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9 빌런과 히어로의 두근두근♥ 데이트(2)
“이거 옷 어때?”
“어? 으, 옷?”
“그래. 옷. ...뭐야, 멍하니 있고.”
13호의 손에 들린 건 산뜻한 느낌의 롱셔츠. 스페이드는 눈 앞에 내밀어진 셔츠를 보고, 13호의 얼굴을 보고, 다시 셔츠를 보고, 다시 13호의 얼굴을 봤다.
“너, 여장하려고......?”
“내가 입겠다는 게 아냐!”
아무래도 보스한테 선물할 옷을 찾는 것 같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의외로 상사를 아끼는 부하네.
“글쎄. 자신 없으면 옷은 선물하는 건 좀... 옷은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아니면 별로니까. 막상 선물 받아도 어울리는 하의가 없어서 괜히 돈을 또 쓴다거나 하는 일도 있고.”
“그럼 상하의 맞춰서 줘야겠네. 요즘 보스가 밖에 안 나가니까, 옷도 제대로 입기 귀찮아하는 거 같아서... 계절도 바뀌는 데 옷은 있을는지.”
엄마인 줄 알았다. 이 녀석, 의외로 챙기는 거 좋아하는 걸지도. 스페이드가 옷을 몇 벌 골라주자, 13호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시원스레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닌 듯, 13호는 또다시 매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페이드, 이건 어때? 너한테.”
“이것도 사게? 그 사람이랑은 안 어울릴걸?”
“아니, 그게 아니라.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
“나?”
스페이드는 눈을 깜박였다. 밝은 다홍색과 베이지의 체크셔츠, 그리고 검은 바지.
“괜찮은 것 같으면, 탈의실에서 갈아입어 봐.”
그렇구나!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거구나, 탈의실 능욕!
스페이드는 경계하는 눈으로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바로는 들어오지 않겠지. 아마도 옷을 절반쯤 벗은 시점, 뛰쳐나갈 수도 없게 허를 찌르고 들어올게 분명하다. 그리고 “크헤헤헤” 웃으며 나를 희롱하기 시작하겠지.
각오를 다지고, 화끈하게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렸다. 이렇게 된 거, 마음을 굳세게 먹고 해버리지 뭐! 괜찮아! 난 지지 않으니까! 13호 벌레자식!
속으로 13호를 욕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진 기세로 재빠르게 가져온 옷을 입으려 했지만, 그 손길도 차츰 느려졌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왜 안 오지? 생각보다 늦는데?’
원래라면 이 타이밍 쯤에 짜잔, 하고 들어올 것 같은데. 이상하네.
느릿느릿 옷의 단추까지 다 잠갔지만, 13호는 들어오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옷맵시를 확인하면서도 계속 경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13호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라. 직원한테 잡혔나?
“오, 나왔네.”
“......들어오려던 거 아니었어?”
“응? 무슨 뜻이야?”
“...아냐, 아무 것도.”
탈의실 밖으로 나오니, 한가롭게 몇 벌의 옷을 더 들고 온 13호가 태연하게 맞아주었다.
“잘 어울리네. 귀엽다고 해야 하나... 사랑스러워.”
“......역겨워. 징그러워.”
“칭찬해 줘도 뭐라 그러네. 그보다 나도 옷 좀 사려는데, 좀 봐줘. 이거 괜찮은 것 같아?”
“으엑. 이건 좀 안 어울리는데. 저쪽 파란색 스트라이프 무늬로... 응, 이걸로 입어봐. 바지도 살 거면 이 쪽이 잘 어울릴 것 같고....”
엉겁결에 스페이드가 어울리다고 생각하는 옷을 몇 벌 정도 꺼내놓고 보니, 13호는 알았다며 전부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스페이드.
‘뭐지, 뭐야, 뭐냐, 무슨 속셈이야, 저 녀석. 여기선 범할 생각 없는 거야?’
하긴, 옷가게는 사람 눈도 많고,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뭐지......
왠지 조금, 아쉬운 기분이.......
‘헉?! 설마! 아냐아냐! 아니라고! 그냥 예상이 빗나가서 그런 걸 거야!’
“뭘 그렇게 도리도리 젓고 있어? 이 옷 어때?”
“아무 것도 아냐! ......이상해. 촌스러. 다른 걸로 입어.”
“그래? 괜찮은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얼굴이 문제였어. 옷을 바꿔도 소용이 없겠는데.”
“너무하네 진짜?!”
이래저래 티격태격했지만, 결국 꽤나 어울리는 한 벌을 골라주자 13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구매했다. 덤으로 스페이드의 것도.
“선물이야.”
“...어차피 돌아가면 이상한 옷이나 입게 할 거면서.”
13호는 부정하진 않았다. 그럴 거면 왜 사주는 거야? ...일단 기쁘게 받겠다만.
중간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서점에도 들리고 보니 영화 상영시간은 금방 다가왔다. 이 시점에서 아직도 13호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화관인거야. 분명 영화관이야.’
영화관 안에서 희롱할 예정이다. 그게 틀림 없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가득한 영화관에서 약점을 잡은 여성을 옆에 앉히고 몰래 희롱한다... 는 내용의 책을 얼핏 본 것도 같다.
그렇다, 분명, 어두운 영화관에서 옆에 앉은 자신의 허벅지를, 팝콘을 먹는 척 슬금슬금 손대기 시작하고, 스멀스멀 올라와 자신의 팬티 너머, 비부를 자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곳을 문질문질 문지르면서 귓가에 대고,
‘영화 상영시간 1시간 40분 동안... 버틸 수 있을까?’
‘읏......지지, 않아...!’
‘훗. 기대할게. 애니메이션이라 애들도 많으니까, 불건전한 건 보여주지 않도록 잘해 봐.’
그리고 시작되는 1시간 40분 동안의 교묘한 능욕. 나는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도 쾌감을 이기기 위해 몸을 뒤틀고.......
그래! 분명 이런 시나리오야! 이 자식, 13호, 야비한 놈! 나는 절대――
“콜라랑 팝콘은 세트로 주문하자. 디럭스 괜찮아?”
“지지 않을 거니까!”
“......응?”
“아, 아니. 응. 디럭스...... 좋아....”
팝콘과 콜라를 들고 상영관 안에 들어간다.
13호를 향한 경계는 조금도 풀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든, 희롱하려면 희롱하든지! 보게 될 영화가 엘즈니의 애니메이션인 만큼 아이들도 많다. 만에 하나라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이 갈만한 건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13호가 무슨 희롱을 하든 견뎌내 보이겠다! 무표정 무감정 철벽의 스페이드가 되는 거야!
“오, 시작한다.”
결심을 굳히고, 언제 어떻게 13호가 손 대더라도 괜찮도록, 버틸 수 있도록 태세를 단단히 했다.
영화는 재밌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어어어어어어어어~~~~~~~~~~?!’
맙소사. 이럴 리가 없어. 그 어두운 공간에서, 몰래 장난치기 좋은 장소에서 13호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내 옆에 있는 사람 13호가 아닌 거 아냐?!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스페이드에게, 13호는 잠깐 걷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저녁 먹긴 좀 이르고, 근처에 전통 디저트 거리가 있다니까 가보자.”
설마 싶었는데.
정말 믿을 수 없지만.
이 남자...... 순수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다거나?
전통 디저트 거리는, 그 이름대로 전통 느낌이 물씬 나는 카페나 가게가 거리 전체에 주욱 늘어서 있었다. 세련된 한옥이 눈길을 끄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수수한 한복 차림으로 주전부리를 파는 노점들도 있었다.
색다른 느낌에 신기해하며 둘러보다가, 13호를 졸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인절미 아이스크림이라고, 구운 인절미로 동그란 아이스크림을 접듯이 덮은 디저트였다. 플라스틱 포크로 찍어서 베어무니, 인절미 특유의 고소함과 아이스크림의 단맛, 시원함이 입 안 가득 스며들어서 좋았다.
“맛있어?”
“응!”
“그럼 나도 한 입.”
“엇, 아앗~~~~?!”
허락도 없이, 13호의 얼굴이 가까이 온다 싶더니 코 앞에서 자신의 손에 들린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베어물었다. 갑자기 얼굴이 다가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야! 내가 입 댄 쪽으로 먹으면 어떡해!”
“뭐 어때. 오늘 하루는 연인사인데.”
“인정 안 해! 싫어!”
“싫어? 네 본분은 뭐다? 데이트 내내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해줄까?”
“......으그그그그.”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체념하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와구와구 씹어삼켰다. ...맛있네.
단순히 눈에 띄는 곳을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뿐인데, 눈치채고 보니 해가 거의 기울어있었다. 새빨간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슬슬 돌아가야겠네, 13호가 중얼거렸다.
결국 끝까지, 그는 스페이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13호.”
“응?”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오늘 나를 데리고 온 거.”
“무슨 짓이라니.”
“아지트에서 나오고 난 뒤로, 넌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처럼 희롱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세뇌를 더 하려 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옷을 사주고, 내가 먹고 싶어하면 사주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그래서 오히려 이상해.”
“다 너한테 좋은 일 뿐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게 대가 없는 호의니까. ...너, 무슨 생각이야?”
“연인인 척을 해봤을 뿐인데.”
13호는 턱을 긁적이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스페이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머지는, 변덕 같은 거야.”
“변덕?”
“응. 단순히, 너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변덕.”
스페이드는 히어로. 13호는 빌런. 거기다 앙숙.
아마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이 연인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시간은, 관계는 두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 있는 한 절대로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 스페이드는 포로가 된 만큼 그럴 가능성이 더욱 더 없어진다. 13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그녀에게, 그녀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몹쓸 짓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빌런이고, 너는 숙적인 히어로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능욕도, 세뇌도 몹쓸 짓일지언정, 옳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는 빌런으로서 앞으로도 너희를 더욱 능욕할 거고, 타락시킬 거고, 세뇌시키고,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승리할 거다.”
“......그럴 거면 그냥 아지트에 가둬놓고 하던 대로 하지 그랬어. 오늘 이건 뭐야? 속죄?”
“이런 걸로 속죄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단순한 변덕. 구류 중인 포로에게, 잠깐 바깥 공기 정도는 쐬주자, 라는 생각에서 난 변덕이야. 깊게 생각하지 마. 이런 거로 너에 대한 처우가 나아질 거라던가, 그런 망상도 하지 마.”
스페이드는 핫, 하고 웃었다. 참으로 당돌한 남자다, 13호는.
팔을 뻗어, 13호의 멱살을 꽉 붙잡았다.
“오늘 나오게 해준 건 고마워. 음식도 맛있었고, 인절미 아이스크림은 최고였고, 영화는 재밌었어. ――하지만 착각하지마. 네가 무슨 짓을 하건, 어떤 최악의 짓거릴 하건 못 견딜 정도로 약한 내가 아니니까!”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미쳐버렸다. 별자리의 능력이 발현되고, 사람은 각성자와 비각성자로 나뉘고, 빌런이 생기고 히어로가 생기고, 윤리와 도덕은 파탄 나서 생명의 가치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편하게 죽을 생각 따위, 한 적 없다.
“난 빌런에게 패배한 히어로일 뿐이야. 어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든지! 패배했어도 나는 7번대의 A급 히어로 스페이드니까, 절대 지지 않을 거거든! 얼마든지 괴롭혀 봐! 난 열심히 발버둥치고 도망치고 빠져나가서, 언젠가 반드시 너희들을 잡아들이고, 당당하게 복수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