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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5) (57/271)



〈 57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5)

생각해보면 내가 어비스에 들어온  보스 때문이다.

나야 원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모두가 알만한 대한민국의 명문대에서 경제를 배우고 있었고, 다른 대학생들처럼 과모임을 하고 학점을 신경 쓰고 군대를 갔다 오고 취직을 준비하던, 평범한 일반인.

각성자 비각성자를 차별하는 쓰레기 같은 사회지만, 그래도 조금 머리가 돌아가고 명문대 타이틀도 있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있던 나는 그래도  부럽지 않은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히어로니 빌런이니, 그건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가십에 지나지 않았다. 연예인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재수 없게도, 정말 운이 없게도.


나는 억지로 각성자가 되었고, 인생은 파탄 나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쓰바 뭐 같네’하고 멋대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부조리한 과정을 거쳤다. 각성자가 되면 인생 편할  같지? 그 말 맞다. 나 같은 불법 각성자만 아니라면야. Fuck이다, 젠장.


뭐, 거두절미하고.


솔직히 따지자면야, 정말 평탄하고 순탄한 인생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들 굴곡 있는 삶이 있고, 밑바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차고도 넘친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삶이 상당히 축복받은 삶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불행을 자랑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상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말하겠다.

나는 한 번 구렁텅이에 떨어졌었고, 인생이 파탄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인생의 미아가 되었지만, 지금의 보스 덕분에 안식을 얻었다.

나는 보스에게 반했다. 그렇기 때문에 빌런이 되었다.


빌런 13호의 의미는, 보스 한 분 뿐이다.

그러니까.

“자, 그럼 개판을 벌여보자, 히어로들.”

나는  무식하게 거대한 화물차를 끌고, 7번대 기지를 향해 돌진했다.

* * *



어비스의 보스, 바이올렛은 멍하니 책장을 훑었다. 그녀를 위해 준비된 방은 빌런을 수감하는 감옥이라기엔 너무나 아늑한 공간이었다. 손에는 수갑조차 채워져 있지 않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면 편하게 갔다오라며 문도 잠가 놓지 않았다. 빌런 조직의 보스를 붙잡았는데도 너무나 허술한 경비상태에 허탈감마저 느낄 정도다.

그럼 당장이라도 몰래 도망쳐볼까 했지만,

‘뭐야 이 책장. 장르별로 깔끔하게 정리해놨어. 비, BL, BL까지! 거기다 웹으로는 볼 수 없는 한정판 외전 시리즈까지...! 미쳤어미쳤어! 책장째로 가져가고 싶다! 다 보지 않으면 안 나갈 거야!’


이런 식으로 눈이 돌아가 계시다. 13호가 알면 피눈물을 흘렸을 광경이다.


품 안에 BL책을 한가득 꺼내들었을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히어로 아리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자, 자, 잠시만~~~!”

“들어가겠습니다.”

“으겍?!”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허겁지겁 책을 숨기려던 바이올렛은 그대로 쿠당탕 넘어져버렸다.

자, 자, 잠시만이라고 했잖아~~~~!

“이런,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렸나요. 줍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 아니. 괜찮으니까! 오지마! 오지 않아도 돼! 혼자 하면 되니까!”


“과연,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적에게 잡혀와서도 BL을 향한 집념을 불태우는 모습이 놀랍지만요.”

“다 들켰어?!”

“참고로 오른쪽 선반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두 용사님과 3P」를 추천합니다. 난폭한 로맨스에 더해 BL까지 한 세트인 꿈의 작품이에요. 아아, 보입니다.  ‘예지안’에 바이올렛 님이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만족하는 모습이 보여요.”

이, 이 녀석 이상한 애다....

바이올렛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잽싸게 책장에서 지목받은 책을 꺼냈다. 호오호오. 이런 것도 괜찮을지도....

아니, 그런 것보다.

“왜 온 거야, 히어로. 애초에 나를 감방에 넣을 것 같지도 않던데.”

“예에. 그렇죠.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바이올렛 님은 여기 계셔만 주시면 됩니다.”


바이올렛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조금 후면 13호 오빠가 기지에 직접 쳐들어오겠지요. 바이올렛 님은 그걸 위한 미끼입니다.”

“.......”

그렇구나, 미끼였구나. 원래 노리던건 13호였나? 그렇다면 그냥 아지트에서 13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 이유가 뭐지?


바이올렛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잠깐만. 지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귀가 잘못 됐나?

“저기, 아리아라고 했나. 하나 물어도 돼?”

“네, 물어보시죠?”

“저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면 방금... 13호한테....”

오빠, 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어머나. 실수했네요. 그만 입으로 나와버렸군요.”


호들갑스런 말투지만, 게슴츠레하게 뜬 눈은 여전히 나른해보일 뿐이다.

“그...... 13호랑 아는 사이였어?”

“아뇨. 면식은 전혀 없어요.”


“그런데 되게 친하게 부르는데?”


아리아는 바이올렛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고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다.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람?


“일단  문제는 넘어가죠.”

“넘어가는 거야...?”


“그보다 본론입니다. 바이올렛 님을 인질로 잡은 것도,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아리아는 담담하고 나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하는 걸까? 진위를 알 수 없어 바이올렛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답변을 기다렸다.


“바이올렛 님. 바이올렛 님은 13호 오빠와 이하 어비스의 멤버들에게 공투를 명령해주셔야겠습니다.”

“......공투?”


“예. 공투입니다. 우리 7번대와 바이올렛 님의 어비스. 둘의 공투를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히어로랑 빌런이라고? 어째서 히어로가 빌런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공투라고 했는데, 그럼 적이 있다는 거지?”

“네. 바이올렛 님도  아시는 조직입니다만, 스페이드 언니를 납치하려 했던 전적이 있었지요. 【시궁쥐】라고 합니다.”


그거라면 보고로 들은  있다.

납치당하려던 스페이드를 13호가 희희낙락 허를 찔러, 【시궁쥐】에게서 가로챘다던가. 그런 보고서를 받았었지.

“현재 【시궁쥐】는 ‘비각성자의 각성화’ 연구 개발이 끝났습니다. 제 예지에 의하면 2주 안에, 【시궁쥐】의 각성자 빌런들이 일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때, 적지 않은 히어로들의 희생이 있을 거란 겁니다.”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지금의 13호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기껏해야 참모가 책략을 빌려주는 거나 도로시의 발명품을 제공하는 정도고... 나는 싸움은 잘 못해.”


“저희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고?

거기까지 듣고나서야,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서야 바이올렛은 아아,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뿌득, 이를 갈았다.


“너네...... 우리보고 고기방패가 되라는 거구나...?”


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이 곧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다. 이 빌어먹을 히어로들은, 히어로들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자신들 빌런들을 사지에 앞세워 밀어넣겠다는 뜻이다.

정말.


빌어먹을 히어로들의 방식이다.


“그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아? 내가 만만해 보여?”


단숨에 솟아오른 분노가, 한계점을 넘어서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손에 든 책을 바닥에 내던진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히어로협회에는 각성자를 구속할만한 기술이 없습니다. 빌런들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라며 아리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목숨은 무척이나 가볍습니다. 간단하게 손만 쥐어도,  목숨을 쥐어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머릿 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꿰뚫어라】!”

이미 자신의 입은 제어를 벗어나, 그녀의 능력인 【언령】을 내뱉고 있었다.

번쩍 빛나며 아리아를 향해 날아가는 빛의 창. 그것은 본래 실체를 가지지 않을 뿐인 마력덩어리여야 하지만, ‘꿰뚫라’는 언령을 수행하기 위해 물리법칙을 거스르고 실체를 가졌다. 이대로 날아들어, 그녀의 적을 꿰뚫기 위해.

마력을 머금은 말로 그녀가 목적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바로 바이올렛이 그녀의 별자리 ‘제단자리(Ara)’에게서 허락된 능력인 【언령】이었다.

“......그만두시죠.”


그러나 아리아는 빛의 창이 쏘아지기도 전에 품속에서 꺼낸 봉을 허공에 휘적이고 있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그녀를 감싸듯 거대한 도깨비의 형체가 나타났다. 마력으로 실체화된 두꺼운 팔은, 빛의 창에 꿰뚫리며 창과 함께 터져나가듯 사라졌다. 상쇄된 것이다.


“어차피 13호 오빠는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제 【예지】에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대장이 정면에서 맞을 테고, 패배합니다.”

“......!”

“당신을 구하러 와서 꼴사납게 지고, 바닥을 구르고, 그리고 목숨을 위협받겠죠.”


그 때 당신은 어떤 결단을 내릴까요.


아리아는 바이올렛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그 발걸음은 마치 절망을 몰고 오는 사신의 것처럼 느껴져, 바이올렛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순순히 13호가 도착하는  기다려야 할까? 이 년들의 말대로 순순히 따라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동귀어진할 각오로, 한 방 날릴까?’

뭐가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무시당하고 참고 싶지 않다.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앞뒤  가리고, 죄다 일렬로 세우고 주먹으로 면상을 패고 싶다. 샌드백마냥 두드리고 싶다. 아아, 돌아가고 싶어. 13호를 때리는 거 기분 좋은데. 그러고보면 속이 상할 때마다 13호를 세워놓고 때렸었지.  녀석 항상 웃으며 받아줘서, ‘내가 사실 나쁜 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더랬지. 맞아. 13호 같은 샌드백은 세상에 더 없다고.


내 소중한 샌드백을, 이런 놈들 좋으라고 넘겨주기 싫다.

반쯤 농담으로 생각하며, 그러나 결단하며, 바이올렛이 ‘커다란 한 방’을 쏘기 위해 마력을 모으려던 때였다.


“농담이지만요.”

 빠지는 말투와 함께, 바이올렛의 코 앞에 다가온 아리아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


“뭐.......”

농담?

“일단 대략적인 내용은 맞습니다. 이대로면 그 빌런 조직 시궁쥐와의 전투로 히어로들이 대거 소모될테고, 그걸 막기 위해 당신들 어비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계획은  예지에 의거하여 나왔으며, 모든 것은 제 제안과 계획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계획 속에 어비스는, 특히 13호 오빠는 고기방패 따위가 아닙니다. 바라는 것은――”


아리아는 바이올렛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나른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숨결에 바이올렛은 무심코 오싹한 기분을 느꼈고 곧 이어 듣게 된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말을 다한 아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렛에게서 떨어졌다.

“이상입니다. 저는 당신과 【어비스】의 편입니다. 믿어주시죠.”

조금 전 아리아가 귓가에 속삭인 내용을 곱씹어 보고, 바이올렛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뺨을 붉혔다. 맙소사. 설마. 그럴 수가.


“잠깐, 방금 그거, 진짜――”

“시간이 됐습니다.”


콰-앙!

그리고 아리아의 선언과 함께, 7번대의 기지가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덜컹 흔들렸다.

* * *




“와아, 이거 진짜 위험하구만. 실제로 해보니까 영화에서 본 거랑은 다르네.”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7번대 기지 한복판에 처박힌 화물차를 살펴봤다. 13호는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차 문을 열고 빠져나왔으므로, 바닥에 쓸린 찰과상 정도 밖에 없었다. 체크의 마력으로 강화하지 않았다면 좀 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차, 완벽하게 찌그러졌네. 어, 뭐야, 왜 불이 나는 거야? 터질 거 같지 않아? 되게 무서운데?  멀어져야 하나?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이런 짓을 하다니...... 정도가 있지 않나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아, 왔다.

“전(前) 토벌지정등급 S급 빌런 13호. 지금 이 시간 정의에 의거해서, 빌런이자 악인 당신을 징벌해드리겠습니다.... 용서하지 않아요.”


7번대의 대장, S급 히어로 라헤가, 바로 눈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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