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4 추락한 빌런은 어부지리에 기뻐한다(4)
살이 맞물리는 소리, 찌걱찌걱, 하는 음란한 물소리, 하복부를 채우는, 뜨거운 불기둥 같은 감촉.
“하아, 흑, 윽, 하아......!”
..............................여긴?
아니, 그보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으윽, 싼다, 스페이드...!”
“하악, 윽, 가, 간다아~~~~~~~!”
......뭐.
상관 없나.
어쩐지 기분이 좋고, 몸은 따뜻하고 단단한 것에 감싸여 평온하다. 열락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만, 목이 성감대가 되어버린 것처럼 한숨을 내쉴때마다 기분이 좋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익숙한 얼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
아아, 지금의 열락에 잠겨, 평생 살아도... 나쁘지 않을지도.
“스페이드? 이제 좀 진정이 돼?”
“흐, 하아, 으... 아지익.......”
눈 앞의 단단한 육체를 꼬옥 끌어안는다. 절정에 달한 몸은 피로감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다. 힘을 빼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그건 싫다. 부족한 건 싫다. 없는 건 싫다. 잔뜩 채워졌으면 좋겠다. 혼자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필요하다. 이 남자가 필요하다.
아아, 그렇다. 눈 앞에 있는 게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숨을 들이마쉬고, 혀를 내밀어 남자의 피부를 핥는다. 짭짤한 땀의 맛과, 남성의 페로몬이 내 몸을, 내 뇌를 자극했다. 페로몬에 반응해 멋대로 벌어진 꽃잎에서 애액이 질척하게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아~♥”
좋다. 기쁘다. 행복하다.
이대로 이 품에 감싸여, 언제까지도 잠에 들고 싶다.......
* * *
“.........................................................악몽이야.”
뭔가, 터무니 없는 꿈을 꾼 것 같다. 스페이드는 물 먹은 솜처럼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리고, 하복부가, 말하기 부끄러운 그곳이 욱신거린다.
‘아아, 제발, 제발 꿈이라고 말해줘~~~ 아니, 꿈이라도 그런 꿈, 하물며 상대로 그 녀석이 나오다니 그것도 싫지마안~~~~~~!’
민망하다. 나른함에 짓눌리던 몸에 피가 돌고, 얼굴에 열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여기 어디지.”
그러나 자괴감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뿐이었다. 이래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만큼 현 상황을 정리한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폭신한 침대도 기분 좋았지만, 이불 아래의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이마를 짚게 만들었다.
아니, 실오라기는 아니지만, 걸친게 있긴 있었다. 손목이지만.
양 손목에는 은색 팔찌가 채워져 있다. 거기서 이어진 체인이 차르륵, 쇳소리를 냈다.
‘잡혀버렸나.’
【시궁쥐】측은 아니다. 그 똘마니 같은 남자에게 완벽하게 무력화 된 후, 잔뜩 삼킨 미약 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졌었지만 그 사이 누군가가 난입했던 사실만은 기억하고 있다.
아니, 무엇보다 그 남자, 13호의 얼굴이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있다. 아까의 그 기억이 꿈이 아니라면, 정말 만에 하나 믿고 싶지는 않지만 하늘이 무정하게도 현실이라면――
‘나는, 그 남자에게 구해지고, 음란하게 매달려서, 짐승처럼 섹스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개를 붙들고 쾅쾅 두드렸다. 참을 수 없다. 죽고 싶어!
“아, 스페이드 씨! 일어나셨네요?”
스페이드가 홀로 발광하고 있자니, 별안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반가운 목소리, 익숙한 얼굴이었다.
“클럽!”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한 때는 어떻게 되나 싶어서....”
서둘러 다가오려던 클럽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듯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힌다.
“아, 전 아무 것도 기억 못하니까요. ...그, 그건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스페이드 씨가 13호 님한테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안겨들었던 일 같은 거, 전 전혀 기억하지 않으니까요. 하필이면 제가 옆 방이라, 밤새 신음소리를 듣거나 하는 일도 없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스페이드 씨. 걱정마세요.”
“나를 죽여줘어어어어어어어어~~~~~~~~!!!!”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는 스페이드를, 클럽은 열심히 말렸다.
어제의 일은 스페이드도 대강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클럽을 통해 한 번 더 전말을 듣게 되었다.
참모를 통해 【시궁쥐】가 7번대, 그중 스페이드를 덮칠 것이라는 걸 알았고, 13호의 목격정보를 미끼로 꾀어낼 것도 밝혀내었다. 스페이드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사히 그녀를 구출해냈다.
그리고 참모의 능력을 이용해 아지트로 이동,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13호 그 녀석은 뭐했지?'라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그 놈, 진짜 한 거 없네. 숟가락만 얹은 것 뿐이잖아.
“......중간에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전 모르니까요. 전 아무 것도 못 봤고 아무 것도 못 들었으니까요. 완전 발정이 난 스페이드 씨가 13호 님과 열락의 하룻밤을 보낸 건 모르니까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라~~~~~~!”
스페이드는 항의했지만, 그런다고 엎질러진 물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 뒤에는 클럽과 함께 식당에 향했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도 배는 고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 스페이드. 드디어 일어났구만.”
“13호. 하고 싶은 말은 무지하게 많은데, 일단...... 이 옷, 뭐야?”
13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
“와이셔츠잖아. 보면 몰라? 내 거긴 한데.”
“셔츠인거 누가 몰라?! 왜 이딴 걸 입히냐 이거야! 왜 하필 네 건데?! 왜 꼴랑 이거 한 장만 주는 거야?!”
“취향 문제로. 그거 잘 어울려. 그보다 내가 보고 싶어. 겁나 꼴린다, 그 모습.”
“누가 니 취향 물어봤어?!”
클럽이 가져다 준 옷이 지금 입고 있는 와이셔츠 한 장 뿐이었다. 다른 옷은 없냐고 물으니, 클럽은 거북한 얼굴로,
――‘이걸 입히게 하라고 하셔서’.
라는 대답 밖에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보다 클럽도 마찬가지로 와이셔츠 한 장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점에 깨달았다. 아니, 근데 클럽, 어쩐지 빌런 상대로 되게 저자세지 않아? 무슨 녀석들의 사용인이라도 된 것처럼....
“스페이드. 악 쓸 체력도 없을 텐데 진정하고, 제대로 상황 파악하라고. 네 처지를 생각하면, 알몸으로 나다니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텐데?”
“처지는 무슨 처지!”
“글쎄. 일단 몹쓸 녀석들한테 납치될 거, 내가 구해줬지?”
“거의 제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클럽이 뭔가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부하의 공적이 곧 상사의 공적인 법이다.
“그건, 그,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놈들, 위험해보였고... 아니, 그치만 여기도 위험하잖아! 적진 한가운데잖아! 그보다 네 녀석한테, 나는, 그, 세, 섹...... 해버리고...... 처음이었는데...........................”
“네가 발정나서 달라붙은 거잖아.”
“그건 약 때문에!”
거기다 처음도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세뇌한 채로 했던 건 기억 못하는 것 같다.
“어쨌든 잘 아네. 더럽게 질 나쁜 녀석들한테 끌려가는 건 면했지만, 여기도 나쁜 빌런이라고. 악당한테 도움을 받았으니, 대가가 있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대, 대가?”
“그래. 기억해내, 스페이드. 나는, 너의 뭐지?”
13호가 순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스페이드의 몸이 긴장했다.
나는... 이 남자의?
동시에 그것이 열쇠가 된 듯, 달칵, 잠금이 풀리고 무언가가 안쪽 깊은 곳에서, 입을 억지로 비집어 열고 튀어나왔다.
“13호님은...... 저의...... 주인님이십니다......에?”
스스로 말하고서도 놀라는 스페이드. 그런 스페이드를, 13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세뇌에요, 스페이드. ...어쩔 수 없습니다. 저 남자에게 당한 거예요.”
“세......뇌? 설마, 말도 안 돼....”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건 분명 스스로 한 말이다. 거기다 한 번 잠금이 풀리고 나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스페이드를 지배했다.
아아, 그렇다. 나는 13호 님의 노예. 13호 님은 나의 주인님.......
“――이라니, 말이 되냐앗!!!”
스페이드는 머리를 쾅쾅 벽에 박았다. 이래선 안 된다. 자아를 지켜야한다! 이건 말도 안 돼!
“아직 세뇌심도가 얕은가 보네. 뭐, 천천히 하지. 시간 들여 개발해나가는 것도 즐거우니까.”
“끄으으으으으...! 도망쳐주겠어, 반드시. 이따위 아지트, 별자리의 능력만 있으면...!”
“능력은 쓸 수 없을걸? 【시궁쥐】 놈들이 해놓은 건 처치해놨지만, 그 팔찌를 차고 있으면 마력이 제한되거든. ...애초에 어젯밤에 걸어둔 세뇌 암시 때문에 우리한테 위해를 가할 순 없지만.”
이럴 수가.......
여러모로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말대로 능력은 쓸 수 없었다.
“알았으면 밥이나 먹자, 배고프지?”
“누, 누가 당신이 만든 밥 따위....”
꼬르르르르르륵~.
퍼억!
“......배, 안 고파.”
“주린 배를 때린다고 배가 안 고파지는 건 아닐텐데....”
굶주림을 알리는 뱃소리가, 이렇게나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13호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진 스페이드를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앉아서 밥이나 먹어. 이제부터 우리 아지트를 위해 일하려면 체력 보충이 필수라고. ......뭐, 이런저런 일이 있으니까 말이지.”
“......그, 알겠어. 알겠는데. 그럼 최소한....”
“최소한 뭐?”
13호가 되묻자, 스페이드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이래저래 허전한 허벅지를 비볐다.
“그, 속옷 좀...... 줘.”
“싫어.”
즉답.
“왜?! 클럽은 줬다며!”
“속옷을 입힌 건 참모 취향이고, 이 쪽이 내 취향.”
“네 취향 따위 알게 뭐냐고오오오~~~~~~~!”
억울함 가득한 스페이드의 외침이 어비스의 온 아지트에 울렸다.
* * *
“반드시, 반드시 복수해주고 말 거야아아아아아~~~~!”
라는 외침이, 저 멀리 복도에서 들려왔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아지트의 창문 닦이를 맡겼더니 저런다. 그렇게 청소하기 싫은 걸까. 외로울까 싶어서 지나가는 길에 엉덩이도 만져줬는데.
“이야, 역시 13호님. 저로서는 차마 범접하지 못한 변태적인 취향을 강요한데다가, 물흐르는 듯한 성희롱까지.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평생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변태스러웠나?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발언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맙니다. 숨 쉬는 것만으로 여성들을 임신시킬만한 변태십니다.”
호들갑을 떠는 참모를 한 대 때리고,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스페이드한테 붙어있던 ‘벌레’는 분석이 끝났어?”
어젯밤 미약으로 인해 발정한 스페이드를 진정시키면서, 나는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그 결과 발견한 게, 목 뒤에 붙은 조그만 ‘벌레’였다.
“예. 도로시가 호기심을 가져 준 덕분에 금방 분석이 끝났습니다.”
“금방 끝났네?”
“도로시도 비슷한 류의 물건을 개발한 적이 있어서, 금방 분석이 끝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하다고는 했습니다만.”
“비슷한 류?”
“예. 클럽과 스페이드, 두 사람의 손목에 걸어놓은 팔찌 말입니다.”
그 팔찌는 수갑인 동시에 마력 억제용이다. 팔찌를 차고 있는 동안엔 능력을 쓸 수 없다....
“그럼 그 ‘벌레’도.”
“짐작하신대로, 마력을 억제하는 ‘벌레’입니다.”
과연, 그래서 스페이드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