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13 그리고 빌런은 어울리지 않게도 목숨을 걸었다(1)
이미 시간은 옛적에 자정을 지났다. 가로등마저 일부 꺼지고 달빛이 아스라이 비추는 거리에서, 건물에 처박힌 화물차가 화려한 불꽃을 토해내고 있다.
이거, 여기 더 있으면 위험할 거 같은데. 도망쳐도 되나요.
“토벌지정등급이라니, 사람을 무슨 괴수취급하지 말라고.”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빌런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합니다. 인간으로 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울리는 표현 아닌가요.”
매번 듣는 내용이지만 진짜 너무한 얘기다. 빌런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니.
“그보다 당신들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 빌런이 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나요?”
“......마녀.”
“‘얼음 마녀’입니다. 어차피 인간 취급 안하긴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녀는 그래도 인간이잖아.”
“좋아하는 이미지는 아닌걸요. 저는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고 꽃 향기를 풍기는 포근한 아가씨 같은 인상이 좋은데, 그런 귀엽지 않은 별명을....”
“......위험해. 나 지금 네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어.”
“소름끼치는 소리를.”
라헤는 허리춤에 걸린 칼집에서 칼을 빼내었다. 시퍼렇게 빛이 나는 칼은, 언뜻 보기에는 예리함이 걸여되어 있었다.
클럽이 가르쳐주기로, 라헤의 칼은 날이 들지 않는 칼이라고 한다. 좋게 봐줘야 칼 모양의 쇳덩이일 뿐, 아무리 정교하게 휘둘러도 저 뭉툭한 날로는 무엇도 벨 수 없다고 한다.
휘두르는 게 라헤만 아니라면.
“갑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잘 피해주세요.”
라헤가 바닥을 힘차게 밟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그녀는 내 눈 앞에 다가 와 있었다.
언제 접근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번개 같은 몸놀림에 몸이 한순간 경직했다.
가까스로 몸을 기울이지 않았으면, 내질러진 그녀의 검 끝에 단번에 심장을 꿰뚫렸을 것이다.
“칫.”
검 끝이 전봇대를 스티로폼처럼 가르고, 날의 뿌리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날이 없는 검으로.
“야... 간도 안 보고 죽일 기세로 찌르냐!”
“못 피했으면 아리아의 말이고 뭐고 그대로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요... 아쉽네요.”
나를 무시하고 뭔가 중얼거린다. 뭐라는 거야?
전봇대에 칼을 박아넣은 라헤에게 옆차기를 날렸지만, 그녀는 이미 전봇대에서 검을 뽑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더럽게 빠른 여자다.
어깨에 매고 있던 보스턴백에서 네 개의 봉을 꺼냈다. 이음매를 맞춰서 잇자, 단숨에 2m 가까운 길이의 봉이 완성됐다. 체크한테서 훔쳐온 무기다.
“봉을 다룰 줄 아나요?”
“기본적으로 어느 것이든 겉핥기 정도로.”
“그런 거로 제 검에 맞서겠다고요?”
나와 라헤, 두 사람의 거리는 약 8m. 당연하지만 팔을 뻗은들 닿을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라헤는 칼을 품 안쪽으로 당기나 싶더니, 그 자리에서 단숨에 휘둘렀다.
쨍-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롭고 선명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고, 위화감이 느껴져 봉을 내려다보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봉이 두동강 나있었다. 이 거리에서, 무슨 마술을 부린 거냐.
“제가 은혜를 입은 별자리는 ‘천칭자리(Libra)’. 이 은혜 아래 있는 제가 정의의편이고 빌런인 당신이 악인인 이상, 당신에게 승산은 없습니다. 설령, S급이라던 당신의 능력이 되돌아와도 마찬가지겠죠. 아쉽게도 당시에는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만.”
또다시 라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났다.
맙소사. 8m의 거리를 없는 셈치지 말라고. 마음의 준비 할 시간도 없잖아!
“아시겠습니까? 이게 대장이란 겁니다.”
“크으?!”
창졸간에 반으로 똑 부러진 봉을 라헤에게 휘둘렀지만, 봉 끝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휘둘러진 그녀의 검이 내 몸을 가격했다.
삐긱삐긱삐긱삐긱삐긱삐긱-!
“꺼......헉?!”
날이 죽은 칼날에 얻어맞은 내 몸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굉음과 함께 막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7번대의 벽에 처박혔다.
* * *
“흙먼지... 거기다 기지까지 부숴버리고.”
라헤는 손을 홰홰 저어 뽀얀 흙먼지를 치워냈다. 빌런 13호는 이것으로 무력화. 전 토벌지정등급 S급이라는 게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싱거웠다.
‘아리아의 말이 있으니 체포도 살해도 못하지만요.’
분명 대장은 자신이지만, 특수배속실 소속 인원은 특정 상황에 있어 대장보다 높은 명령권을 주장할 수 있다.
아무리 대장이 뛰어나다 해도 미래를 직접 본 사람의 훈수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요. 스페이드에게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소중한 부하들을 빼앗기게 둔 건 분명 대장인 자신의 지휘 실패가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만큼이나 자신의 부하에게 몹쓸 짓을 한 저 남자를, 어비스를 용서할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저 화물차, 이 이상 두면 진짜로 폭발해버리겠다.
“【오너라, 얼음의 요정이여. 빙설 여왕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바란다. 이 자리에서 명한다.】”
라헤는 검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노래하듯 주문을 외웠다.
“【얼어붙어라.】”
삐기기기긱-!
영창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기지의 벽에 처박힌 채 활활 타오르던 화물차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불꽃으로 환하게 밝았던 거리에 다시금 어둠이 덮였다.
화물차를 감싼 거대한 얼음 수정이 달빛과 가로등 빛을 반사해 주변에 흩뿌린다.
‘이걸로 화재도 진압됐고…. 그나저나 벌써 소방차 소리가 들리는데 공기관은 빠르구나 싶네요.’
나머지는 어딘가에 처박혀있을 13호를 찾아내 구속하면 된다. 그리고 아리아의 말대로 교섭을 진행해, 이 뒤에 있을 【시궁쥐】와의 싸움에 고기방패로 내세우면 되겠지.
그런데 기지는 어쩌지... 엉망진창이 돼버렸네. 수리하려면 얼마나 들까... 숙소 층은 괜찮은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아리아의 예지가 있어서 13호가 찾아올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올 줄은 몰랐다. 어비스의 범죄는 항상 쪼잔하고 소극적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별 일은 없겠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예지해달라고 할 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 나는 빌런이다. 거창하게 이딴 방식으로 쳐들어와서 쓸데없이 일을 늘리고, 그런 주제에 약하다. 겨우 한 방에 저꼴이라니, 하여간 한심하다.
‘이래서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도 없었네요. 아리아의 예지가 틀린 걸까요? 일단 부탁해둔 그 사람들한텐 미안하다고 해야――’
카-앙!
흙먼지 속에서 날아온 물체를, 손에 든 검으로 가볍게 쳐냈다. 이어서 날아온 물체도, 마찬가지로 검으로 쳐낸다.
“위험하네. 죽는 줄 알았어.”
건물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려렸다. 분명 직격을 받아 날아갔던 13호가,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조금 전 내려놓았던 보스턴백으로 걸어가, 새로운 무기를 꺼낸다.
“능력은 사용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조금 달라. 별자리한테서 마력을 못 받는 것 뿐이야.”
“뭐가 다른 거죠?”
“알고 싶어? 안 알려줄 건데.”
라헤는 말 없이 검을 들어, 다시 13호에게로 달려들었다.
카킹-, 챙, 챙, 채채채채채채채채챙-!
연이어 이어지는 날카로운 검극의 소리. 라헤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쇠로 된 무기가 서로 닿을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끼잉-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13호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또 잘렸냐! 이상하잖아, 이건 쇳덩인데!”
“......쓸데 없는 발버둥을.”
다시금 보스턴 백에서 꺼낸 무기로 반격하지만, 역시 막아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미 가지고 온 무기의 절반은 두동강 나 못 쓰게 됐다. 이 여자를 이기는 그림이 상상이 안 간다.
13호는 초조함에 혀를 찼지만, 라헤는 이상함을 느끼며 한층 신중해진 상태였다.
무기를 들고 반격한다고 해도, 여전히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상한 것은, 분명 13호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익...!”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진 검은 한순간 두 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13호는 막아냈다. 심지어 마력을 불어넣은 칼날은 쇳덩어리라도 종잇장처럼 잘라낼 수 있을 텐데, 13호가 손에 든 무기는 몇 번이나 부딪치고 서야 겨우 잘라낸다.
분명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무슨 연유에선지 S급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정 외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경험상 지금은 무리해서라도 속공으로 끝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라헤는, 한층 검속을 높였다.
‘......일 났네. 마력이 얼마 안 남았어.’
그런 그녀와 대치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나마 그녀와의 싸움에서 버티고 있는 건 붙잡은 히어로들에게서 전달 받은 마력 덕분이다.
클럽의 마력으로 감각을 확장해 라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스페이드의 마력으로 근력을 강화해 그 움직임을 따라가고, 체크의 마력으로 무기를 강화해 라헤의 검을 막아낸다.
까낑-! 높은 쇳소리와 함께 다리를 찢으려는 듯 날아오는 칼날을 쳐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반대쪽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을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해내면, 어느샌가 자신의 사각을 노리고 또 다시 검극이 날아들었다.
연격연격연격연격.
쉬지 않고 날아오는 칼날의 세례에 겨우겨우 쫓아가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삐끗해서 조금의 실수라도 생기면 단숨에 무너져버릴 거다.
와, 머리 아파. 뇌가 귀로 튀어나올 것 같네 진짜.
한계까지 몰아세운 정신력이 이제는 무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높은 쇳소리와 함께 검을 튕겨낼 때마다 뇌가 작동을 멈추고 눈 앞이 새하얘질 것만 같았다. 한껏 긴장한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숨은 짐승처럼 거칠어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호우 같은 검격을 쏟아내고 있는 라헤 본인은, 담담하고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땀은 커녕 숨조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력은 커녕 준비운동도 안 된다는 눈이다. 치트키냐.
아아, 그냥 꽁무니 빼고 도망가고 싶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까낑-!
‘잠깐... 빨랏...?!’
라헤의 검속이 단숨에 빨라졌다. 시시한 탐색전이 아닌 속전속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과연 대장이라는 걸까. 이 쪽의 패를 모를 테니 좀 더 신중하게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판단이 빨랐다.
단숨에 손에 든 무기가 두동강 나고, 어깨와 옆구리에서 촤악- 피가 솟았다. 언제 베였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크으!”
두동강 난 무기를 던져버리고 발치의 보스턴백을 집어 들며 뒤로 물러섰다. 새로운 무기를 꺼내야한다. ......그런데 이 백, 왜 갑자기 묵직해졌지?
“......뭐야 이게?!”
그러나 보스턴백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가로막혔다. 어느샌가 단단한 얼음덩어리가 보스턴백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틈을 봐서 얼렸습니다. 더이상 무기는 못 꺼내겠죠.”
라헤의 고운 얼굴이 코 앞에 다가왔다.
푸욱-하는 살을 꿰뚫는 소리. 몸을 꿰뚫은 차가운 이물감과 이어서 찾아온 불에 타는 듯한 격통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카흑.......”
라헤의 검이, 내 배를 꿰뚫어 찌르고 있었다. 쓰바 존나 아프다. 배때지에 칼을 쑤셔박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목을 타고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아 진짜 아프다. 울고 싶다. 칼에 찌르다니 인생을 잘못 산 게 아닌가 쩜 몇 초의 시간 동안 진지하게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나마 요행인 것은 목을 베이거나 어디를 잘못 찔려서 단숨에 의식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것으로, 계획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