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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화 〉#13 그리고 빌런은 어울리지 않게도 목숨을 걸었다(2) (59/271)



〈 59화 〉#13 그리고 빌런은 어울리지 않게도 목숨을 걸었다(2)

배 한복판을 찔려,  뒤로 칼날이 튀어나왔다. 와아, 씨, 칼에 찔리면 이런 기분이었지. 각성자가 되기 전, 온갖 실험을 당하던 그 시절 이후로 꽤나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이지만 별로 그립지는 않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그냥 진짜 기분이 더럽다. 말로 다 표현할  없을 정도로.


“쿨럭... 아프잖아....”


“치명상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당장에라도 심장을 꿰뚫어버리고 그 목을 쳐버리고 싶지만, 당신에겐 맡겨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 죽일 수는 없는 게 한이네요.”

“뭐야 그게... 무슨 뜻이야?”


“얌전히 있겠다면 설명해드리겠――”


“미안한데 필요 없어, 그런 거.”

검을 빼내려는 라헤의 손을, 나는 손을 들어  붙들었다.  시점에서, 남아있던 스페이드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마력으로 이만큼이나 강화한 악력이다. 대장급이라도 금방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


“드디어 잡았다.”


라헤는 눈을 찡그렸다.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상관 없지만. 이제 와서 뭔가 알아차린  넌 늦었어, 이 여자야.


“【열려라, 영웅들의 무기고. 원하는 건 지옥의 괴수를 붙드는 땅의 쇠사슬】.”

“뭐.......”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영창에 따라 허공에서 사슬이 나타나, 나와 라헤를, 라헤의 손목을 붙든 나의 손을, 우리의 다리를, 팔을, 목을, 몸을, 허벅지를, 온몸을 얽어매고 붙들었다.

이 시점에서, 클럽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클럽의 마력은 이쪽 능력이랑 상성이 좋았다. 저번에 꺼냈던 거대한 뱃머리도, 시궁쥐의 똘마니를 물리칠 때 불러냈던 쇠사슬도 클럽의 마력을 이용해 실체화 시켰었지.

“이게 무슨 짓이죠?”

“아무~래도 이길 것 같은 가망이 없었어서 말이야....”

마지막으로 남은 한쪽 손으로 옷깃을 들춰보였다. 라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본 것만으로 알아차린 걸까. 싱겁게.


“우리 과학자 씨 특제 폭탄이야. 마력을 불어넣으면 폭발해. 크기는 이래도 꽤 세다?”

“폭......?!”


그리고 이제는 체크의 마력을 다 써버리려 한다. 질이 좋은 체크의 마력을 폭탄에 불어넣고, 거기에 ‘강화’까지 해서 터뜨리면――아무리 이 여자라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여자만 없다면, 나머지는 참모가 알아서 해주겠지. 클럽도 있고, 스페이드와 애플은 아직 세뇌 아래 있다. 체크와 코코는 구속해뒀고, 남은 적은 아리아라는 여자 하나뿐이지만, 그녀뿐이라면 보스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7번대 함락 완료다.

드디어 임무 완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드세면서도 아가씨 같은 여자를 안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길동무로 만족하자.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같이 죽자, 대장님.”


“당신――!”

나는 흉흉하게 웃으며, 품 속의 폭탄에 마력을 부어넣었다.



* * *


콰광-!

하는 굉음과 함께 폭풍, 그리고 어마어마한 격통과 함께 온 몸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에 육편을 흩뿌린다――같은 장면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끝났다.


“......엉?”


굉음도 폭풍도 격통도 폭발도... 아무 것도 없었다.


나와 레하는 사슬에 묶인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품 속에 있었을 폭탄은 기폭하지 않았다. 불량품인가? 이런 상황에?

아니, 불량품이 아니라...... 없어졌어, 폭탄이. 품에 있었을 폭탄이 없어졌다.

“야~아. 라헤  큰일  뻔했네~  녀석 재밌다~아.”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경박한 말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지만 어두워서 얼굴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인상만으로는 토이푸들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저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절망의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저 불청객이 라헤와 같은 흰색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흰색 전투복은 단순한 대원복이 아닌, 대장들에게만 지급되었으며 대장들만 입는 게 허락되었다.


그 말은 즉, 지금 나타난 그녀는 대장이라는 뜻이다. 7번대 외의.


“실입니까... 고맙습니다. 방금 그건  위험해보여서.”


“흐응? 내가 폭탄을 빼내기도 전에 이미 얼어있던데. 어우, 차가워.”

실이라 불린 여자가 손에  것을 흔들흔들 흔들어보였다. 분명 내 품에 들어가 있었을 폭탄이 지금 저 여자의 손에 있었다.

“언제...... 가져갔지?”

“응? 조금 전에? 내 눈앞까지 찬찬히 걸어가서 세심한 손길로 조심조심 빼냈는데? 꺄하하, 시간이 멈춰있었으니까  알아 채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마~안?”


뭐가 저리 즐거운지 깔깔 웃는 실. 그리고 나는 낙담하며 고개를 숙였다.


실이라는 이름, 그리고 시간을 멈췄다는 발언. 그것만으로 그녀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유추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유명하다, 저 여자는.


“히어로협회 4번대 대장, S급 히어로 실...이라니 진짜냐.”


“어머나, 날 잘 아네?”

정말이지 가망이 없다. ‘시계자리(Horologium)’의 축복을 받은 그녀는 【시간조작】이라는 규격 외의 능력을 사용한다. 라헤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대장이 한 명  나타나다니, 운명의 신이 나를 버렸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얼음으로 얼렸다고 해도 마력에 반응하는 폭탄이라면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요. 조심하세요, 실.”


“아아, 괜찮아.  폭탄의 시간을 멈춰놨거든. 아무리 마력을 넣어봐야 시간이 멈춘 폭탄을 터뜨릴 방법은 없지 않을까?”

실이 폭탄을 바닥에 대충 던졌지만, 역시 터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한 순간 라헤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 틈을 타, 나는 실체화했던 사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앗, 도망친다!”

무리야. 이건 무리. 가망이 없다. 동귀어진한다면 적어도 보스는 구할 수 있을  알고 무모하게 덤벼든 건데, 이렇게 되면 단순한 개죽음일 뿐이다. 부탁이다, 운명의 신. 제발  엿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줘~~~~!

“정말이지, 굳이 이런 야밤에 대장을 둘이나 불러야 겠어? 고작해야 이런 일로?”

“읍?!”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육체를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중압감과 함께 바닥에 납작하게 쳐박혔다.

바로 위에서 거대한 손이 나를 짓누르는  같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온 몸에서 뼈가 삐긱삐긱삐긱삐긱 불길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진 것처럼 몸을 일으킬 수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목만을 빼꼼히 돌려, 시선을 위로 향했다. 마침, 내 위를 넘어가려던 새로운 불청객의 스커트 안이 훤히 보였다. 아무리 어두워도 여성의 속옷만은 100만w짜리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훤히 보이는 것이 슬픈 남자의 습성이다. 오우, 고급스런 레이스의 검은 팬티네. 겁나 꼴린다.


“우걱?!”

“어머, 감히 숙녀의 속옷을 엿보다니, 버릇 나쁜 강아지네.”


얼굴을 신을 벗은 발로 꾸욱꾸욱, 꾸욱꾸욱 밟혔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거기에 발을 감싼 스타킹이 쓸리며 만들어내는 감미로운 자극. 언젠가 비슷한 행위를 당한 적이 있었던  같은데(클럽), 지금의 것은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자연스러움과 고귀함이 담겨져있었다. 그렇네, 마치 진정한 여왕님에게 밟히고 있는  같은――


“메르도 적당히 해주세요.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니까.”


“어머... 흥분해버렸네.”


발이 치워져 드러난 시야 속에, 나를 밟던 여왕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성숙한 분위기의 단발에 흔들리는 커다란 귀걸이, 눈에 띄는 여성스런 굴곡, 그리고 역시 흰 전투복.


히어로협회 3번대 대장, S급 히어로 메르. 능력은 ‘황소자리(Taurus)’에서 비롯된 【중력조작】.


아아, 망했다. 두 명 있는 대장만으로도 이미 절망적인데, 대장이 한 사람 더 추가되다니.

이건 그냥 운명의 신이 나를 고깝게 보고 프레스기로 쾅쾅 찍어서 내다버린다고 할만한 수준이다. 저주해주겠어, 운명의 신. 3일 이내로 치질이나 걸려버려라.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미덥지 못한 얼굴이네... 귀엽긴 하지만.”


3번대의 대장은 바닥에 찌부러지듯 엎드린 내 머리카락을 붙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순간 짓누르던 중압감이   쪽만 사라졌다.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구나.

그녀는 품평하듯 손가락으로 내뺨을 쓸어내리더니,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요염하게 후훗 웃었다.


“......내가 알기로... 내가 너보다 연상일 걸...?”


“어머나, 그래? 이렇게 귀여운데?”

“그런 말... 처음 들어.......”

3번대, 4번대, 7번대 대장들,  다 동기면서 나보다 연하인 거 알고 있다. 동기니까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하하하, 귀엽다는 말보단 남자답다는 말이  좋지? 남자구나~ 귀여워~.”


연하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정말이지 열이 받네.


 짓눌린 팔다리는, 이제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아, 이대로 끝이다. 발버둥 치는 것도 소용없고, 가지고 있던 패도 전부  써버렸다. 참모도 오늘은 마력을 다 써버려서, 이전과 같은 긴급탈출도 불가능하겠지. 정말이지 완패다. 홀리 쉿이다.

“13호!!!!”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의 목소리였다.


뒷문으로 나온 건지, 7번대 기지 건물을 빙 돌아서  바이올렛색 머리의 보스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잠...... 막지 마!”

그러나 가까이 오기 전에 라헤 대장의 손길에 가로막혀, 어쩌지 못하고 이쪽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뒤에는 처음 보는 히어로 여성이 서있었다. 한복... 무당? 저게 아리아라는 히어로일까.


뭐, 이제 끝인 나한테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보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봤지만 여기까진 가 봅니다.

“흐~응. 보스도 예쁘고 귀엽네. 보스를 구하러 대장이 셋이나 있는 곳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오다니, 정성이 갸륵하구나. 셋이나 있었을 줄은 몰랐겠지만.”

“.......”


“응?  그렇게 보는 거야?”


그그그극-


짓눌리는 팔다리로 바닥을 긁으며, 마지막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사지를 움직였다.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어, 가까스로 상반신을 지면에서 띄울 수 있었다.

“......흐응. 10배 정도의 중력이었는데.”


재밌다는 듯 메르가 눈 앞에서 빙글빙글 웃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는 그대로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부탁한다... 염치 없지만 보스를, 보스만은... 거칠게 대하지 마.”

목소리를 쥐어짜내 부탁했다. 이 이상 어떤 반항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부탁하는 것 밖에 할  있는 게 없으니까.

당장에라도 일어나  거만한 대장들의 목을 물어뜯고 싶은 분노를 억눌러 삼키며, 나는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자세를 유지했다.


머리 위에선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침묵. 그 사이 중력의 여파로 온몸이 삐그덕 거리고, 바닥을 짚은 팔다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휘청였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어?”


그러다 일순,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나, 이 강아지가 마음에 들어. 우리 애를 괴롭힌 【시궁쥐】들한테 물먹이는 데 얘네가 필요하다는 거지? 난 찬성할게.”


“에~ 메르 그거 너무 무른 거 아냐~? 이 녀석 그래도 빌런이라고~?”

“어머, 실. 뭔가 불만 있니?”

“아니~이. 그런 거 없어. 애초에 특수배속실의 제안은 대장급이 셋 모여도 거절할 수 없으니까.”

뭐야, 뭐야뭐야. 무슨 일이야?

어쩐지 나를 처형한다거나 어딘가 감옥에 처넣는다거나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이거 어쩐지...... 운명의 신이 나한테 손을 흔들어주는 거려나? 죄송했어요, 운명의 신, 치질 걸리라고 저주한 거 철회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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