숙청’ 같은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13호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식재료를 이용해, 13호는 금세 든든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아침이니까 속이 편하도록 끓여서 낸 누룽지를 베이스로, 그 외에 맛살이나 계란 등을 이용한 간단한 메뉴들을 곁들였다.
‘그런데 다들 어째 조용하네. 빌런인 우리들이 있으니 그럴만도 하려나. 아니면 원래 히어로들은 아침에 조용한 걸지도 모르겠고.’
7번대에서는 요리는 주방에서 하고, 식사는 식당 대신 거실과 같은 느낌의 로비에 있는 커다란 식탁에서 먹는다. 로비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서, 식탁이 놓인 식사 공간과 소파와 TV가 놓인 휴식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식사 공간에서 요리를 기다리는 세 여성들은, 별 다른 말도 없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3호는 침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음 요리를 접시에 옮겼다.
요리가 하나하나 식탁 위에 올라올 때마다, 스페이드와 바이올렛, 라헤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13호는 그런 변화를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리, 잘해...!’
이 순간 세 여성의 머리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딱히 어려운 요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요리 하나하나 섬세하게 모양을 잡고 접시와 요리의 배치도 색감을 고려해서 배치하는 게 눈에 보였다. 칼질하는 솜씨도 감탄이 나올 지경이라 할 말이 없었다.
남자가 요리를 잘하는 건 굉장한 매력이다. 메리트가 크다.
그러나 이 자리에 다 큰 성인 여성이 셋이나 있건만, 모두를 제치고 남자 한 명이 독보적으로 잘하는 건... 아무리 요즘 시대라지만 여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섵불리 요리를 돕겠다고 했다간,
――‘어...... 그냥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은데.’
같은 소리를 들을까 봐 겁난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의 옆에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법이다.
갈등과 고뇌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마지막 요리가 테이블로 옮겨졌다. 그리고 동시에,
“우~와. 맛있는 냄새! 7번대는 아침부터 맛있는 거 먹는 구나~!”
‘......6번대 대장.’
통통 튀는 듯한 가벼운 말투와 함께, 새로운 인물이 로비에 나타났다.
6번대의 대장, 실이다. 풍성하게 컬이 들어간 머리도, 갸름한 턱선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토이푸들을 연상케 한다. 프릴이 잔뜩 달린 잠옷도 그런 이미지에 한 몫했다.
“어라, 아니구나? 7번대가 아니라――”
잠깐 말이 끊겼다 싶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요리를 접시에 담던 13호의 맞은편에 서있었다. 손에는 지금 막 접시에 옮겨 담으려던 구운 새우가 들려있다.
“네가 만든 거였네? 빌런 주제에 제법이야. 빌런 그만두고 우리 지부에서 밥이나 만들어주지 않을래? 그럼 우리도 따로 체포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까.”
명랑하게 말하며 새우의 머리를 아작 씹었다. 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이 고혹적인 매력을 드러냈다.
“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히어로 기지에 히어로 외의 사람을 들이는 건 좋지 못하니까. 그리고 그는 빌런으로서 자신이 한 짓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범죄자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온전히 치르고 나서야 다른 일을 하도록 허락할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라헤는 여전히 딱딱하고 고지식해~ 그래서 답답해~. 말투도 ‘너무 딱딱해서 화내는 것 같다’고 했더니 동기한테까지 존댓말 쓰기 시작하고~ 존댓말이 더 딱딱한 거 알아~?”
“적어도 화내는 것 같다는 말은 덜 듣고 있어요.”
“대신 감정이 없는 것 같다는 소린 더 많이 듣지만~.”
라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오호오. 저 존댓말에는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나. 어제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속마음은 아가씨인 것 같던데.
“흐응~? 맛있는 냄새~애.”
“메르인가요. 아무리 어제 늦게 잤다지만 몇 시인 줄 알아요? 실은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오고, 대장으로서의 자각이 있다면 두 사람 다 좀――”
핀잔을 주려던 라헤는, 나타난 메르의 모습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