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12 빌런은 씁쓸히 패배를 곱씹는다(2)
콰당-!
“헤헷! 잘 있어라 바보들아!”
문이 바깥으로 열리는 구조라 살았다!
코코는 단숨에 방에서 뛰쳐나와, 창고를 가로질렀다.
두 손이야 수갑이 걸려있지만 다리는 아무런 구속도 없어서 달려서 도망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거기다 소속이 소속이다보니, 숨어들거나 도망쳐거나 하는 일이 많은 만큼 훈련할 때도 달리기는 집중해서 단련했다.
듣자하니 13호는 지금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더해서 참모는 육체강화계 능력이 아니다. 조금 전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림자에 퐁당 빠져버렸지만, 그 능력도 만능은 아닐 거다.
모든 능력은 거리에 비례해 영향력이 약해지니까... 붙잡히기 전에 최대한 멀리 떨어지면 무사하다!
그러니까 상대가 남자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아드레날린이 콸콸 솟는 걸 느끼며, 코코는 컨테이너들을 피하며 쏜살 같이 창고 밖으로 향했다.
* * *
“아야야야... 저 여자 제법인데. 방금 어딜 잘못 맞았는지 다리가 저려.”
“저런, 괜찮으십니까.”
“......근데 넌 왜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냐.”
“방금 그 아가씨, 다리가 예뻐서... 그런 다리에 얻어맞을 수 있다면 제 다리 하나나 두 개쯤 분질러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참모님, 외람되지만 제가 밟아드릴까요.”
“아쉬운대로 그렇게 할까요. 자, 얼마든지 밟아주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침대에 누운 참모를 꾸욱꾸욱 밟기 시작하는 클럽. 참모는 클럽의 발에 힘이 실릴 때마다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게 최고레벨의 변태인가. 내게는 너무나도 먼 경지에 무심코 존경심이 솟아오른다. 리스펙트.
“그런데 13호님, 어째서 막으셨습니까?”
참모의 능력은 대부분 그림자를 매개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몸을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코코가 도망치려 할 때 출입문을 그림자로 막아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 짧은 한 순간, 나는 균형을 잃은 상태로 손을 들어 그런 참모를 제지했다. 다행히 참모에게 내 의사가 전해졌는지, 참모는 순순히 보내주었다.
“어쩐지 촉이 안 좋아서.”
뭐랄까, 촉이 안 좋았다.
확실히, 히어로인 것 치고는 너무 허술한 여자였다. 이렇게 손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직감이라고 할가.
“13호님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라 양?”
“코코 씨는 은밀 행동과 첩보의 프로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암기술과 암습에도 능합니다.”
어, 뭐야 그거.
“제가 암기술을 배운 것도 코코 씨에게서... 아마 옷 여기저기에 여러 암기를 숨겨놓고 있었겠죠. 굳이 사용하지 않은 건 참모님의 능력을 경계했기 때문이고요.”
“단순히 맹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무서운 여자였다.
“첩보부는 빌런을 절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두 분의 목에 칼을 꽂을 생각이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참모님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능력을 썼다면, 코코 씨는 허를 찔러 역으로 참모님의 숨통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13호님의 능력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동귀어진 할 각오로 13호님에게 칼을 들이댔을지도 모르고요.”
말하자면 나는 능력이 없는, 잉여병력으로 판단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서늘한 얘기네.
정작 당사자인 참모는 클럽한테 꾹꾹 밟히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야야, 너 방금 죽을 뻔한 거 알아?
어쨌든 다행이었다. 순간적으로 촉이 온 것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셈이니.
그건 그렇다해도, 놓쳐버렸는데.
그 여자 우리가 뭘 하는지도 다 봤을 테고, 여기서 본 걸 그대로 전하기라도 하면 낭패다. 원래 계획은 체크도 클럽도 7번대로 무사히 돌려보내고, 애플까지 포함한 셋으로 나머지 멤버들과 대장의 통수를 치고 세뇌한다는 거였으니....
‘세뇌를 했다는 사실도, 체크가 우리에게 한 번 붙잡혔다는 사실도 들키면 큰일이야.’
하지만 코코가 무사히 돌아간 시점에서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세뇌’라는 카드가 드러나 버린다.
도망칠 때 단번에 쫓아가서 붙잡을 걸 그랬다. 뭐 때문에 촉이 온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주저하는 바람에....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들. 코코 씨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조치는 이미 다 취해놨습니다.”
클럽이 ‘날 칭찬해주세요, 나 잘났죠’라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발은 참모의 음경을 꾸욱, 꾸~욱 밟으면서.
......역시, 클럽은 노예 같은 비굴한 모습보다는 저 자신만만하고 사디스틱한 편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아, 하아...... 위험해...... 너무 기분 좋아아앙......♥”
그리고 참모는 부들부들 떨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 쪽이 노예인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 아무래도 좋지만.
* * *
“헤엑, 헤엑. 창고 하나 더럽게 넓네.”
거기다 수갑을 차고 있으니 피로가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달리는 데 중심 잡기가 힘들다. 언제든 넘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전력으로 달리려니, 정신적인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다.
그보다 어디까지 도망쳐야 능력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는 걸까? 저쪽도 슬슬 정신을 차렸을 텐데도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가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이미 벗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순 없지. 저쪽도 발이 안 달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게 수상해.’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은.
솔직히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쫓을 거라 생각했다. 그 순간을 노리고 카운터로 암살할 생각도 있었다. 조금 전 손쉽게 붙잡힌 건 예기치 못하게 자신이 기습을 당했다는 것과 그 상황에선 도주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그런 김에 코코 자신이 얕보이기 위한 것도 있었다.
약한 상대를 대할 때, 상대는 틈을 보이기 마련이다.
방에서 탈출할 때도, 분명 자신을 붙잡는데 혈안이 돼서 틈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바라던 대로는 되지 않았다.
‘분명 날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 이상으로 얼간이였나.’
어쨌든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이거대로 낭보다. 둘 다 질펀하게 노느라고 지쳐버린 걸거야. 그래서 혈기왕성 건강미인인 나를 쫓아오지 못하는 거지. 이대로 대장님께 지금 수집한 정보를 전달해드리자. 꺄하하, 이래서 남자들은 안 된다니까!
창고의 출입문에 다다랐을 때, 코코는 낙담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입문의 앞을 새카만 인형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개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참모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인형이 분명하다.
이상하네, 아까 체크 씨가 하나도 남김 없이 부쉈을 텐데. 미처 놓친 게 있었나? 아니면 그새 새로 만든 걸지도....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고.’
저걸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다.
코코의 능력은 치고박는 전투에 특화된 것도 아니고, 체크와 같은 무술의 달인도 아니다. 그나마 손에 익은 게 암살술일 뿐인데, 인형이라고 하는 건 사람처럼 급소를 찌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저런게 제일 거북하다. 체크의 손에는 몇 백 개나 되는 인형이 산산조각들이 났지만, 그건 체크의 괴물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그렇다고 불평하고 있을 순 없다. 이 창고, 사다리 없이는 닿지 않는 곳에 밖에 창문이 없다. 출입문도 지금의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여기 뿐, 하나 있는 뒷문을 이용하려면 참모와 13호가 있는 방쪽으로 가야한다.
‘결국, 정면돌파 밖에 방법이 없으려나. 하다못해 남자들이면 미인계라도 시도해보는데.’
소매와 품 속, 양말 사이와 허벅지의 벨트에 끼워놓은 암기들을 확인한다. 음... 자신은 없지만, 해볼까.
코코는 컨테이너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인형들을 살펴보다, 컨테이너 옆을 빙~ 돌아 슬금슬금 다가갔다. 새삼스럽지만 저 인형들은 어떤 방식으로 적을 감지하는 걸까. 눈일까? 눈이라면 편할텐데.
혹시 몰라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슬금슬금.
아직까지 인형들은 반응할 조짐이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프리패스 씹가능할 것 같은데?
희희낙락하며 은밀하게 다가가는 코코. 출입문까지의 거리는 이제 겨우 5미터 정도 밖에 안 남았다.
그러나 3미터의 경계를 넘어 발을 디디는 순간, 별안간 인형들의 목이 기괴할 정도의 각도로 비틀리며 코코를 바라봤다. 와오, 이 장면만 보면 호러다.
“~~~~~~~~! 무서웟?!”
인형이 코코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 코코 쪽에서 먼저 인형 쪽으로 파고들었다. 손에 꺼내 든 건 각각 손바닥만 한 나이프와 송곳. 두 개를 교차로 휘둘러, 양 다리 쪽의 관절에 꽂아넣었다. 관절에 이물질이 끼인 인형의 다리는 끼긱-하는 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임은 봉쇄당했지만 코코가 스스로 거리를 좁혀온 덕분에, 그래도 인형 팔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세 쌍, 총 여섯 개나 되는 팔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 모든 방향에서 날아들었다.
“후웃!”
그러나 날아드는 팔을, 코코는 몸을 깊이 숙여, 바닥에 찰싹 달라붙을 기세로 엎드리며 피해냈다.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팔들 사이로, 약간의 틈을 노려 코코는 긴 다리를 쭉 뻗었다. 발가락 사이에는 역시 송곳 같은 암기가 끼어있다.
파각-!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질러진 송곳이 인형의 목덜미 부근에 정확하게 꽂혔다. 동시에 수갑의 사슬을 인형의 한쪽 다리에 걸고 당기자, 인형은 균형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파가각, 하는 파쇄음과 함께 넘어지는 인형. 그러나 쓰러진 인형을 타 넘고 다음 인형이 코코에게 쇄도했다.
코코는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바닥을 기는 듯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인형에게서 한 보 멀어졌다. 동시에 몸을 뒤틀며, 품에 넣어두었던 암기를 던졌다.
쉬이익- 타악!
그러나 인형의 팔은 날아드는 암기를 손쉽게 쳐내고, 다시금 코코를 포획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뻗으려고 했다.
쉬이익- 콱!
그러나 다시 한 번 날아온 암기가 한쪽 팔 관절에 걸렸다. 이번에는 발로 던진 암기여서, 인형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쉬쉬쉬쉬쉬쉬쉬쉬쉭-!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그리고 잇달아 날아드는 암기가, 인형의 각 관절을 모조리 점하기 시작했다. 코코가 양 손, 양 발을 이용해 춤을 추듯 내던지는 암기가, 인형의 각 관절에 정확히 꽂히며 인형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인형의 팔은 여섯 개라지만, 인형의 한계인 뻣뻣한 움직임으로는 유연하게 움직이며 두 손 두 발로 암기를 투척하는 코코의 공격에 맥없이 당할 뿐이었다.
이내 인형은 빽빽하게 꽂힌 암기에 의해 고슴도치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도 연신 끼익-끼익-거리는 게 아직도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꽂힌 암기도 하나 둘 빠지면서 자유롭게 움직이겠지. 박살이 나며 밑에 깔렸던 인형도, 점점 파편이 도로 모이며 회복하기 시작했다. 팔도 끼익- 끼익- 움직인다. 체크 정도로 철저하게 부수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됐다 뭐. 문을 통과할 때까지만 버텨주면 되니까.
인형들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도망칠 생각으로, 코코는 총총히 출입문을 향했다.
드디어 이 갑갑한 창고 밖으로 나간다! 예이! 바보들아 잘 있어라!
“......응? 어, 아앗?!”
그러나 출입문의 문턱을 넘기도 전에, 갑작스런 이물감과 함께 코코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