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7 역시 빌런은 치사하게 살아야지(2)
“애플, 요즘 남자친구가 생겼다던데요. 아, 원래 있었던 건가요.”
“아뇨, 최근에 생긴 게 맞아요. 남자는 몇 번 사귄 적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꽤 오래 없었네요.”
“몇 번이라니… 확실히 애플은 여자인 제가 봐도 예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다들 좋은 사람이었어요. 헤어질 때도 나쁘지 않았고요. …딱 한 번 빼고.”
“한 번이요?”
“상대가 스토커가 된 적이 있었거든요.”
“그거 큰일이었네요.”
“그런데 어느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어요.”
“포기한 걸까요?”
“나중에 들었는데, 제 친위대라는 사람들이 매장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친위대?”
“아하하, 농담이겠죠. 친구가 말해주긴 했는데, 참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해요.”
“왠지, 애플이라면 있을 것도 같네요….”
“에~이, 대장님도. 저보다 예쁜 애들도 많은 걸요~.”
아니…그래도 역시, 애플은 특별히 예쁘다고… 생각…….
“…….”
“대장님?”
“…아, 죄송해요, 조금, 피곤한지…… 잠깐 졸았네요.”
뭐지…. 왠지, 머리가 무거워…….
“피곤하실만해요, 대장님. 요즘 항상 무리하시잖아요.”
“아뇨…… 전 대장이니까….”
“그렇네요… 대장님은 역시 대단해요….”
“감사…해요….. 애플도… 무척, 대단하다고….”
어딘지 멍한 기분….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깊은 바다에 푸욱 잠기는 것 같아서…….
“이 아로마는 피로회복에 아주 좋은 아로마니까요… 좀 더 숨을 깊~이, 깊~이 들이쉬어주세요….”
“깊……이…….”
그 말대로 숨을 깊이 들이 쉰다. 아, 향기가 좋다. 나중에 사서 방에도 둘까.
“대장님. 피곤하시죠?”
“아…… 응…….”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몸을 맡겨보세요… 자아, 둥실둥실, 둥실둥실… 기분이 점점 좋아지고… 어깨가 가볍고… 편안해집니다…….”
아아, 확실히 그 말대로.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애플의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
어느샌가 애플은 그녀의 옆에 다가와있었지만 라헤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가볍게 흔들자, 힘이 빠진 인형처럼 애플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 흔들림마저 마치 감싸안는 요람처럼 느껴져, 편안했다.
“라헤 대장님… 당신은 누구일까요…….”
“나…는… 7번대 대장… 라헤……입니다….”
“본래 이름은요?”
“……유…정하….”
애플은 몇 가지 질문을 더하며, 라헤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름 상태가 만족스러운 것을 확인하고, 애플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라헤의 귀에 대었다.
“……장님, 라헤 대장님?”
“핫?!”
라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책상이 가까워져 있다. 아니, 자신이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자, 잠들어버렸나 보네….
“후후,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이런… 대장이라는 사람이 부하 앞에서 잠들다니, 부끄럽군요.”
“대장님도 사람인 걸요. 이러는 편이 친근해서 전 좋아요.”
사무실을 가득 메웠던 아로마 향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애플이 이미 창을 전부 열어 환기를 시켜놓은 덕이다.
조금 아쉬운 기분도 든다. 어쩐지 묘하게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대장님, 최근 들어 매일 잔업하시니까, 매일 간식을 좀 준비해서 휴식시간을 만들도록 할게요.”
“예? 아니, 애플, 그럴 필요까진――”
“괜찮겠죠?”
애플은 라헤의 눈을 올곧이 쳐다봤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응…… 뭐, 신경 써주는 거고, 부하의 대접을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다.
“예, 이런 시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대장님을 위해 최고의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진 안해도 되는데요….”
“늘 고생하는 대장님을 위해서인 걸요! 어중간한 것으론 만족 못합니다!”
“고, 고마워요.”
대화하면서 잠에 들 정도다. 더 이상 업무는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한 라헤는, 애플과 함께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숙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애플은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주인에게로.
[수고했다, 애플. 아주 잘 해줬어.]
“감사합니다… 이 애플, 주인님을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 다음 번 만남 때 열심히 칭찬해주마. 일단은 매일 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할 테니, 잘 준비해줘.]
“네에, 주인님♥”
애플은 13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듯, 뺨은 상기되고,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속옷은 이미 희미하게 젖어들어가고 있다.
[후후.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하겠다. 애플, 너는 나의, 뭐지?]
“저는 13호님과, 참모님의 암캐이고, 노예이고, 인형입니다… 두 분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젖어버리는, 천박한 암캐예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써주시고, 명령해주세요, 주인님…♥”
[좋아, 잘했다. 그 선언을 잊지마. 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네 마음에, 네 영혼에 새겨라….]
“하으…… 이미, 이미 지워질 수 없을 만큼 새겨졌는 걸요… 저는 언제까지나 13호님의 노예입니다…♥”
황홀경에 젖은 표정으로, 애플은 몇 번이나 노예선언을 반복하고, 몇 가지 암시를 더 주입받게 되었다.
* * *
후우…….
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아지트에 있고 라헤는 저 멀리 7번대 기지에 있는데도, 뭔가 잘못하면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긴장감에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런데 애플 이 여자, 너무 세뇌가 잘 됐는데?
아니, 내가 세뇌하긴 했지만…. 어쩌면 참모의 테크닉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참모한테 세뇌 테크닉을 좀 배워볼까.
그건 그렇고.
“잘 될까…?”
스페이드가 이곳에 있다는 걸 들켰다. 그리고 대략적인 위치도 특정된 상태. 이대로면 얼마 못 가 발견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두가지 낭보는 아직 【시궁쥐】의 건으로 7번대 쪽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오늘 7번대의 대장 라헤에게 세뇌의 독침을 찔러놨단 것이다. 이것으로 조금 유연하게 책략을 짤 수 있겠지.
다만 문제는,
“과연 대장이라고 해야하나… 세뇌가 잘 안 먹혔어.”
애플을 통해 질문을 하면 표면적인 질문, 그러니까 이름이나 공개된 정보는 손쉽게 답한다. 그러나 조금만 심도 있는 질문, 그러니까 비밀성 질문도 아닌 극히 개인적인 질문에도 조금도 답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따르게 하려 하니, 잘 모르는 목소리라며 거부하려 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애플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목소리’라며 반복해서 암시를 걸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약에 저항감이 있거나, 정신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연구해봐야 겠는걸.
“어떻게든 허를 찔러서, 하나……”
그러나 상대는 강대하고, 피통 9999에서 이제 겨우 10언저리를 깎은 기분이다. 앞으로는 서서히 약점을 벌려가며, 단번에 집어삼킬 뭔가를 만들어내야겠지.
……자, 그럼 다음은 어떤 말을 움직여야 할까….
* * *
“……이드 씨, 스페이드 씨;.”
“음냐….. 음냐음냐… 쿠울~.”
“…….스페이드 씨! 일어나주세요!”
“음냐앗?!”
스페이드가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감각에 잠에서 깨자, 익숙한 클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 클럽?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조금, 얘기할 게 있어서요.”
뭔가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스페이드는 뺨을 짝짝 두드려 잠을 깨고, 침대 위에 앉았다.
“그런데 클럽, 옷이 그게 뭐야?”
“……………………………아무 말 하지 말아주세요.”
달빛에 비친 클럽의 모습은, 뭐랄까, 상당히 특이하달까.
군복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옛날 느낌의. 안 그래도 몸집이 작은 클럽에게는 상당히 커서, 바지는 입지도 않았고 소매는 손을 완전히 가리고도 한뼘은 튀어나왔다.
“내기에서 이겨서 제대로 된 옷 주기로 한 거 아냐? 나는 13호가 내일까지 구해다주기로 했는데.”
“…참모가, 원하는 거 골라보라고 하면서 절 데리고 가더니…… 이상한 코스프레 같은 옷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가장 무난한 게 이거였다니까요. 진짜 웃기지도 않아서. 그 인간, 진성 변태예요! 코스프레도 좀 적당한 걸 두던가!”
“그건 알고 있지만. …우와, 바지도 안 입은 이것보다 더 야해?”
“그렇다니까요! 지금 이게 노출도가 제일 적은 거예요!”
끔찍하다. 설마 내일, 13호도 저런 옷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싶어서 불안했다. 아니, 저 정도면 양반이지. 배라던가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요상한 코스프레 옷을, 거기다 고양이 귀라던가 꼬리라던가 날개라던가 정말 알 수 없는 취미의 것들을 가져오면 어떡해야할까.
‘……그 때는 그냥 혀를 깨물고 죽을까.’
거기까지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실실 웃을 거 생각하면 더욱 더!
“그런 것보다 스페이드 씨, 앞으로의 얘길 해야해요.”
“응? 무슨 얘기?”
“제가 이곳에 남아있을 시간이,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아아, 그렇다. 그러고 보면 클럽은 딱 일주일만 이곳에 구속해둔다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클럽은 먼저 가는구나…….
“으으… 외로워지겠네. 잘 가, 클럽. 나도 어서 돌아가도록 할게….”
“바보인가요, 스페이드 씨는. 무슨 무른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응? 나 바보야?
“저는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스페이드 씨까지 돌려놓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잖아요. 무엇보다 7번대는 스페이드 씨가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를테고.”
“어… 그런가?”
“그런가, 가 아니에요! 이래서는 스페이드 씨 혼자 여기 남게 된다고요! 그렇게 되었다가, 만약 저라는 성욕의 배출구를 잃어버린 참모까지 스페이드 씨에게 손을 대기 시작하면… 스페이드 씨는 매일 같이 쉬지 않고 두명을 상대하느라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거라고요! 특수한 성벽, 특수한 페티쉬에 별에 별 마니악한 플레이로 스페이드 씨의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질지도 몰라요…!”
스페이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조금 과장된 감은 있지만 확실히 그럴 것도 같았다.
“어, 어쩌지… 나 어느 순간 완전히 긴장을 풀고 있었어.”
“그런 것 같아서 찾아온 거예요, 스페이드 씨.”
클럽은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저희, 여기서 탈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