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2 일상이 패배인 빌런, 패배가 싫은 히어로(9)
‘앗, 읏, 안, 안 대…이, 이거, 더느은……!’
“시, 13호 씨! 됐잖아요! 충분히 확인 했잖아요!”
[옷. 나도 모르게 열중해버렸네. ……네 말대로 충분한 것 같다.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줘.]
클럽을 희롱하던 인형들이 손을 뗐다. 지탱하던 손마저 사라져, 클럽은 거칠게 숨을 고르고는, 온 몸에 힘을 주며 다시 일어섰다. 보지에서 눅진한 국물이 실을 늘어뜨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잔뜩 묻혀진 로션과, 자신의 애액이 섞였을 미끈한 액체….
우르르 몰려있던 인형들이 좌우로 갈라져 영화관 내부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냈다.
[내가 있는 곳은 7번관이야. 제일 안 쪽에 있으니 찾아서 들어와.]
“알겠……어요.”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 이 복수는 반드시 해주마…!
속옷과 바지는 끌어 올렸지만, 인형이 벗겨버린 브래지어와 상의는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져간 거야? 이대로 가라고? 반나체인데? 상의 알몸인데?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13호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상의를 찾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아우우……. 진짜, 반드시, 처참하게, 전신 206개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서 서해 앞바다에 던져버리겠습니다…!’
휴대폰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민망함에 약간 허리를 숙인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나갔다.
여긴가…? 아니, 이건 6호관이고… 7호관은…… 이거네.
문을 열자, 드문드문 빛이 밝혀진 영화관이 보였다. 스크린은 새카만 화면을 비췄는데, 그 속에서 이따금 묘한 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왔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이딴…… 같잖은 몸수색을 시킨 게 누군데요…!”
“일단 말해두겠는데, 그거 참모 아이디어야. 이건 사족인데, ‘그림자인형’의 촉각은 참모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지금 상당히 만족한 모양이야.”
“……!”
죽인다…! 이 인간을 분쇄시켜버리면 참모 녀석은 프레스기에 넣어서 꽉꽉 압축시켜버리겠어…!
“그런데, 우와. 대단한 차림인데. 지금 나, 서버렸어. 안 그래도 영상보고 꼴리던 참인데.”
13호가 손에 든 스마트폰을 조작하자, 스크린에 자신의 모습이 커다랗게 떴다. 인형들에게 몸수색을 가장한 성희롱을 당하며, 꼴사납게 교성을 흘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을 보며, 클럽은 더욱 분노의 불길을 지폈다.
“Fuck. 역시 엄청난 변태자식이군요. …그래요. 다 각오한 바니까 상관 없습니다. 그보다 단말은요? 폭탄은? 이렇게 투항하러 왔다고요. 약속은 지켜주세요.”
“그래, 약속은 지킬게. 우린 빌런 집단이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
“단순히 지금 기폭시키지 않는게 아니에요. 지금 당장 폭탄의 작동 중지를 요구합니다. 처리반이 있다고는 해도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나 13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폭탄을 조작하는 단말을 꺼내는 것 같지도 않고, 그 참모나 과학자에게 연락해 폭탄을 멈춰달라고 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내가 들어오기 전에 조치를 끝내놨나? 아니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클럽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멤돌았다. 그리고 그 의문에, 13호가 답해주었다.
“――전부 거짓말이었으니까.”
“……에?”
“폭탄 같은 건 없어. 백화점에 설치된 폭탄도 내용물은 텅빈 가짜. 처음에 본보기로 보여준 것 말고는 제대로 된 폭탄은 없어.”
휘청, 클럽의 몸이 순간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다리에 힘을 줘서 바로 섰다. 뭐지, 오늘은 몸 상태가 이상하다….
“속았군요. 완전. 된통.”
“한가지 더 해줄까? 처음에 너한테 설명했던 마스크 쓴 대원 있지? 그거 참모야. 꽁꽁 싸매니 못 알아봤을테지.”
“……! …….하, 하하하하하하……!”
이제는 웃음 밖에 안 나온다.
어디까지.
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어디까지!
어디까지 사람을 농락해야 만족하는 거냐!
빠드득, 이를 갈았다. 마음을 가라앉힌다. 격정에 휩쓸리면 능력의 섬세한 컨트롤에 지장이 생긴다.
아무튼 좋은 소식 밖에 없지 않은가. 폭탄은 없고, 자신의 눈 앞에는 13호가 있고, 이 백화점을 나가면 참모가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자, 그럼. 무기도 없이 순순히 투항한 너를 데리고 아지트로 복귀해야 하는데.”
“…………………………………….웃기지 마.”
“싫다고 해도, 무기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나도 정말 쥐꼬리만큼이지만 마력이 남아있어. 싸움 경험도 많지. 스페이드처럼 신체강화가 특기가 아닌 너 정도면 이런 나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런 얘긴가요?”
클럽은 마력을 불태우며, 능력을 발동했다.
자신이 조작할 수 있는 ‘탄환’은 던질 수 있는 거면 뭐든 되는 게 아니다. 일단 익숙한 모양인 건 둘째치고, 손가락 사이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여야 하며 무엇보다 접촉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어야 한다.
이 마력을 넣는 것도 물체에 따라 파장이 있기 때문에, ‘탄환’으로 쓸만한 물건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관에 들어서서 새로운 ‘탄환’을 조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디까지나 무방비하게 찾아올 클럽이 아니다.
“【움직여라, 보이지 않는 손. 터져라, 나의 빛. 쏘아지는 그것은 반드시 적을 꿰뚫는 화살이 될찌니】.”
낭랑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힘을 받는 별자리는 【궁수자리(Sagittarius)】. 천리안의 능력도, 그녀가 쏘는 ‘탄환’――‘화살’이 정확하게 적을 맞출 수 있도록 보조하기 위한 것일 뿐.
그리고 지금 그녀가 쏘아내려는 ‘탄환’은, 이 백화점의 아래층, 잔뜩 늘어선 고양이들이 쏘아내려 하고 있었다.
테이블, 계단, 손잡이, 카운터… 어디든 좋다. 고양이들은 각자의 자리에 올라서서, 미리 클럽이 마력을 넣어둔 고무탄을 세팅해두었다. 그리고 지금 이시간, 그녀의 신호에 맞춰 모두가 일제히, 그 앞발로 고무탄을 쳐냈다.
총으로 쏘는 것보다 화력은 약하다. 부족한 화력은 마력과 능력으로 보충하면 된다.
일제히 허공에 떠오른 고무탄들은, 역시 일제히 방향을 바꾸더니 클럽의 유도에 따라 벽을 따라, 창문을 지나, 허공을 가르고, 목표한 지점을 향해 쏘아져갔다.
“【쏴라, 부숴라, 나의 적을 치라, 우리의 적을 섬멸하라――마탄의 사수(Saggitta Magica)!】.”
쏘아진 탄환은 총 23발.
그녀가 마지막, 능력의 이름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쏘아지던 모든 탄환의 마력이 최고 레벨로 치솟았다. 이대로라면 백화점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도 단번에 꿰뚫어버릴 수 있으리라.
각 탄환이 노리는 것은 정확히 13호. 어느 한 점을 노리는 것이 아닌 온 몸의 급소를 단번에 노리는 일격은, 요행으로라도 피할 수 없다.
【마탄의 사수】, 혹은 ‘원격조작탄’은 상대를 타겟팅해서 쏘아지는 유도탄 같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인지한 범위에서, 그녀의 의지에 따라 몇 번이고 그 방향을 바꿀 수 있고, 그녀가 원하는 타이밍에 가속이나 감속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그녀의 시야에 있기만 하면, 놓칠 일은 없다. 상대방이 피해낸다면 몇 번이고 방향을 비틀어 끝까지 맞춰주마. 방어하려한다면 방어를 피해서 맞춰주마.
말 그대로 저격의 귀재. 오로지 저격을 위한 능력.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이번 공격으로 13호의 숨통을 끊어내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3호 또한 전신을 찌르는 듯한 살기에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클럽이 한순간에 대량의 마력을 방출했다는 정도는 분명하게 느꼈다.
그러나.
13호는 자신이 꿰뚫리는 미래 따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어울리지 않게 당당하고 여유롭게 외쳤다.
“클럽, 「지금 당장 힘을 빼라」!”
순간 클럽은, 저도 모르게 마력의 운용을 중단했다. 말 그대로 힘을 뺐다.
지금 막 영화관의 벽을 꿰뚫고 그대로 13호를 저격하려 했던 탄환들이, 일제히 힘을 잃고 중력에 이끌려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능력의 발동――멈췄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에서도. 스르르, 클럽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다.
“……………………………………………..어?”
13호를 노리던 혼신의 일격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에 의해, 멋대로 중단 되었다.
“이거…… 어? 뭐……입니까?”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굴리며 바닥을 짚는 클럽. 그러나 몸에는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라. 뭐지. 뭐야. 뭐냐고. 이게 무슨.
“이야, 솔직히 방금은 좀 쫄았어. 살기만으로 숨은 멎을 것 같지, 혹시 암시가 제대로 걸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무슨… 당신, 당신인가요? 13호…… 대답하세요! 당신이 한 짓인가요?!”
“맞아.”
당혹해하는 클럽에게, 13호는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 입가에는 유쾌하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다.
“클럽, 네 ‘천리안’이 다른 대상과 감각을 동조해서 시야를 넓히는 것 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러고 보면 네게 쫓길 때도 어딜 가나 고양이가 있었지. 그때 너한테 역습당한 게 이렇게 이득이 될 줄은 몰랐어.”
“그래서 10층에는 고양이가 올라오지 못하게 막은 거군요… 다른 곳은 보여도 상관 없으니.”
“맞아. 그리고 네가 되도록 많은 고양이를 끌고와주길 바라기도 했지. 가능한 많은 고양이와 동조해서, 각 시각 정보와 후각 정보, 그리고 청각 정보를 몽땅 너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거야.”
요령부득한 학생에게 가르치듯, 13호는 클럽에게 조목조목 설명을 계속했다. 시종일관 얼굴에 걸린 히죽거리는 미소가 불쾌했다.
“집중시킨…다니.”
“우리 조직 특제 세뇌도구. 세뇌파를 발하는 구슬이랑 청각을 통해 뇌를 자극하는 세뇌음파, 거기다 가짜 폭탄에 묻혀둔 세뇌향… 저기 있는 스크린에 반짝이는 것도 같은 종류의 세뇌파고, 스피커에선 같은 음파가 나오고, 잘 맡아보면 세뇌향 냄새도 알아챌 거야. 워낙 오래 맡고 있었으니 꽤나 무감각해졌겠지만. 아, 그리고 인형들이 네게 발랐던 로션도 세뇌약이야.”
“세……뇌?”
“그래. 하나하나는 효과가 약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너를 함락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지. 하지만 수십 마리나 되는 고양이를 통해, 단번에 수십 배나 되는 자극을 단번에 네게 전달해준 거지.”
“설마, 그럴 수가….”
“솔직히 진짜로 될까 싶긴 했어. 확률은 반반에다, 제대로 걸렸는지 불안했다만… 이 앞에서 그 말도 안 되는 몸수색을 순순히 받아주는 걸 보고 확신했지.”
완전히, 손 안에서 놀아났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이 백화점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이렇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최초부터 이미 그녀는 13호에게, 빌런 조직 【어비스】에게 패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제게 의식은 있어요. 이성도 있습니다! 어째서 방금 당신의 외침에, 저는 순순히…!”
“말했잖아? 너는 그 말도 안 되는 몸수색도 순순히 받았다고. 뭐, 고양이 앞에 장난감을 흔드는 것처럼 목적을 미끼로 단락적인 사고를 유도했다… 는 건데, 복잡한 건 넘어갈게. 그 몸수색을 포함해 너와 했었던 모든 대화, 심지어 이 ‘테러를 막기 위해 네가 요구에 응하는’ 상황까지, 모든 것이――다 ‘내 말이면 뭐든지 따른다’라는 암시를 걸기 위한 큰 그림이었어. 이렇게 말하면 대답이 될까?”
모든 것은 그녀를 몰아넣기 위한 큰 그림.
그리고 13호는, 그녀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네가 졌다는 거야, 클럽.”
거기까지 듣고서야, 아아, 그렇군요, 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과의 대화 하나하나, 이렇게 된 상황까지도 전부 자신을 세뇌하긴 위한 거대한 ‘암시’였던 거군요.
시각, 청각, 후각, 청각까지도 전부 이용당해, 세뇌되기 쉬운 상태에 빠지고, 그대로 그가 준비한 ‘암시’가…… 제게…….
클럽은 뿌득,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완벽하게 완패.
분하다. 정말 분하다. 화가 난다. 히어로인 자신이, 빌런들에게,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당하다니.
“네 능력은 대단했어. 이런 상황에 혼자서 각오하고 뛰어드는 용기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 과학자를 다치게 한 건 용서 못하니까. 우리도 조금 진지하게 했을 뿐이야.”
“하, 하하…… 그러고 보면, 당신 주제에 드물게 장난 같지 않은 짓거리였네요.”
13호는 클럽의 앞에 거들먹거리듯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 가는 턱에 손을 대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체크메이트. 참모가 마킹한 내가 너와 접촉하고 있으니, 이대로 참모가 능력을 쓰면 넌 우리 아지트로 나와 함께 날아가게 돼. 네 말대로, 네 완패다. 클럽.”
“…….”
“그리고 이건, 내 승리 보상. 잘 받아갈테니, 「순순히 받아들여라, 클럽」.”
마지막으로 명령과 함께, 13호는 클럽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자신의 것으로 더럽히겠다는 양, 곧장 혀를 뻗어 클럽의 입술을 핥았다. 그리곤 그대로 입술을 가르고 그녀의 입 안으로 침입한다.
클럽은 저항하려 했지만, 암시의 영향으로 13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그녀는, 순순히 그 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읍….”
츄읍…… 츄…….
타액이 얽히며 음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입술을 얽은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그림자 속에 가라앉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패배를 싫어하던 히어로의, 완패였다.