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9 빌런과 히어로의 두근두근♥ 데이트(3)
13호의 멱살을 쥔 손이 떨렸다. ‘어비스의 일원에게 폭력을 행사 할 수 없다’, ‘어비스의 일원에게 반항할 수 없다’는 암시에 걸려 있는 스페이드에게, 멱살을 쥔다는 행위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암시 따위, 정신력으로 억지로 꺾어버린다. 당장에라도 황송해하며 떼려는 손에, 의지로 힘을 준다.
13호 따위에게, 아니, 13호니까. 그녀는 절대로 질 생각이 없었다.
지고 싶지 않다. 이따위 남자한테는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각오가 마음에 신념과도 같이 자리 잡았다.
“그러니까 열심히 발버둥 쳐봐. 제대로 나를 세뇌하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네 목을 물어뜯을 테니까.”
“......그거, 좀 더 노력해야겠네. 아주 완벽하고 철저하게 능욕하고, 조교하고, 세뇌해주겠어.”
“해보던가. 7번대의 스페이드는 절대 만만한 여자가 아니란 걸 보여줄게.”
“고맙네. 의욕 없는 여자보다는, 너 같은 여자를 타락시키는 편이 훨씬 즐거워.”
“나야말로 고마워. 너 정도 되는 개쓰레기여야 붙잡아서, 엉망진창으로 복수할 맛이 나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사납게 웃었다.
“그보다 슬슬 놔주지? 사람들이 쳐다본다.”
“......흥.”
스페이드가 멱살을 놓자, 13호는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스페이드의 팔을 잡아끌고 바로 옆의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밀어붙였다.
“응? 어?”
놀라서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스페이드의 턱을 붙잡고,
“복수.”
그대로 입을 맞췄다.
“으으으으으으읍?!”
굳게 다물려는 입술을 가르고, 억지로 혀와 혀를 얽어 진한 키스를 강요한다.
예기치 못한 기습. 스페이드는 양팔로 13호를 꾸욱꾸욱 밀어내려 했지만, 암시 때문에 저항하려는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페이드의 저항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13호는 자유로운 남은 한 손을 움직여, 스페이드의 가슴을 옷 위로 쥐고,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주물렀다.
“으읏......!?”
‘기, 길거리에서...?!’
이미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진 데다, 인적도 뜸한 골목길이긴 하다. 하지만 바로 옆에는 아직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대로가 있는 데다, 가끔 슬쩍 이쪽을 보고는 헉, 하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든 저항하고 싶은데, 저항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밀어내고 싶은데,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거기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키스가, 가슴을 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응.......”
스페이드는 스스로 저항한다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멋대로 반응해, 자신의 혀를 13호의 것과 적극적으로 얽어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비비고, 가슴을 만지는 13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 더욱 격하게 쥐도록 강요한다. 입을 타고 전해져 들어오는 뜨거운 타액을, 꼴깍 목울대를 울리며 마신다.
뱃속이 뜨겁다. 몸이 뜨겁다.
하아아... 이미 이 몸은, 이 음란한 쾌락에 반응하고 있다.......
몇 분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긴 키스 끝에, 스페이드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질 때였다.
“――――커억?!”
눈 앞에 있던 13호가, 몸이 ㄱ자로 꺾인 채, 골목길 저편으로 바람처럼 날아가버렸다. 이어서 콰드드드득! 하는 무시무시한 파쇄음.
어......? 무슨 일?
“마, 마. 한동안 못봤던 귀여운 후배랑 비슷하게 생긴 가시나가 있길래 신기하다 생각했다마는... 하, 본인이었구마.”
스페이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동시에 매우 그리운 목소리.
“잡아 죽이삔다, 이 육시랄 놈의 빌런 놈아. 어디 우리 스페이드한테, 내 소중한 후배들한테 손을 대나!!!!!!”
7번대의 A급 히어로이자 스페이드의 선배.
히어로 체크가, 골목길의 초입에 당당하게 서있었다.
* * *
뭐에 얻어맞은 거지?
13호는 무너진 판자 잔해들 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려지는 바람에, 판자를 가득 실어놓은 수레에 처박힌 것이다.
일어서면서 뭔가가 팔에 걸려 밀어냈더니, 찰그랑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자전거였다.
......설마, 자전거를 던져서, 맞췄다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생각을 정리하길 포기하고, 콜록거리며 판자사이를 헤집어 빠져나왔다.
저 멀리, 골목길의 초입 부근에 스페이드를 지키고 선 여성이 한 명.
허리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금발에, 드러난 한쪽 귀에는 각종 피어싱과 귀걸이가 7개나 달려있었다.
팔짱을 끼고 스페이드를 지키듯 이쪽을 노려보는 녹안은, 안개 숲의 짐승의 그것처럼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니가? 어비스의 선봉장인가 하는 육갑이. 빤딱빤딱 와라! 엉망진창으로 뽀개줄테니!”
마력을 담은 외침이 골목길에 울렸다. 같은 마력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멋대로 무릎 꿇지 않을까 싶은, 무거운 위압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싸구려 사투리,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내 말투에 불만있나?”
“어디서 배운 사투리야?”
“내가 멋대로 하는 기다.”
“.......”
히어로 체크. 7번대의 A급 히어로지만, 실력은 대장급에 가깝다고 한다. 스페이드와 클럽, 애플을 심문해서 알아낸 정보로는 능력이 ‘무기 강화’라는 것과 무술의 달인이라는 것. 7번대의 간판이 될 만한 실력이지만,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는 온갖 어려운 임무들을 도맡고 있어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려진 편은 아니다....
‘방금 그거, 제대로 먹었으면 즉사였어... 무의식적으로 스페이드의 마력을 쓰지 않았으면 단번에 골로 갔다.’
도대체 왜 저 여자가 여기에 있는 거냐... 설마하니 여기도 순찰 범위였나...?
13호가 살아있는 건, 그녀가 봐줬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스페이드의 마력 덕분이었다. 스페이드와 섹스를 많이 해두길 잘했다.
그 마력도, 미처 막아내지 못한 데미지를 치료하는데 거의 다 써버리고 있다.
‘클럽은 안은지 좀 됐어. 마력은 좀 있지만 충분한 정도는 아냐. ...이대로 저 괴물 같은 녀석이랑 싸워야하나.’
“뭘 멀뚱히 서있나, 빙시야. 내가 가까?”
“그 싸구려 사투리 좀 그만해주겠어?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는 입장으로서 듣기 굉장히 거슬리네.”
“빌런 주제에, 뭐? 하,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데이.”
채앵-!
사납게 짖는 체크의 양손, 손가락 사이사이에 작은 비수가 늘어섰다. 저걸 어떤 방식으로 투척하는지는 몰라도, 아까 자전거와 같은 위력으로 날아온다면 뼈째 꿰여버릴 거다.
후우.
13호는 한숨을 내쉬고,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그리고는 단숨에, 이쪽을 향해 살기를 팍팍 뿌리는 체크를 향해 달렸다.
“스페이드, 너는 말려들지 않게 뒤로 물러서그라. ...간다, 이 빌어먹을 육갑아!”
호기롭게 외치며, 체크도 13호에게 맞대응하듯 낮게 숙인 채 달려들었다.
아뿔싸. 판단 미스다. 비수를 들었으니 투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체크는 비수를 투척용으로 쓰는 대신――너클 마냥, 달려드는 13호를 향해 쳐올리듯 휘두른 것이다.
채채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체크는 눈썹을 움찔 떨며 주먹을 회수했다.
13호의 손에 들린 것은 일전, 시궁쥐의 똘마니를 상대할 때도 썼던 쇠사슬. 체크가 또다시 비수를 휘두르자, 이 역시 사슬로 막는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연격, 연격, 연격.
체크의 손에 들린 비수가 끊임없이 멤돌며 13호의 목덜미를 노리면, 13호는 손에 든 사슬이나 허공에 새로 만들어 낸 사슬로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그러다 단숨에 거리를 벌리고 사슬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사슬을, 체크는 손에 든 비수로 아무렇지 않게 쳐내며 다시 13호에게 쇄도한다.
“크으...!”
애초부터 마력이 불리하다. 정면 승부는 피해야한다.
13호는 허공에 새로이 불러낸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감아, 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체크의 눈에는 한순간에 날아오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쳐내려와라 육갑아!”
“으익?!”
피잉-! 번개 같은 속도로 체크의 손에 들려있던 비수가 두 개, 13호를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어, 다행히 귀만 살짝 스치는 정도로 그쳤다.
“잠깐 가만히 있자!”
13호가 손에 든 쇠사슬을 당기자, 체크의 주변에 힘을 잃고 널브러졌던 쇠사슬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휘몰아치며, 단숨에 체크의 온 몸을 휘감았다.
“이까짓 거!”
그녀의 몸에 휘감겨 들기 전, 그녀가 팔을 크게 휘젓자 사슬이 썽둥 단숨에 썰려나갔다. 썰려나간 사슬은 힘을 잃은 듯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체크를 둘러싼 쇠사슬은 결국 잠깐 밖에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무력해졌지만, 13호에게는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가 여행자. 우리는 모두가 영웅. 그런 우리들의 여행과 모험의 날이 밝았다. 필요한 건 여행을 떠나는 배. 지금 바로, 내게 주오.】”
마력으로 강화된 오감이, 13호의 나긋한 읊조림을 포착한다.
주문?!
“저 육갑이......!”
체크가 당황하며 대비하자, 13호는 들어올렸던 오른손을 단숨에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전통거리의 골목길 한 켠이 단숨에 짓뭉개졌다.
* * *
“뭐......?!”
스페이드는 눈 앞의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녀의 코 앞에, 골목길을 완전히 짓뭉개며 ‘거대한 배’가 나타난 것이다. 마치 황금으로 도배된 듯한 배는 이상하게도 앞의 절반밖에 없었으며, 남은 절반이 있어야 할 부분은 흐릿한 안개 같은 것으로 덮여있었다.
그보다 체크 씨가, 저 갑자기 튀어나온 배에 치여서 담벼락을 몇 개나 뚫고 날아갔는데....
“꺄앗?!”
스페이드 위로, 13호가 허공에서 풀썩 떨어졌다. 어쩌지 못하고 13호 밑에 깔린 스페이드가 아동바동 팔을 흔들었다.
“하아...... 마력을 다 썻어. 휘말리진 않았지?”
“으급...! 빨리 비켜어......!”
“미안미안, 힘이 안 들어가네.”
13호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없이, 자신이 만들어낸 참사를 감흥 없이 바라봤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만들었으니, 다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없길 바란다. 체크는 배에 치여 날아갔으니, 아마 무사하진 않겠지. 죽진 않았을 거다. 그러길 바란다. 그래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은 다쳤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란다.
‘오래 싸우면 불리하니까... 이게 남은 마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어.’
덕분에 단번에 마력이 텅텅 비었다. 그래도 이 정도 공격이면 아무리 괴물이 같은 히어로라도 상당한 데미지가 들어갔을 터다. 상대가 몸을 추스르는 사이, 도망쳐야 한다.
슬슬 참모한테 연락이 갔을 텐데.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확인하려니, 스페이드가 간신히 얼굴을 빼냈다.
“정말! 무거우니까 빨리 내리라고! ......아, 체크 언니!”
“응? 야, 농담하지 말고....”
13호가 고개를 들어, 스페이드와 같은 곳을 바라봤다.
담벼락을 몇 개나 뚫고 날아갔으면서, 그 잔해를 뚫고 체크가 유유히 걸어나오고 있다. 옷은 좀 헤졌지만, 걸음걸이도 멀쩡한 것이 데미지가 거의 없어 보였다.
말도 안 돼. 진짜 괴물이구나, 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