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10 히어로들의 아지트 탈출기(2)
“진짜, 그 놈은 내 인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 돼!”
“허무하네요...... 인증한다고 괜한 짓을 해버린 꼴이고.”
분은 나지만 참아야한다. 수갑은 최우선 사항은 아니니 어쩔 수 없다. 포기해야지.
실험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구로 향하고 있다. 이 아지트는 쓸데없이 커서, 5층에 있는 실험실에서 출구까지는 갈 길이 멀다. 정말 허무하게 시간을 날려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나네! 13호 그 자식, 언젠가 목을 똑 분질러버리겠어!
“......스페이드 씨? 그런데 이 복도,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다니, 뭐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려던 스페이드도 이유를 알고 깜짝 놀랐다. 원래라면 이 앞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야 하는데, 벽으로 막혀있다.
이 복도, 이상하다! 원래 이런 구조가 아니었는데!
[안녕하세요. 자율기동형 파수 프로그램 파수군 2 입니다.]
“또 너야?!”
[파수군 ‘2’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2를 강조한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지정된 시간 외, 인가되지 않은 루트로의 침입을 확인, 현재 이 건물은 【다이달로스】 시스템 아래 있습니다. 인증되지 않은 침입자는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증했거든?! 사용자 ID인지 뭔지를 잘 뒤져보라고!”
[파수군 1의 데이터는 아직 인계되지 않았습니다. 13시간 뒤의 업데이트 시간을 기다려주시거나, 지금 바로 새로 인증해주시기 바랍니다.]
묘하게 구식이다. 실시간 업데이트 기능 정도는 달아달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인증이라니, ‘1’ 씨처럼 신체 측정인가요. 생체인증인지 뭔지 하는 거.”
[파수군 1의 시스템은 구식입니다. 최신식인 저는 그런 야만스런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기계 주제에 동료를 깐다. 사이가 안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기계 주제에.
그럼 뭘로 인증하면 되는 거야?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며 기다리자,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내려왔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옷들이었다.
[지정한 복장을 입고 지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어주시면 인증이 완료됩니다. 각 방벽마다 다른 복장, 다른 포즈로 인증해주시기 바랍니다.]
““.......””
[본 방멱 E4를 여시려면 이 ‘전신 망사 스타킹’과 ‘초 에로 타천사 경찰제복’을 입어주시기 바랍니다. 입으시면 화면에 띄워진 포즈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불평할 힘도 없어서, 한숨만이 나왔다.
[복장 지정은 사용자 ID ‘13호’님께서, 포즈 지정은 사용자 ID ‘참모’님 께서 해주셨습니다.]
““또 그놈들이냐!!””
* * *
“......장님? 라헤 대장님?”
들려온 목소리에, 라헤 대장은 정신을 차렸다. 언제나와 같은 7번대의 사무실, 어제와 같은 티타임 중이었는데...... 또 졸았나 보네요.
“애플, 실례했네요. 기껏 차를 준비해줬는데. 식어버렸어요.”
“아뇨, 그만큼 피로하시다는 거잖아요? 제가 가져온 아로마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기뻐요.”
“그러네요. 아로마 덕분인지 몸이 가벼워요. 방에 돌아가서도 푹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겉치레가 아닌 진짜였다. 휴식용 아로마라는 게 이렇게나 효과가 좋은지 몰랐다.
“그런데 클럽 씨도 내일이면 돌아오겠네요.”
“그래봐야 빌런의 약속...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어차피 스페이드도 붙잡혀 있다면 【어비스】에는 직접 쳐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아지트 위치를 추린 서류가 여기――”
하나, 둘, 셋...... 여섯?
라헤는 고개를 기울였다. 여섯 장 밖에 없었나? 몇 장 더 있었던 것 같은....
“여섯 장 밖에 없었어요, 라헤 대장님.”
“아, 그랬나요? ......그런 것 같네요.”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여기 더 있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기기로 했다.
“라헤 대장님, 그런데 클럽 씨를 풀어주는 게 내일 이 시간이면 어떻게 하나요?”
“예?”
“마중은 나가야 되잖아요? 하지만 대장님은 이 시간에 일하셔야 하고, 귀중한 티타임도 있고요.”
일이 아무리 바빠도 부하보다 중요하진 않다. 티타임이야 말할 것도 없다.
라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그러네요, 전 여기서... 일을 해야죠.”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니, 하지만 이게 맞기도 하다. 지금은 【어비스】의 아지트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고, 【시궁쥐】의 안건도 있다. 그 두 개 조직만이 아니더라도 7번대 관할 지역에서 활동하는 빌런 조직은 양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로 많다.
한마디로, 바쁘다.
“마중이라면 체크 한 사람이면 충분하겠죠. 그 아이라면 만에 하나라도 괜찮을 테니까.”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정말, 클럽 씨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애플은 자연스럽게 미소지었다.
* * *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아아아아아――앗!
스페이드는 이미 몇 번째일지 모를 각오를 마음 속에 다지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눈 앞의 마지막 방벽이 열리는 것을 보며, 주섬주섬 원래의 옷(와이셔츠와 반바지)를 챙겨 입는다.
이제 이 방벽만 넘으면 1층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몇 번이나 부끄러운 옷을 입고 굴욕적인 포즈를 하고, 심지어 사진까지 찍혔다. “주인님......” 어쩌구 하는 대사까지 시켰을 때는 탈출이고 뭐고 진짜로 폭발할 뻔했다.
그런데 사진까지 찍히다니....
혹시나 싶지만, 아니, 십중팔구 그 사진들을 13호나 참모가 보게 될텐데...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제 그 놈들을 죽이고 나도 죽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놈들을 죽이는 건 탈출하고 난 후에, 이 번거로운 수갑을 해제하고 나서다. 그 때까진 참자.
“.......”
“클럽? 조용하네?”
“아, 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이상한 점?”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클럽은 모양 좋은 눈썹을 모으고, 되뇌이듯 말했다.
“어째서 애플이 세뇌당했다는 걸 알려준 걸까요?”
“어째서냐니, 어차피 내가 전할 거란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 잖아?”
“하지만 저는 이렇게 스페이드 씨에게 전해 들었고, 내일이면 해방해주기로 예정되어 있었어요. 제가 해방되고 나면 그 사실을 7번대에 전할 테고....”
그 부분은 스페이드도 생각했던 점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당연한 거잖아.”
“에?”
“그 쪼잔한 놈들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뭐. 애초부터 너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런...!”
클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의외로 순진하구나, 지금까지 뭘 본 걸까.
“빌런이 빌런 짓을 하는 게 뭐가 이상해? 그 쪼잔한 놈들 하는 짓이야 다 그런 거겠지. 분명 그 놈들은 배를 째면 오징어 먹물이 시커멓게 가득할 거야.”
“누구 배를 째면 시커멓다는 거야 넌.......”
허를 찌르고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아, 그렇네. 이렇게나 난리를 피웠으니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다.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실까?”
“아아아아, 맙소사 이런 발칙한 사진들이... 이 참모, 이런 문란한 물건을 방치할 수 없으니 제 클라우드에 영구보존 시켜두겠습니다.... 하아아아......!”
복도 너머에서는, 거만하게 선 13호와 참모가 두 사람을 기다리듯 서 있었다. 그보다 참모는 패널 같은 기기를 손에 들고 미친 놈처럼 하악하악, 허억허억 거리고 있다... 뭘 보고 있는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저기만 지나면 출구까지는 금방인데...!
“애초에 둘 다 암시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을 텐데... 왜 이 야밤에 괜한 짓을 하는 거야?”
“바보 같은 너희들의 허술한 세뇌 따위, 옛적에 다 풀어버렸거든!”
“흐음?”
스페이드가 호기롭게 외치자, 13호가 유쾌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클럽, 스페이드. 지금 바로 우리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방으로 돌아간다면, 오늘의 일은 용서해주겠어. 조금 괴롭히는 정도로 봐주지. 하지만 불복하고 계속하겠다면...... 그 때는 감당하기 힘들 거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선언하는 13호.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에 무심코 몸이 굳을 뻔 했지만, 스페이드는 억지로 웃으며 긴장을 떨쳐내었다. 능력은 쓸 수 없지만 꿀릴 거야 없다. 어차피 13호도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고.
‘주의해야 할 건 참모.’
‘완력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길 수 없어요.’
‘따로따로 가면 안 돼.’
‘타이밍을 맞춰서 단 번에 달려들어야 합니다.’
클럽과 스페이드, 두 사람은 여러 생각이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단숨에, 오만하게 선 두 빌런들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두 히어로의 손에서 들려왔다. 실험실의 창고에 들렸을 때 혹시 몰라 슬쩍한, 비장의 아이템이다!
“뭣, 그건?!”
“섬광수류――”
작렬.
눈앞에서 연달아터진 섬광탄에 두 빌런의 시야가 가로막혔다. 눈을 꼭 감고 대비한 히어로들은, 몸을 낮게 하며 그런 두 빌런들의 옆을 요령좋게 통과했다.
성공이다!
실험실의 창고에서, 혹시 몰라 소형 섬광탄을 챙겨오길 잘했다. 원래라면 그림자가 매개체인 참모의 능력을 봉인하기 위해 챙겨왔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다니!
“생각보다 효과가 약해! 클럽, 전력으로 달려!”
“알겠어요!”
원래 섬광수류탄이라고 하면 섬광과 폭음으로 단숨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소형인 점도 있고 애초에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건지, 빛만 잠깐 깜박였을 뿐이지만... 충분하다. 이대로 지나칠 수 있었으니까.
“스페이드, 클럽, 돌아와!”
복도를 꺾는 순간, 13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명령에 거스를 수 없는 줄 아는 걸까?
누가 들을 줄 알고!
스페이드는 코웃음을 치며 다리에 힘을 더했다. 이제 곧 현관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코너를 돌고 나자,
“크으... 눈이 아프잖아, 빌어먹을.”
어째선지, 13호와 참모가 서있었다.
“어......?”
앞질러졌나?! 옆에 선 클럽도 당황한 듯 숨을 삼켰다.
눈을 비비던 두 빌런들이 이쪽을 바라볼 즈음, 스페이드는 클럽의 팔을 붙들고 뒤돌아 달려나갔다. 복도가 어두워서 길을 잘못 든 걸지도 모르겠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 걸 왼쪽으로 꺾었다던가. 그런데 그렇게 헷갈릴 길이 있었던가...?
“이번에야 말로 출구에!”
다시 한번 복도를 돌아 들어간다. 이번에야말로 현관문이 보여야 하는, 데.......
“휴우, 이제 좀 앞이 보이네... 어떻게 해줄래, 망할 히어로들아. 대가는 비싸게 받을 거다?”
“하하하, 쓸모없는 발버둥이라니까요, 둘 다.”
여전히, 출구 대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옆에 선 클럽이 “아, 아아아아.......” 신음소리를 흘리며 벌벌 떨었다. 스페이드는 분함에 빠드드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